[일곱교회시대]일곱 교회 시대 강해 5 버가모 교회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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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Chapter 5 - The Pergamean Church Age

CAB - 05




윌리엄 매리언 브래넘


‘일곱째 천사의 음성….’ 계시록 10:7







버가모 교회 시대


일곱 교회 시대 강해


제 5 장 


소 개


윌리엄 브래넘의 놀라운 사역은 말라기 4:5,6, 누가복음 17:30, 그리고 계시록 10:7 말씀에서 예언된 일들에 대하여 성령께서 응답하신 것이었습니다. 이 세계적인 사역은 많은 다른 성경 예언들이 절정에 달한 것이었고,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으로 지속적으로 역사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 언급된 이 사역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케 하는 사역이었습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면서 이 메시지를 읽을 동안 인쇄된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에 쓰이기를 우리는 기도합니다. 정확하면서도 축약하지 않은 번역을 제공하고자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영어 오디오 파일들이 브래넘 형제가 하신 영어 설교를 가장 잘 대표할 것입니다. 윌리엄 브래넘이 설교한 1,100여개의 설교들은 여러 언어로 통역과 번역이 되어 있으므로,   www.messagehub.info 에서 무료로 다운로드하고 인쇄할 수 있습니다.  더 자세히 알고자 하시면 이메일로 연락하시기 바랍니다. 이메일: biblechurch77@gmail.com


이 설교책자는 전체 복사하여 수정을 하지 않고 무상으로 배포하는 경우에만 복사하여 배포하실 수 있습니다. 제  5  장


버가모 교회 시대

(THE  PERGAMEAN  CHURCH  AGE)


계시록 2:12-17



버가모 교회의 천사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선 예리한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알고 네가 어디 사는 것을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내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리를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내가 미워하는 니골라당의 교리를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버가모


퍼가멈(Pergamum 고대 이름)은 미시아에 위치한 성으로, 세 개의 강이 지나는데 그 중 한 강은 바다로 흘러갔습니다. 이 성은 아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성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버가모는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도서관 다음으로 둘째가는 도서관을 가진 문화의 성읍이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성행하기도 했는데 사원 안에 가두어 먹였던 산 뱀의 행태로 숭배했던 에스큘러피우스를 경배하는 방탕한 의식들을 행했습니다. 물댄 작은 숲과 공중로와 공 원들이 있는 이 아름다운 도시에는 소수의 헌신적인 신자 무리가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허식적인 아름다움에 속지 않고 그 곳을 가득 채웠던 사탄 숭배를 혐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시  대


버가모 시대는 주후 312년에서 606년까지 약 삼백 년간 지속되었습니다.(Eng.p. 159)


사  자


각 시대에 보냄을 받은  사자를 선택하는 우리 하나님이 주신 규칙을 사용해서, 즉, 첫번째 사자 바울의 사역과 가장 흡사하게 닮은 사역을 가진 사람을 뽑는데, 우리는 아무 망설임 없이 마틴(Martin)을 버가모의 사자라고 선언합니다. 마틴은 315년에 헝가리에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일생을 바쳐 한 일은 그가 뚜르즈와 그 주변에서 감독으로 수고했던 프랑스에서였습니다. 그는 399년에 죽었습니다. 이 위대한 성도는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었던 성 패트릭의 삼촌이었습니다.

마틴은 직업군인의 직업을 수행하면서 그리스도께 나왔습니다. 아주 획기적인 기적이 일어났던 것도 그가 아직 이 직업에 종사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기적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거지가 시내 거리에서 아파서 누워 있습니다. 그 거리는 마틴이 보초를 맡고 있던 곳이었습니다. 거지는 얇은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겨울의 찬 바람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마틴이 지나가게 될 때까지는 아무도 거지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이 불쌍한 사람의 딱한 처지를 보자, 여벌 옷이 없었지만 마탄은 외투를 칼로 둘로 잘라 얼어가는 그 사람의 등 위에 그 천을 둘러주었습니다. 그는 그 거지를 잘 간호해주고 자기 갈 길로 갔습니다. 그 날 밤 마틴에게 환상 가운데 주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거지처럼, 마틴의 반쪽 옷을 어깨에 두르고 서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마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틴은 예비 신자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이 옷으로 날 입혔노라." 그때부터 마틴은 온 정성을 다해 주님을 섬기려고 애썼습니다. 그의 생애는 하나님의 권능을 표명하면서 기적의 연속이 되었습니다.

군을 떠나 교회에서 지도자가 된 후 마틴은 우상숭배에 대하여 아주 강경한 태세를 취했습니다. 그는 작은 숲들의 나무들을 잘 랐고 우상들을 깨고 제단들을 허물었습니다. 그러한 그의 행동에 대해 이교도들이 대항했을 때 그는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했던 식과 흡사하게 그들에게 도전했습니다. 그는 자기를 나무 밑둥에 묶으라고 제의했습니다. 그래서 나무가 잘려 넘어질 때 하나님이 개입하여 나무가 쓰러질 때 그 나무를 돌려 놓지 않으시면 마틴을 뭉게도록 말입니다. 그 사나운 이교도들은 언덕 한 편에 자라고 있던 한 나무에 마틴을 묶었고, 자연적인 중력의 당김이 나무가 쓰러지자마자 그를 뭉게게 하리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가 쓰러지기 시작할 그 때, 하나님은 그 나무를 빙 돌게 하여 모든 자연 법칙에 어긋나게 언덕 위로 향하게 하셨습니다. 나무는 쓰러질 때 도망가던 이교도 몇을 뭉게버렸습니다.

역사가들은 적어도 세 번은 마틴이 예수의 이름으로 믿음으로 죽은 자를 일으켰다고 인정했습니다. 한 번은 마틴은 죽은 애기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엘리사처럼, 그는 그 애기 위에 자기 몸을 쭉 펴 포개고 기도했습니다.(Eng.p. 160) 그 애기는 다시 살아나 건강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한 번은 마틴은 박해가 한창이던 때에 사형장에 끌려가고 있었던 한 형제를 도와 구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마틴이 도착했을 때에는 그 불쌍한 사람은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를 나무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그의 몸에는 생기가 없었고 그의 두 눈은 돌출되어 나와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틴은 그를 꺼내렸습니다. 마틴이 기도하자 그 사람은 생명을 되찾았고 기뻐하는 가족들에게 돌아갔습니다.

마틴은 원수가 그 누구이든지간에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많은 성령 충만한 성도들의 죽음에 책임이 있던 악한 황제를 개인적으로 대면하러 갔습니다. 그 황제는 알현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틴은 황제의 친구인 로마에 있던 잔인한 감독 다마써스를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거짓 포도나무에 속한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인 그 감독은 중재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틴은 왕궁에 돌아갔습니다. 이젠 성문이 잠겨 버렸고 사람들은 그를 들어오게 하지 않았습니다. 마틴은 얼굴을 땅에 대고 주님 앞에 엎드려 궁전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드렸습니다. 그는 일어나라고 말하는 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일어나자 성문들이 저절로 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뜰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거만한 통치자는 고개를 돌려 그와 얘기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마틴은 다시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불꽃이 보좌에서 계속 나왔고 불쾌한 황제는 재빨리 자리를 비웠습니다. 진정 주님은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십니다.

마틴의 주님을 섬기는 열정이 그토록 강렬하자 마귀는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진리의 원수들은 마틴을 살해할 암살단원들을 고용했습니다. 그들은 그의 집에 은밀히 들어 왔고 그를 막 죽이려고 하던 순간 마틴이 일어나 꽂꽂이 서서 그의 목을 칼에 갖다 대었습니다. 그들이 앞으로 뛰려고 하자, 하나님의 권능이 갑자기 그들을 방 여기 저기로 밀어 던졌습니다. 그 거룩하고 두려운 분위기에 너무도 놀란 그들은 손발로 기어다니며 마틴을 죽이려고 한 것을 용서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흔히 주님이 두드러지게 사용하시게 되면 사람들은 교만으로 치켜올려집니다. 그러나 마틴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항상 겸손한 하나님의 종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어느 날 밤 마틴이 설교단으로 가려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어떤 거지가 그의 서재에 오더니 옷을 좀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마틴은 그 거지더러 집사장에게 가보라고 했습니다. 교만한 집사는 그에게 나가라고 명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다시 마틴을 찾아왔습니다. 마틴은 일어나서 거지에게 자기가 입고 있던 좋은 옷을 주고 집사더러 덜 좋은 다른 옷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날 밤 마틴이 말씀을 전할 때,(Eng.p. 161) 하나님의 양떼는 그의 몸 주위에 부드럽고 흰 빛이 감싸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정말로 이 사람은 위대한 사람이요 그 시대에 보냄을 받은 진짜 사자였습니다. 결코 다른 것은 하나도 바라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만을 바라던 그는 아주 헌신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마틴은 먼저 기도하고 성령에 의해 하늘로부터 보내져 내려온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알아 전할 수 있을 정도로 영적인 상태에 놓이게 될 때까지는 결코 설교하라는 권유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종종 마틴은 충만한 확신을 위해 기도하는 동안 사람들을 기다리게 하곤 했습니다.

마틴과 그의 권능의 사역에 관해 좀 알아본 것은 사람들로 성도들에 대한 박해가 약화되었다고 생각하게 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았습니다. 성도들은 악한 자를 도구로 삼은 마귀에게 여전히 멸망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무에 묶여 화장당했습니다. 엎드려 통나무에 못박혔고 들개들이 풀려나와 그들의 살과 내장들을 물어뜯어 희생자들은 무시무시한 고초를 당하며 죽어갔습니다. 태아들은 임신 중인 어머니에게서 찢겨 나와 돼지에게 던져졌습니다. 여자들의 가슴은 잘려졌고 그들의 심장 맥박이 피를 쏟아내는 동안 똑바로 서 있도록 강요당했고, 마침내는 쓰러져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이교도만의 행위가 아니라 많은 경우에 있어 말씀을 대변해 일어서고 성령에 복종하여 일어선 이들 충성스런 십자가의 군병들을 제거함으로써 하나님께 은혜를 베푼다고 느꼈던 자칭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야기된 것이었으므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훨씬 큰 비극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6:2,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마태복음 24:9,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이적과 기사와 성령의 권능에 의하여, 마틴은 정말로 그 시대에 보냄을 받은 사자로 입증되었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사역을 은사로 받았을 뿐 아니라, 그 자신도 영원히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했습니다. 그는 조직에 대항했습니다. 그는 고위직 가운데 있던 죄에 저항했습니다. 그는 말과 행동에서 진리를 옹호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승리로 가득찬 삶을 살았습니다.

한 전기 작가는 마틴에 대하여 이렇게 썼습니다. "그가 화를 내거나 불안해 하거나 슬퍼하거나 웃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항상 한 가지 모습을 하고 있었고 인간성을 초월한 것처럼 보였고, 그의 표정엔 천상의 기쁨 같은 게 번져 있었다. 그의 입술에선 그리스도 말고는 다른 어떤 것도 결코 입에 올려지지 않았고, 그의 마음 속엔 경건과 평화와 동정심 말고는 결코 다른 어떤 것도 없었다. 종종 그는 심지어 자기를 비난하는 자들의 죄때문에 울었다. 그런데 그 비난자들은 마틴이 조용하고 마음이 다른 데 가 있을 때 독사 같은 입술과 독이 가득한 혀로 마틴을 공격했다.(Eng.p. 162) 많은 이들은 그들 자신은 소유하지 못했고 흉내낼 수도 없었던 덕성들 때문에 마틴을 미워했는데, 슬프게도 그를 가장 심하게 공격했던 사람들은 주교(감독)들이었다."


인 사 말


계시록 2:12하, "좌우에 날선 예리한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세째 교회 시대에 주어진 메시지가 나올 참입니다. "그의 교회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에 대한 이 개봉된 드라마의 세번째 장면이 막 계시될려고 합니다. 나팔 같은 음성으로 성령은 그 비할데 없으신 분, "좌우에 날선 예리한 검을 가지신 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조롱의 표시로 자색 옷이 입혀진, 얻어맞고 가시관을 쓰셨던 하나님의 어린 양을  "너희의 왕을 보라!"하면서 소개했을 때와 이 소개는 얼마나 크게 다릅니까. 이제 왕복을 입으시고 영광으로 관을 쓰시고서 `하나님의 권능이신 그리스도' 주님이 서 계십니다.

`좌우에 날선 예리한 검을 가지신 이'라는 말에는 신성에 대한 또다른 계시가 있습니다. 에베소 시대에, 기억을 더듬어 보시면, 그는 불변하는 하나님으로 나타나 있었습니다. 서머나 시대에서 우리는 한 분이신 참된 하나님으로서 그를 보았고 그분 외에는 다른 신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버가모 시대에서는 그의 신성에 대한 더 나아간 계시가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인 좌우에 날선 예리한 검과 연관이 있음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에베소서 6:17,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계시록 19:13, 15상,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요한복음 1: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 동일한 (말씀)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한 1서 5:7, "하늘에서 증거하는 이가 셋 있으니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이라 이 셋은 하나니라."

여기서 우리는 그가 말씀과 연관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말씀입니다. 말씀이 바로 그분입니다. 그의 이름 안에 있는 말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고 말하고 있는 요한복음 1:1에서(Eng.p. 163) `말씀'이라고 번역된 말의 어원은 `로고스(logos)'인데 그것은 `생각 또는 개념'을 뜻하는 말입니다. 로고스는 `생각'과 `말'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그런데 `표현된 생각'은 `말 또는 말들'입니다. 그건 놀랍고도 아름답지 않습니까? 요한은 하나님의 생각이 예수 안에 표현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도 히브리서 1:1-3에서 아주 똑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로고스)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람 안에 표현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표현된 형상이었습니다. 요한복음1:14에서 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실상이 육신이 되어 우리들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아무도 가까이 할 수 없었고 아무도 본 적도 없으며 볼 수도 없었던 위대한 영인 하나님이 이제 육신의 장막을 쓰시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충만함을 표현하면서 사람들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자가 나타내셨느니라." 때때로 자신의 임재를 구름이나 불기둥으로 표명해 사람들의 마음에 두려움을 갖게 하시던 하나님, 그의 중심의 속성들이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의 계시로써만 알려졌던 하나님이 이제는 자신을 나타내시는 임마누엘(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나타낸다(declare)는 말은 우리가 종종 주석(exegesis)이라고 번역하는 헬라어 어원에서 온 말로 철저하게 설명하여 분명히 밝힌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살아계신 말씀인 예수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그는 하나님이셨으므로 우리들에게 하나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그는 요한이 요한 1서 1:1-3에서 그에 관하여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하고 명확하게 우리에게 하나님을 나타내셨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로고스는 말을 뜻합니다.)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게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Eng.p. 164) 우리의 하나님께서 진실로 나타내졌을 때, 그는 육신 안에 표명되었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그런데 우리는 아까 히브리서 1:1-3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표현된 형상이었음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사람 안에 있는 자신을 사람에게 표현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이 절들에서 특히 1절과 2절에서 주목해야 할 게 또 있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그런데 여러분의 성경에 주석을 보면 정정해 놓은 게 보이실 겁니다. `로(by)'라는 말은 올바른 번역이 아닙니다. `로'는 `안에(in)'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러면 올바르게 됩니다. "옛적에 말씀으로 선지자들 안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사무엘상 3:21하,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니." 이 말씀은 요한 1서 5:7을 완벽하게 "성령과 말씀은 하나"임을 증명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나타내셨습니다. 말씀은 아버지를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살아있는 말씀이셨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오늘도 그는 여전히 그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그는,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요한복음 14:10. 아들 안에 계신 하나님의 완벽한 표명은 말씀과 행위로 표명하시는 내주하는 성령에 의한 것이었음이 여기서 가장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지금까지 쭉 가르쳐오고 있는 것입니다. 신부가 말씀 신부의 상태로 돌아가게 될 때, 신부는 예수님이 행했던 일들을 그대로 생산할 것입니다. 말씀은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십니다. 그것들은 모두가 하나입니다. 서로 떨어져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질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선지자들에게 일어났던 일입니다. 선지자들은 내주하는 하나님의 영을 가지고 있었고 말씀이 그들에게로 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에게 일어났던 일입니다. 예수님 안에는 측량할 수 없는 성령이 있었고 말씀이 그에게 왔습니다.(예수님은 행하시면서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셨습니다. 내 교리는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것이니라. 사도행전 1:1, 요한복음 7:16.)

이제 생각해 보십시오, 침례 요한은 선지자인 동시에 그의 시대의 사자였습니다. 요한은 어머니의 뱃 속에서 이미 성령으로 충만되어 있었습니다. 그가 요단 강에서 침례를 베풀고 있었을 때, 하나님의 말씀(예수)이 그에게 왔습니다. 말씀은 언제나 진정으로 성령 충만된 자들에게 옵니다. 그것이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에 대한 증거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Eng.p. 165) 그가 또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우리는 진리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한복음 17:17하. 또 요한복음 8:43을 보면,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예수님께서 세상은 성령을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신 걸 보셨습니까? 제가 방금 읽은 이 절에서 보면, 그들은 말씀을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왜죠? 성령과 말씀은 하나이기 때문이며, 만약 여러분이 선지자들처럼 성령을 가지고 있다면 말씀이 여러분에게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요한복음 14:26을 보면,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여기서 또다시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 때문에 말씀이 오는 것을 찾았습니다. 또 요한복음 16:13을 보면, "그러하나 진리(말씀)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니이다)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하나님의 말씀)을 말하시며 (말씀)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예언의 말씀을 가져오는 영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침례 받는 것의 증거가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나 방언 통역하는 것이나 예언하는 것이나 소리지르고 춤추는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았음을 여러분 아주 주의깊게 보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그 증거는 여러분이 진리 안에 있는 것이라고 즉 여러분 시대에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증거는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과 상관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4:37에서,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자 그걸 보십시오. 내주하는 성령의 증명은 하나님의 선지자가 교회의 질서를 세우면서 그의 시대에 준 말씀을 인정하고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또다른 계시를 주장했던 자들에게 이렇게 말해야만 했습니다, (36절)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성령으로 충만한 그리스도인 신자냐 아니냐하는 증거는 진리(말씀)를 생산해내는 것이 아니라 진리(말씀)을 영접하는 것이고 믿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계시록 22:17을 보셨습니까,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보십시오, 신부는 성령이 말씀하신 말과 똑같은 말을 말합니다. 신부는 자기가 성령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는 말씀 신부입니다. 각각의 교회 시대에서 우리는 이 말을 듣습니다. "귀 있는 자는(Eng.p. 166)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성령이 말씀을 줍니다. 여러분이 성령을 가지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그들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각자 자기 시대의 말씀을 받았던 것처럼 여러분들도 여러분 시대에 주어진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그 마지막 생각을 이해하셨습니까? 반복하겠습니다, 각 교회 시대는 똑같은 권고로 끝납니다. "귀 있는 자는(개인)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지어다." 성령은 말씀을 줍니다. 성령은 각 시대를 위한 진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각 시대마다 선택된 자들이 있어 왔고 그 택함받은 무리는 항상 `말씀을 들었고' 말씀을 받아들여 그들 안에 씨를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였습니다. 요한복음 8:47,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그들은 말씀(예수)과 그들의 시대를 위한 그의 말씀들을 거절하였습니다. 하지만 참된 씨는 하나님에게 속하였으므로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네 모든 자녀는 하나님(성령)의 교리를 받을 것이며," 이사야 54:13. 예수님은 요한복음 6:45에서 똑같은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말씀과 하나됨은 여러분들이 하나님에게 속하였는지와 성령으로 충만한 자인지의 여부를 증명합니다. 다른 기준은 없습니다.

그러면 방언과 통역과 다른 은사들은 무엇입니까? 그것들은 표명들입니다. 그것은 말씀이 가르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7을 읽어보십시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표명)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 다음에 바울은 그들 표명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 좋은 질문이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 모두가 이 질문을 물어보고 싶어하는 걸 압니다. 진정으로 성령 충만되지 않으면 정말로 성령을 표명할 수가 없는데 왜 그 표명이 성령 침례의 증거가 아닌가? 이제 저는 옳은 것을 말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전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거나 그들의 교리를 거스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가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뜻을 전하지 않는다면 전 하나님의 참된 종이 아닐 것입니다. 맞지 않습니까? 잠시동안 발람에 대해 알아 봅시다. 그는 종교적이었고 하나님을 경배했습니다. 그는 제물을 올바르게 드리는 것과 하나님께 다가가는 올바른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참된 씨 선지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불의의 삯을 취했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음행과 우상 숭배의 죄 가운데로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가 감히 하나님의 영이 세상이 지금껏 본 중에서 절대적으로 정확한 예언의 제일 아름다운 부분 중 하나에서 그를 통해 표명했음을 부인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절대로 성령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또, 여러분은 대제사장 가야바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성경은 그가 주님이 죽어야만하는 죽음의 종류에 대해 예언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가야바가 친애하는 늙은 시므온이나 그 다정한 안나라 하는 성도처럼 성령 충만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라고 기록된 것이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Eng.p. 167) 그러나 가야바는 성령의 진짜 표명을 가졌습니다. 우린 그걸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증거로서의 표명이 어디에 있습니까? 거기엔 없습니다. 여러분이 진실로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되어 있다면,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삶 속에서 말씀의 증거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게 주신 계시로 말미암아 제가 얼마나 깊이 이 진리를 느끼고 이해하는지 여러분에게 보여드리죠. 그런데 말씀드리기 전에, 전 이 말을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 중 많은 분들이 절 선지자라고 믿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선지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하나님이 저에게 주시는 환상들은 결코 틀리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단 한 번도. 만약 누가 환상이 한 번이라도 어긋난 적이 있었음을 증명할 수 있다면 저는 그것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절 이만큼이나 따라왔으니, 제 얘기를 해 드리겠습니다.

여러 해 전에 처음 오순절교 사람들을 만났을 때, 저는 그들의 캠프 모임 중 하나에 참가했었는데 거기에는 방언과 방언 통역과 예언의 많은 표명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두 명의 설교자들이 다른 형제들 중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말하며 열중해 있었습니다. 저는 완전히 그 예배에 빠져들었고 정말로 다양한 표명들에 관해 흥미를 느꼈습니다. 그들은 생생한 소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이들 은사들에 대해 모든 걸 배우고자 하는게 간절한 소원이었기 때문에 저는 그 두 사람들에게 그것들에 관해서 말해 보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제 속에 거하는 하나님의 은사를 통해 저는 첫번째 사람 안에 있는 영을 알아보려고 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인지 아닌지. 그 다정하고 겸손한 형제와 짧게 대화해보고나서 저는 그가 진짜, 독실한 그리스도인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진짜였습니다. 다음 젊은 남자는 첫번째 남자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는 자랑을 늘어놓았고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얘기를 하는 동안 환상이 하나 제 눈 앞을 스쳐갔는데 그가 금발의 여성과 결혼했는데 밤색 머리의 여자와 동거하며 두 자녀를 가진 것을 보았습니다. 위선자가 있다면, 그가 바로 위선자였습니다.

자 말씀드리죠,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찌 안 놀랄 수 있었겠습니까? 여기 두 남자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진짜 신자였고 다른 한 사람은 죄많은 모방자였습니다. 하지만 둘 다 성령의 은사를 표명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혼돈으로 괴로왔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해답을 달라고 간구하려고 그 모임을 떠났습니다. 저는 혼자 비밀 장소로 가서 성경책을 옆에 두고 기도하며 해답을 위해 하나님을 기다렸습니다. 어떤 구절의 성경을 읽을 줄 몰라 저는 무심코 성경을 열어 마태복음에 있는 어떤 곳을 보았습니다. 저는 잠시 동안 읽다가 성경을 내려놓았습니다. 잠시 후 바람이 방 안으로 들어와 성경의 페이지를 히브리서 6장으로 넘겼습니다. 저는 6장을 읽어내려가다가(Eng.p. 168) 히브리서 6:4-9의 그 이상한 절에서 특별히 감명을 받았습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저는 성경을 덮고 내려놓고 잠시 동안 묵상하다가 좀 더 기도를 했습니다. 저는 여전히 해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저는 아무런 뜻없이 다시 성경을 열었지만 읽지는 않았습니다. 갑자기 바람이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와 또 한 번 페이지를 히브리서 6장으로 넘기고 바람이 그치자 거기에 그대로 펴져 있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었습니다. 제가 그 말씀을 읽자 그 때 하나님의 성령이 방 안으로 들어와 저는 환상을 하나 보았습니다. 환상 가운데서 순백의 흰 옷을 입은 한 사람을 보았는데 그는 막 갈아 엎은 밭으로 가서 알곡을 심었습니다. 맑은 날씨였고 아침에 씨가 심겼습니다. 그러나 밤 늦게 흰 옷 입은 사람이 가고난 뒤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와서 몰래 흰 옷 입은 사람이 심은 사이 사이에 씨를 더 심었습니다. 여러 날이 지나갔습니다. 해와 비가 그 땅을 축복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알곡이 나왔습니다. 그 알곡은 아주 보기 좋았습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난 후 가라지가 나왔습니다.

밀과 가라지는 함께 자랐습니다. 그들은 똑같은 땅에서 똑같은 자양분을 섭취했습니다. 그들은 똑같은 해와 비를 마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은 놋빛이 되고 식물들은 모두 축 쳐져 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밀이 고개를 들고 하나님께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가라지도 목소리를 높여 비를 내려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자 하늘이 어두워지고 비가 왔습니다. 그러자 다시 밀이, 이제는 힘이 넘쳐 목소리를 높여 "주여 찬양합니다"하고 경배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저는 소생한 가라지도 고개를 들고 "할렐루야"하고 말하는 걸 들었습니다.

그때 저는 그 캠프 모임과 그 환상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씨 뿌리는 자와 씨의 비유, 히브리서 6장이(Eng.p. 169), 혼합된 청중 가운데서 영적인 은사의 분명한 표명들--모든 것이 놀랍게도 확실해졌습니다. 흰 옷을 입은 씨 뿌리는 자는 주님이었고 검은 옷을 입은 씨뿌리는 자는 마귀였습니다. 세상은 밭이었습니다. 씨들은 사람들이었는데, 선택된 자와 버리운 자들입니다. 둘 다 똑같은 자양분과 물과 해를 섭취했습니다. 둘 다 기도를 올렸습니다. 둘 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선한 자와 악한 자들 모두 위에 해와 비를 내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 둘이 똑같은 축복을 받았고 둘 다 똑같이 놀라운 표명들을 가졌다고 해도 여전히 하나의 커다란 차이가 있었는데 그들은 다른 씨에 속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도 마태복음 7:21-23에 대한 해답이 있었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예언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예수님은 그들이 오직 성령만이 사람을 통하여 성취할 수 있는 권능을 행했음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시 타락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악하고 거듭나지 않은 배교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사탄의 씨였습니다.

바로 그 점입니다. 여러분들은 그 표명이 성령으로 태어나고,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의 증거라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절대로. 저는 진짜 표명은 성령이 큰 역사를 행하시는 증거임을 인정하지만 그것이 개인이 성령으로 충만해 있는 증거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많은 표명들을 행한다고 해도 말입니다. 오늘날 성령을 받은 증거는 저 옛날 우리 주님의 시대에 증거로 삼았던 것과 꼭같습니다. 그 증거는 여러분이 현재 살고 있는 시대에 주어진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말씀에 대해서는 강조하셨지만, 이적에 대해서는 결코 중요하게  강조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말씀을 받기만 한다면 이적들은 자연히 따를 것을 아시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성경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요한이 밧모섬에서 환상을 본 후 이백 년이나 지난 버가모 시대에 사람들이 말씀으로부터 굉장히 멀리 표류해 나갈 것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표류는 그들로 암흑 시대로 들어가게 하리라는 것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인간이 태초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방법은 먼저 말씀을 떠나는 것이었음을 아셨습니다.(Eng.p. 170) 만약 여러분이 그 말씀을 떠나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버가모에 있는 교회에게 그리고 사실은 모든 시대의 모든 교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나는 말씀이다. 너희 가운데 신성이 거하길 원한다면 말씀을 환영하며 영접하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말씀)은 나에 대한 계시니라. 나는 말씀이다. 그 사실을 명심하라!"

전 우리가 우리들 가운데서 말씀으로 충분히 감명을 받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자 제가 여러분들에게 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합니까?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렇죠? 모든 기도는 그분의 이름으로 드리며 그렇지 않으면 응답은 없습니다. 하지만 요한 1서 5:14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을 줄을 또한 아느니라."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하고 묻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엔 오로지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것입니다. 예레미아 애가 3:37, "주의 명령이 아니면 누가 능히 말하며 이루게 하랴?" 그렇습니다. 만약 그것이 말씀 가운데 없다면 여러분은 그것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이 말씀 가운데 없다면 구할 수 없고,  그분의 이름으로가 아니면 간구할 수도 없습니다. 다시 나오는 군요. 예수(이름)는 말씀(뜻)입니다. 하나님과 말씀은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인쇄된 페이지 위에 남겨 두고 가신 이 말씀은 여러분이 그것을 믿음으로 성령 충만된 삶 속으로 받아들일 때 그분의 일부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말씀은 생명이라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63하. 그러나 그것은 바로 그분입니다. 요한복음 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로마서 8:9하,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렇습니다, 그는 영이고 생명입니다. 그게 바로 말씀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입니다. 그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태어나고 성령으로 충만한, 믿음 가운데 있는 사람은 그 말씀을 마음 속에 받아들이고 그것을 입술에 올려 놓는데 그것은 신성이 말씀하실 때와 똑같게 되는 것입니다. 장애가 되는 모든 산들은 없어져야 하고 사탄은 그 사람 앞에서는 설 수가 없게 됩니다.

만약 저 옛날 세째 시대의 교회가 그들 가운데 있는 살아 있는 말씀의 계시에 붙어 있기만 했더라면, 그 암흑 시대에 하나님의 권능은 사라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오늘날, 교회가 믿음 안에서 말씀으로 돌아온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다시 교회 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의심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밤 저는 주님을 찾고 있었는데 성령이 제게 펜을 들어 쓰라고 말씀하셨습니다.(Eng.p. 171) 쓰려고 펜을 쥐자, 성령이 교회를 위한 메시지를 제게 주셨습니다. 저는 그것을 여러분들에게 알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말씀과 신부와 관계 있는 메시지입니다.

"내가 너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다. 재생산의 법칙은 각 종(種)은 각기 자기의 종류대로 낳는다는 것이다. 창세기 1:11에 나오듯이,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씨 안에 있는 생명은 줄기로 들어가 다음엔 열매를 맺었다. 그 동일한 법칙은 오늘날 교회에도 적용된다. 교회를 시작했던 씨는 나와서 처음의 씨와 같이 되는데 그것은 같은 씨이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날에도 진짜 신부 교회(그리스도의 씨)는 머릿돌에 이를 것이고 신부가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감에 따라 신부 교회는 수퍼(초) 교회, 수퍼(우수) 민족이 될 것이다. 신부 대열에 든 그들은 너무나도 그리스도와 닮아 그와 똑같은 모습이 될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연합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와 신부는 하나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와 신부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표명할 것이다. 교파들은 이것을 생산해낼 수 없다(잘못된 씨이므로). 교파들은 자신의 신조와 말씀과 섞인 독단적 교리들을 만들어낼 것이다. 이런 혼합 행위는 잡종품을 만들어낸다.

첫째 아들(아담)은 하나님의 말해진 씨이자 말씀이었다. 그는 자신을 재생산하려고 신부를 받았다. 신부가 그에게 주어진 이유는 그를 재생산하기 위함인데 하나님의 아들을 또 만들어 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타락했다. 그녀는 혼합 행위로 말미암아 타락했다. 그래서 그를 죽게 만들었다.

둘째 아들(예수)은 역시 하나님의 말해진 씨이자 말씀이었는데 아담처럼 신부를 받았다. 그러나 예수가 그녀와 결혼하기 전에, 그녀도 타락하고 말았다. 아담의 아내처럼 그녀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 살 것인지 아니면 말씀을 의심하여 죽을 것인지 시험을 받았다. 그녀는 의심했다. 그녀는 말씀을 떠났다. 그녀는 죽었다.

말씀의 참된 씨의 적은 무리로부터 하나님은 사랑하는 신부를 그리스도에게 주실 것이다. 그녀는 그의 말씀에 있어 처녀이다. 그녀는 사람이 만든 신조나 독단을 전혀 모르므로 처녀이다. 신부의 일원들을 인하여 또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그 처녀 안에 표명되리라 약속하신 모든 것이 이루어지리라.

약속의 말씀이 처녀 마리아에게 왔었다. 하지만 그 약속의 말씀은 표명되기 위한 하나님 자신이었다. 하나님은 표명되어졌다. 그 당시에 하나님은 직접 행했고 처녀 안에 자기 자신의 약속의 말씀을 이루셨다. 마리아에게 그 메시지를 가져온 것은 한 천사였다.(Eng.p. 172) 하지만 그 천사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이사야 9:6. 그는 마리아가 말씀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때 그에 관해 쓰여졌던 것을 다 이루셨다.

처녀 신부의 구성원(지체)들은 그를 사랑할 것이고 그들은 그의 잠재성을 가질 것이다. 그는 그들의 머리이고 모든 권능은 그에게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 몸의 지체들이 머리에 복종하듯이 그분에게 복종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조화를 잘 보라. 예수는 아버지가 그에게 먼저 보여 주시기 전에는 결코 아무 일도 하시지 않았다. 요한복음 5:19. 이 조화는 이제 신랑과 그의 신부 사이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는 그녀에게 그의 생명의 말씀을 보여주고 그녀는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녀는 결코 그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그녀에게 해를 입히지 못한다, 죽음조차도. 씨가 심겨지면 물이 그것을 다시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것의 비밀이 여기 있다. 말씀이 신부(마리아 속에 있었던 것처럼) 안에 있다. 신부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그녀는 그리스도가 말씀을 가지고 무엇을 행하기를 원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의 이름으로 말씀의 명령을 수행하는데 그녀는 "주께서 가라사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나면 말씀은 성령에 의해 소생되어 이루어지게 된다. 심겨져 물을 받은 씨처럼, 그것은 그 목적을 달성하면서 완전한 추수에 이르게 된다.

신부의 대열에 든 그들은 그의 뜻만을 행한다. 아무도 그들을 말리지 못한다. 그들은 `주께서 가라사대'를 가지든지 아니면 가만히 있는다. 그들은 그들이 행하며 그분 자신의 말씀을 이루는데는 하나님이 꼭 필요함을 알고 있다. 그는 그가 이 땅에서 사역을 하실 때 그의 일을 다 마치지 아니하였으므로 이제 신부 안에서 신부를 통해서 일하고 계신다. 신부는 그 사실을 아는데 여지껏 그가 지금 행해야 하는 특정한 일들을 하실 때가 아니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이 특정한 때를 위해 남겨 두셨던 그 일을 신부를 통해 이루실 것이다.

이제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일어나라. 우리의 약속의 땅이 눈 앞에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여호와 구세주"란 뜻이고 그는 바울이 첫 지도자로서 왔듯이 교회에 올 마지막 시대의 지도자를 나타낸다. 갈렙은 여호수아 편에 서 있었던 사람들을 나타낸다. 기억해라, 하나님은 처녀 이스라엘을 그의 말씀으로 시작했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뭔가 다른 걸 원했다. 마지막 시대의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의 정하신 때가 오기 전에는 이스라엘을 움직이지 않으셨던가 또는 그들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지 않으셨던가를 잘 보아라. 그런데 그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압력을 가하며, "그 땅은 우리 것이니 가서 취합시다. 여호수아, 당신은 이제 끝장입니다. 당신은 틀림없이 당신의 사명을 잃어버렸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가지고 있었던 권능이 이젠 없어요. 당신은 하나님으로부터 듣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 즉시 행하곤 했었는데.(Eng.p. 173) 그런데 지금 당신에게 뭔가 이상이 생겼어요."하고 말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였고 하나님의 약속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 약속들을 기다렸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이 주시는 명쾌한 결정을 기다렸고 움직일 때가 되자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의 손에 완전한 지도권을 주셨는데 여호수아가 말씀과 함께 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신임할 수 있었지만 다른 이들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일은 이 마지막 날에도 반복될 것이다. 똑같은 문제, 똑같은 압력들이.

모세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보자. 이 능한 기름 부음을 받은 하나님의 선지자는 특이하게 출생했는데 그는 애굽으로부터 아브라함의 씨를 구원하기 위한 적시(適時)에 태어났다. 모세는 애굽에서 머물며 제사장들과 성경 구절을 두고 논쟁을 벌이거나 싸움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백성들이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될 때까지 광야에 가 있었다. 하나님께선 모세를 광야로 부르셨다. 그 기다림은 모세 쪽이 아니라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던 백성들때문이었다. 모세는 백성들이 이해하리라 생각했지만 그들은 깨닫지 못했다.

다음에 주의 말씀이 임했던 엘리야가 있다. 그가 진리를 다 전하고 미국 이세벨의 선구자인 옛날의 그 무리들이 말씀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자, 하나님께선 엘리야를 불러내시고 선지자와 하나님이 주셨던 메시지를 거부한 그 세대에 재앙을 내리셨다. 하나님께선 그를 광야로 불러냈고 엘리야는 왕이 부르는데도 나오지 않았다. 그에게 나가자고 설득하려던 자들은 죽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선 그의 충성스런 선지자에게 환상으로 말씀하셨다. 그러자 숨어있던 그는 나와서 이스라엘에게 다시 말씀을 가져왔다.

그 다음엔 그리스도의 충성스런 선구자요 그 당시 능한 선지자였던 침례자 요한이 있다. 요한은 아버지가 다니던 학교엘 가지 않았고 바리새인들의 학교에도 가지 않았다. 그는 어떤 교파에로도 가지 않고 하나님이 불러낸 광야로 나갔다. 거기서 요한은 주님께서 `메시야(구세주)가 가까왔다'고 외치면서 그에게 그 메시지를 가지고 내보낼 때까지 머물렀다.

이제 성경적인 경고를 한 번 보기로 하자. 고라가 일어나 그 능한 선지자를 대적했던 때는 하나님이 입증해 주셨던 모세의 때가 아니었더냐? 고라는 모세를 논박하며 자기도 백성들을 이끌 만큼 하나님으로부터 많이 받았으며 다른 이들도 모세처럼 신성한 계시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고라는 모세의 권위를 부인했다. 자 그 당시 백성들은 참 말씀을 듣고 참된 선지자는 하나님에게 입증을 받는다는 사실을 익히 알면서도 내가 말하건데 그 백성들은 고라와 그의 반박에 편승했다. 고라는 성경적인 선지자가 아니었지만 다수의 백성들은 그들의 지도자와 함께(Eng.p. 174) 고라 편에 섰다. 오늘날 고라의 경우처럼 금송아지 음모를 가진 전도자들과 얼마나 흡사하냐! 고라가 백성들에게 좋게 보였듯이 그들도 사람들에게 좋게 보인다. 그들은 이마에 피를 손엔 기름을 강대상엔 불덩이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여자 목사를 인정하며 여자들이 머리를 자르고 바지와 짧은 옷을 입게 놔두고 그들의 신조와 독단적 교리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피해 간다. 그것은 그들 안에 어떤 종류의 씨가 있는지 보여 준다. 그러나 백성 전체가 모세에게 등을 돌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건 아니었다. 아니다. 택함을 받은 자들은 모세와 함께 했다. 똑같은 일이 오늘날에도 다시 벌어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떠나고 있지만 일부 사람들은 말씀에 머무르고 있다. 그러나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기억해라. 가라지는 불살라지기 위해 묶여져야 했다. 이 배역한 교회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불에 태워질 준비로 함께 더욱 더 가까이 묶여지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밀은 주인에게로 한데 모아질 것이다.

이제 나는 네가 여기서 아주 주의깊게 이것을 보기를 원한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말라기 4장이 이루어지리라고 약속하셨다. 그렇게 되어야 하는 그 말씀은 선지자 말라기에 의해 말해진 성령이 소생시키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그것에 대해 언급하셨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두번째 오시기 직전이다. 예수님께서 오실 때 쯤엔 성경 모두가 성취되어져야 한다. 말라기의 그 사자가 올 때 이방인의 경륜은 그 마지막 교회 시대에 있을 것이다. 그 사자는 꼭 말씀과 함께 할 것이다. 그는 창세기로부터 계시록에 이르도록 성경 전체를 다룰 것이다. 그는 뱀의 씨에서 시작해서 늦은 비에 있을 사자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교파들은 그를 거부할 것이다.

그가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은 아합의 때부터 역사는 계속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합의 통치 하에 있던 이스라엘의 역사는 말라기의 선지자가 나타나는 곳인 미국 바로 여기에서 재현되고 있다. 이스라엘이 자유로이 경배하고자 애굽을 떠나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다윗과 여러 왕들과 같은 위대한 지도자와 나라를 세우고 그다음엔 뒤에서 지시하는 이세벨을 아내로 둔 아합을 왕위에 올린 것처럼 미국도 똑같이 행했다. 우리 조상들은 자유로이 경배하며 살고자 이 땅을 찾아 떠났다. 그들은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했다. 워싱턴과 링컨 같은 유능한 자들이 세워졌지만 잠시 후엔 그들에겐 뒤떨어진 사람들이 이 적합한 사람들의 자리를 계승했고 곧이어 뒤에서 조종하는 이세벨 같은 여자를 아내로 둔 아합 같은 자가 대통령석에 앉혀졌다. 그런데 말라기의 그 사자가 와야할 때는 바로 이와같은 때이다. 그리고나서 늦은 비가 내릴 때 갈멜산의 판가름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말씀 가운데 있는지 보려면 자세히 지켜 보아라. 요한은 말라기 3 장에 나오는 선구자였다. 그는 이른 비를 심었고(Eng.p. 175) 그의 시대의 조직들에게 거부당했다. 예수님은 오셔서 변화산 판가름을 보이셨다. 그리스도의 두번째 선구자는 늦은 비를 위해서 심을 것이다. 예수님은 교파들과 신조들 사이에서 판가름이 될 것인데 그의 말씀을 지지하고 그의 신부를 휴거로 데려가려고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첫번째 판가름은 갈멜산이었고 둘째 판가름은 변화산이었고 세번째 판가름은 시온산일 것이다.

모세와 엘리야와 요한이 사람들로부터 격리하여 은둔하고 있던 이상한 행동은 많은 사람들을 혼돈케 하였다. 그들은 그것이 그들의 메시지가 거절당했기 때문이었음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씨는 뿌려졌고, 파종은 끝났다. 심판이 다음 차례이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한 표징으로서의 그들의 임무를 마쳤다, 그래서 심판이 다음에 있었다.

계시록 13:16에 의하면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으려면 짐승이 손이나 이마에 표를 요구하기 때문에 신부는 말씀 전파를 멈춰야만 할 것이다. 교파들은 그 표를 받을 것이다, 받지 않으면 말씀 전파를 못하게 된다. 그 다음에 어린 양이 그의 신부를 데리러 오고 그 큰 음녀를 심판하게 된다.

그런데 모세가 어떤 특정한 일을 위해서 태어났지만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가능하게 해 주는 은사를 받기 전에는 모세는 그 일을 할 수 없었음을 기억해라. 모세는 광야에 가서 거기서 기다려야만 했다. 하나님께서 때를 정해두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를 되돌려 보내기 이전에 어떤 특정한 바로가 왕이 되어 있어야 했고, 백성들은 생명의 떡을 위해 부르짖어야만 했다. 이것은 우리의 시대에도 적용된다.

그러나 우리가 이 우리 시대에 무엇이 있는가? 무리들이 이적들을 행하고 있어 지금은 말씀 또는 하나님의 성령의 진정한 감동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것이 없든가 아예 모르면서도 이적만 구하는 세대가 우리 시대이다. 그들이 피와 기름과 불을 보면 기뻐한다. 말씀 가운데 무엇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어떠한 이적이든지 심지어 비성경적인 것까지도 신봉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에 대해서 우리에게 경고하셨다. 그는 마태복음 24장에서 마지막 때에는 두 가지 영이 너무도 흡사해서 오로지 택함을 받은 자만이 속임을 받지 않을 것이므로 그 두 영을 구별할 수 있으리라고 말했다.

네가 어떻게 영들을 구별할 수 있느냐? 말씀으로 시험해 보기만 하면 된다. 그들이 그 말씀을 말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악한 자에게서 난 자들이다. 악한 자가 첫번째 두 신부들을 속였듯이, 그는 이 마지막 시대의 신부를 신조를 통해 혼합시키거나 단순히 말씀을 벗어나 신부에게 적합한 어떤 이적을 따르게 함으로써 속이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말씀보다 이적들을 위에 두시지 않았다.(Eng.p. 176) 이적들이 말씀을 따르게 되어 있다. 엘리야가 그 여인에게 그를 위하여 먼저 떡을 구으라고 주의 말씀에 따라 말했던 것처럼. 그녀가 말씀이 말한대로 했을 때, 적절한 이적이 일어났다. 말씀으로 먼저 오라 그리고나서 기적을 지켜보라. 씨인 말씀은 성령에 의하여 에너지를 받는다.

어떻게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가 말씀의 일부만 믿고 일부를 거부할 수 있겠느냐? 이 마지막 날의 하나님의 진정한 선지자는 말씀 전체를 선포할 것이다. 그런데 교파들은 그 선지자를 싫어할 것이다. 그들을 독사들이라 일컬었던 침례 요한처럼 그의 말들은 거센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정된 자들은 들을 것이며 휴거에 준비할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같은 믿음을 가진 아브라함의 왕가의 씨는 그와 함께 말씀을 꼭 붙들을 것이다, 그들은 함께 예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마지막 날의 사자는 하나님이 지정하신 때에 나타날 것이다. 모든 사람이 알고 있듯이 지금은 마지막 때이다. 이스라엘이 고국에 돌아와 있기 때문이다. 말라기에 의하면 그는 이제 금세라도 올 것이다. 우리가 그를 보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한 자일 것이다. 그는 지적될텐데(말씀 안에서 지적된다, 계시록 10:7) 하나님은 그의 사역을 입증하실 것이다. 그는 엘리야가 그랬듯이 진리를 전할 것이고 시온산 판가름에 준비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이해하지 못할텐데 그들은 진리라고 여기는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성경을 배워왔기 때문이다. 그가 와서 그것을 반대할 때,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진실한 목사들조차도 그 사자를 이해하지 못할텐데 너무도 많은 것이 속이는 자에 의해 하나님의 진리라고 칭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선지자는 와서 초림의 선구자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고 외쳤던 것처럼, 그도 의심할 여지없이, "영광가운데 오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고 외칠 것이다. 그는 이 일을 할 것이다, 요한이 택함받은 자들에게 진리의 사자였던 것처럼. 이 자도 택함받은 자들과 말씀으로 거듭난 신부들에게 마지막 사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칭찬하시다


계시록 2:13, "내가 네 행위를 알고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순교자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내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내가 네 행위를 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백성들에 관련된 일곱 사자들 각자에게 말씀하신 동일한 말입니다.(Eng.p. 177) 이 말은 두 포도나무(참과 거짓)에게 말했기 때문에, 이 말들은 한 무리의 마음에는 기쁨과 즐거움을 가져다 주겠지만, 다른 한 무리의 마음 속엔 공포를 일으키는 말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행위와는 관계없이,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 할지라도, 진정한 구원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행위 또는 행동들을 낳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 1서 3:7,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행동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이 절이 뭔가 의미하는 게 있다면, 그것은 사람이 행하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의 됨됨이를 뜻한다는 겁니다. 야고보서 3:11,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로마서 6:2,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마태복음 12:33-35,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그런데 말씀으로 태어난 사람은(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베드로전서 1:23) 말씀의 열매를 생산해낼 것입니다. 그의 생활의 열매 또는 행위들은 그 사람 안에 있는 씨 또는 생명에서 나온 산물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행동들은 성경적인 행동들일 것입니다. 오, 이 진리가 버가모 시대에 대적하게 될텐데 얼마나 대단한 고발입니까. 거기에 비할 수 없는 분이 서 계시는데 그의 손에는 양쪽에 날선 예리한 칼 즉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은 마지막 날에 우리를 심판할 것입니다. 사실 말씀은 지금도 심판하는 중에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생각과 마음 속의 뜻을 분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자들로부터 육적인 자들을 가릅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읽고 알게 하는 살아 있는 편지가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모든 사람들이 읽고 아는 살아있는 편지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안다." 만약 누가 자기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지나 않을까 하여 두려운 마음이 생긴다면, 말씀을 이루십시오. 누가 자기가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 지 궁금하게 여긴다면, 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그는 그 칭찬의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은 옛적에도 표준이었지만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표준은 없고 다른 다림줄은 없습니다. 세상이 앞으로 한 분 그리스도 예수의 심판을 받게 되듯이 말씀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만약 누가 그가 어떻게 해 낼지 알고 싶다면, 야고보가 제시한 대로 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을 들여다보라."(Eng.p. 178)

"내가 네 행위를 안다." 그분이 거기에 말씀을 가지고 서서 그가 그들을 위해 제시한 청사진에 비추어보며 그들의 삶을 조사하실 때, 그는 분명히 그들이 전에 있던 자들처럼 불의한 자들의 핍박을 견뎌내고 있었고 여전히 기쁜 마음으로 주님에게 매달려 있었기 때문에 대단히 흡족해 하셨을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이 때때로 어려웠지만 그들은 성령과 진리 안에서 그분을 섬겼고 경배했습니다. 그러나 거짓 포도나무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슬프게도, 그들은 말씀에 근거한 삶을 거절했고 이제는 진리로부터 점점 더 멀리 떨어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행위들은 그들이 빠진 깊은 데를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


"우리가 누구에게 가오리까? 당신만이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가지셨나이다!" 그때 그들은 굳게 붙들었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굳게 붙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열매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처럼 숙명적인 공포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의 힘과 그분 안에서 하나라는 성령의 확신 가운데 굳게 잡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죄가 용서받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에 대한 증거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다녔습니다. 그들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알았고 그 이름을 사랑했습니다. 그들은 그 이름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들의 혀는 그 이름을 고백했습니다. 그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주 예수의 이름으로 모든 일을 행했습니다. 그들은 그 이름을 불렀고 악을 떠났고 이제는 그 이름을 위해서라면 죽을 준비도 되어 있었습니다, 보다 나은 부활을 확신하면서.


너 예수의 이름을 불러라

슬픔과 고통을 지닌 자녀여,

그 이름은 네게 기쁨과 위로를 주리라

그러니 어딜가나 그 이름을 불러라

귀한 이름이여, 오 달콤한 그 이름,

세상의 소망이요 천국의 기쁨일세.


2세기 때에 이미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말들은 많은 이들에게 "삼위일체(Trinity)"로 알려졌고, 세 분 하나님의 다신론은 거짓 교회 안에서 하나의 교리로 자리잡았습니다. 그 후로 얼마 가지 않아서 그 이름은 빼앗겼고 오늘 이 시대에서는 그 대신에 위대하신 한 분 하나님의 직함들이 그 이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다 변절하여 삼위일체를 품에 끌어안고(Eng.p. 179) 신성의 직함들을 사용하여 세례를 했지만, 적은 양무리들은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했고 그 진리를 고수했습니다.

너무도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불명예스럽게 하고 그를 세 신으로 변경해 그의 은혜스러운 이름을 직함들로 바꾸었기 때문에, 그토록 위대한 이름에 동반하는 이적과 기사들이 여전히 그 사람들 사이에 내려왔는지 궁금하실 것입니다. 정말로 그런 기사들이 강하고 놀랍게 표명되었습니다, 물론 거짓 포도나무에게는 아니었지요. 마틴 같은 사람들은 크게 쓰임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이적과 기사와 성령의 선물들로 증거하셨습니다. 그 이름은 항상 그래왔듯이 여전히 영향력이 있었으므로 성도들이 말씀과 믿음을 통하여 그분에게 영예를 돌릴 때는 항상 그럴 것입니다.


너희가 내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사도행전 3:16에서 베드로는 미문에 있던 앉은뱅이에게 어떻게 그토록 큰 기적이 일어났는지 질문을 받자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의(예수) 이름을 믿으므로 그의(예수) 이름이 이 사람을(앉은뱅이였던 사람) 성하게 하였나니 그(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여러분 모두 앞에서 그를(그 사람)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습니다." 보셨죠, 바로 그겁니다. 예수의 이름이, 예수의 믿음이 기적을 가져왔습니다. 베드로는 그것이 자기의 인간적인 믿음이요 자기의 이름이라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온 믿음 안에서 사용된 예수의 이름이 그런 위대한 역사를 행하였다고 말했습니다. 이 믿음은 주님이 계시록 2:13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게 아니라 그가 믿는 자들에게 주셨던 그분 자신의 믿음이었습니다. 로마서 12:3.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1절에 의하면 각 사람들이란 형제들입니다) 믿음의 분량대로." 에베소서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믿음)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야고보서 2:1에서도 말하기를, "내 형제들아(보십시오 야고보도 형제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아니라)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이 버가모 시대에 사람들은 구원을 인간화하고 있었습니다, "구원은 주께로부터 온다"는 진리에 등을 돌리고--선택하심의 교리를 제쳐두고 교회 문을 활짝 열고 (말씀은 상관치 않고) 그들의 의견을 인정하는 사람은 누구나 교제하였습니다, 빠른 속도로 타락하던 이 시대에, 아직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의 분량을 가지고 그 믿음을 권능의 행위에 사용했을 뿐 아니라 단지 교회에 다님으로써 구원을 받는다고 감히 말하는 자들을 대적했던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Eng.p. 180) 그들은 주 예수, 그분의 믿음의 분량이 없으면 아무도 진정으로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동정녀 탄생과 흘려진 피, 교회에 다님, 성찬 참예등에 찬성하지만 결코 거듭나지 아니한 지적인(머리로 믿는) 신자들로 가득 차 있듯이, 역시 이 세번째 시대에서도 똑같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인간적인 믿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던 것처럼 지금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이 있어야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그가 손으로 짓지 아니한 성전 안으로 영광의 주님을 영접할 수 있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산 믿음이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 바울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생명을 주고 그로 그리스도인의 승리 가운데 계속 살게 했던 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아니,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구원은 초자연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분의 이름과 믿음에 대한 진리를 살아 있게 했고 그로 인해서 주님에게 축복을 받고 그분에게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았습니다.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


이 형제에 대하여는 말씀 속에도 세상의 역사에도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꼭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가 미리 아신 바 되었고 주님이 알고 계셨다는 사실로도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살아있는 말씀 속에 기록된 그의 주님에 대한 충실함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었으며, 예수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으로 사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야고보의 말씀에 반응을 보였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스데반처럼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고, 아무도 높이 여기지 않았고, 아무도 무서워하지 않았으며, 그 이름을 취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서 행하려는 사람들 모두에게 사형이 선고되었을 때, 그는 돌아서지 않을 사람들과 입장을 같이 했습니다. 네, 그는 죽었습니다. 하지만 아벨처럼,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증거를 얻었고(그의 이름이 말씀 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죽었으나 하나님의 신성한 기록의 페이지 안에서 그의 음성은 여전히 말하고 있습니다. 또다른 충성된 순교자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그가 평강의 왕을 죽였을 때 승리하지 못했던 것처럼, 그때도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사탄이 십자가에서 탈취당했듯이, 이제 안디바의 피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백명이 넘는 자들에게 외칠 것이기 때문입니다.(Eng.p. 181)


사단이 거하는 곳에서


이것이 성령의 찬사의 일부인 까닭은 이들 용감한 십자가의 군병들이 사탄의 보좌가 있는 방 한 가운데서 사탄을 이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두움의 지도자들의 진영 한 가운데서 예수의 이름과 믿음을 통해 싸움에 승리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칭찬입니까. 다윗에게 갈증을 해소시키는 물을 가져오기 위해 적진에 쳐들어 갔던 다윗의 용사들처럼, 이들 믿음의 거인들은 사탄의 지상 요새 영역에 침입하여 말씀을 전하고 권면하여 사망의 그늘 아래 살던 사람들에게 구원의 물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런데 사탄의 보좌와 영역에 관한 이 말들이 하나님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칭찬한 말들 중 일부이듯이, 그들은 실제로 교회 안에서 최고의 위치를 얻는 악을 탄핵하기 위해 조치를 취합니다.

버가모(Pergamos): 사탄의 보좌와 거하는 곳. 많은 사람들에게, 이 구절이 진정 역사적이기 보다는 단지 묘사적인 구절이 되어왔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정말로 실제이며 역사가 그것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버가모는 정말로 사탄의 보좌요 거하는 곳이었습니다. 그 일은 이렇게 벌어졌습니다.

버가모는 원래 사탄이(인간의 문제들을 다루면서) 거했던 곳이 아니었습니다. 바벨론이 항상 실제적으로나 비유적으로 그의 본부가 되어왔습니다. 그것은 사탄적 숭배의 발상지였던 바벨론시에 있었습니다. 창세기 10:8-10,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이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군이 되었더라.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창세기 11:1-9,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여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Eng.p. 182)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바벨은 바벨론의 원 이름입니다. 그것은 혼잡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실제로 함의 아들 구스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유능한 사냥군이었던 그의 아들 니므롯의 지배 아래서 세력과 영광을 갖춘 왕국이 되었습니다. 창세기 11장의 이야기와 세상의 역사에 의하면, 니므롯은 세 가지 일을 성취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강한 나라를 건설하기 원했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는 자기 종교를 펴뜨리길 원했고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자기를 위해 이름을 내기를 원했는데, 그것도 이루었습니다. 그의 성취들이 그토록 중대한 것들이어서 바벨론 왕국은 전 세계 정부 가운데 금으로 된 머리라고 불리웠습니다. 그의 종교가 으뜸의 위치를 차지한 것은 성서가 이사야 14장과 계시록 17-18장에서 그것을 완전히 사탄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사실로 증명이 됩니다. 그리고 역사를 참조하여 우리는 그것은 온 세상을 침략했고, 비록 사람들의 언어에 따라서 각국의 다양한  지역에서 신들의 이름은 서로 다르지만, 모든 우상 숭배 체제와 신화 주제의 기본임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가 자기와 자기 추종자들을 위해 이름을 냈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현 시대가 지속되는 동안에는(예수께서 그분의 형제들에게 자기 자신을 나타내실 때까지) 비록 니므롯과는 다른 이름이지만 또 그가 원해 숭배 받았던 사원과는 약간씩 다른 사원에서지만 그는 경배와 존귀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다른 나라들의 역사들을 자세히 다루고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버가모가 바벨론의 사탄적 종교의 자리가 되었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고대 세속적인 기록들을 찾아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 정보의 중요한 출처들은 이집트와 그리이스의 기록들일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집트는 갈대아인들로부터 과학과 수학을 받아들였고 그리고나서 그리이스가 이집트로부터 그것들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이 이 과학들을 가르치는 걸 맡고 있었고 이들 과학은 종교의 일부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바벨론 종교가 이 두 나라 안에서 세력을 잡고 있었는지에 대한 열쇠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정복할 때마다, 예정된 시간이 되면 정복국의 종교가 피정복국가의 종교가 된다는 것은 역시 사실입니다.(Eng.p. 183) 그리이스인들이 바벨론 사람들과 똑같이 십이궁지의 표시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집트인들이 그리이스인들에게 다신론에 대한 지식을 전해 주었다는 사실이 고대 이집트의 기록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바벨론의 비밀들은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퍼졌는데, 로마와 중국과 인도에서 모습을 나타냈고 우리는 심지어는 북미와 남미에서도 똑같은 기본적인 숭배를 발견하게 되는 지점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고대 역사는 바벨론 종교가 틀림없이 지구상의 최초의 사람들이 가졌던 원 종교가 아니었다는데 대하여 성경과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최초의 믿음에서 떨어져나온 첫번째 종교였지만 그것은 원래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윌킨슨이나 몰렛같은 역사가들은 고대 기록들로부터 결론적으로 한 때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은 지존하시고 영원하시며 보이지 않고 그의 입의 말씀으로써 모든 것을 생기게 말씀하시며, 성격은 자비로우시고 선하시며 의로우신 분인 한 분 하나님을 믿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항상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더럽히려고 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탄이 사람들이 그 진리를 거절하게 하려고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을 더럽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탄은 항상 자기가 하나님의 종이며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인 것처럼 경배를 받으려고 해왔기 때문에, 경배를 자기에게로 끌어당겨서 높아지려고 사탄은 하나님으로부터 경배를 빼앗아 갔습니다. 그는 분명 전 세계에 걸쳐 자기의 종교를 퍼뜨리고자 하는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이것은 로마서에서 하나님이 확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아니하며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마음이 어두워져 더럽혀진 종교를 받아들여 조물주가 아니라 피조물을 경배하게 되었다." 명심하십시오, 사탄은 하나님의 피조물(아침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가 사람들 사이에 보급되고 모든 사람들이 그 유일한 진리를 붙들고 있자, 나중에는 많은 무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마귀의 경배 형태를 세상에 퍼뜨리는 날이 왔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역사는 불변하는 진리의 편에 섰던 셈의 족속에 속하는 자들은 진리에서 떠나 마귀의 거짓말을 믿던 함의 족속들과 완전 대립 상태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깊이 토론할 시간은 없습니다. 다만 여러분이 두 가지 종교가 있었고 두 개만이 있었고, 악한 것이 세상에 널리 퍼졌다는 것을 아시도록 소개했을 뿐입니다.

유일신론은 바벨론에서 다신론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도시에서 마귀의 거짓말과 마귀의 비밀들이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님의 비밀들에 대항하며 일어났습니다.(Eng.p. 184) 사탄은 진실로 이 세상의 신이 되었고 자신이 진정으로 주님이라고 믿도록 하여 속인 사람들로부터 강제로 경배를 얻어냈습니다.

원수의 다신론적 종교는 삼위일체 교리로 시작했습니다. "삼위(세 인격체) 안에 계신 한 하나님(One God in three persons)"이론이 생긴 것은 아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참 이상한 것은 우리의 현대 신학자님들이 이 점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명확하게 그들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사탄에게 속아서 여전히 신성 안에 삼위(세 인격체, three persons)를 믿고 있습니다. 그 교리에 대한 권위가 있는 성경 구절을 하나라도 우리에게 보여주십시오. 그런데 함의 자손들이 계속해서 세 하나님의 기본 개념에 연관된 사단의 경배를 드리는데 비해서 셈의 자손들 중 어느 한 줄기도 그와 같은 것을 믿었다거나 그와 같은 형태에 연관된 어떤 의식적인 경배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상하지 않습니까? 만약 신성 안에 세 분이 계시다면, 히브리인들이 "이스라엘아 들으라 너의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하나님이시니" 라고 믿었던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셈의 자손인 아브라함은 창세기 18장에서 두 천사와 함께 하신 일위(한 분)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삼위일체는 어떻게 표현되었습니까? 그것은 오늘날 로마에서 표현되듯이 정삼각형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이상하죠, 히브리인들은 그런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럼 누가 맞습니까? 히브리인들입니까 바벨론 사람들입니까? 아시아에서 한 분 안에 계신 삼위 하나님의 다신론 사상은 몸 하나에 머리가 셋 달린 형상으로 나왔습니다. 그분은 세 지성적 존재로 표현됩니다. 인도에서는, 마음 속에서 세 가지 형태로 된 한 신으로서 그를 표현하고자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정말 훌륭한 현대 신학입니다. 일본에서는 우리가 앞에서 기술한 것과 같이 머리 셋 달린 커다란 부처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들 중 가장 계시적인 것은 1. 아버지 하나님을 상징하는 늙은 남자의 머리, 2. 아들을 의미하는, 비밀리에 "씨"를 상징하는 하나의 원, 3. 새(비둘기)의 두 날개와 꼬리, 이 셋이 하나로 합쳐진 형태로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개념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신성 안에 계신 삼위(세 분), 참된 삼위일체 교리였습니다. 여러분들은 동일한 것을 로마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자 제가 다시 한 번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실제로 마귀와 그를 경배하던 자들이 믿음의 조상(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보다도 계시된 진리를 더 많이 가지고 있었다는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탄을 경배하던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들보다 하나님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자 그것이 바로 현대 신학자들이 삼위일체론에 대해 말할 때 우리에게 말하려고 애쓰는 부분입니다. 이제부터는 이것 한 가지를 꼭 기억하십시오: 이 기록들은 사실이며 이것은 사실이라는 것을.(Eng.p. 185)

사탄은 거짓말쟁이이고 거짓말을 낸 조상이며, 그가 어떤 빛을 가지고 올 적마다 그것은 여전히 거짓말입니다. 사탄은 살인자입니다. 그리고 그의 삼위일체 교리는 많은 사람들을 멸망시켜왔고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멸망시킬 것입니다.

역사에 의할 것 같으면 한 아버지와 한 아들과 성령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지기 위해서 변화에 소요되는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탄은 그것들을 진리로부터 한 번에 한 단계씩 취했습니다. 그 진화된 신성의 개념은 이제  1. 영원하신 아버지, 2. 인간 어머니 안에 육화된 하나님의 영,(이것은 뭔가 생각해 보게 하지 않습니까?) 3. 그 성육신의 열매인 신성한 아들이,(여자의 씨)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는 간접적인 방법을 제외하고 보면, 아직 자신에 대한 경배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점점 더 사람들을  진리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그의 비밀들을 통해서 마귀는 사람들에게 위대하신 보이지 않는 아버지 하나님은 인간들의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고, 그러나 그것들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조용한 가운데서 경배를 받는 것도 당연하다고 나타냅니다. 실제로 그것은 전부가 아니라면, 될 수 있는 한 많이 하나님을 무시하라는 의미입니다. 이 교리는 또한 전 세계에 퍼졌고 오늘날에는 인도에 여러분은 그 위대한 창조주, 침묵하는 신에게 바친 신전이 놀랍게도 몇 개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조주이자 아버지를 경배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경배의 대상물로서 "어머니와 아기"에게 경배가 기울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이집트에서는 이시스(Isis)라는 어머니와 오시리스(Osiris)라는 아들의 결합이 있었습니다. 인도에는 이시(Isi)와 이스와라(Iswara)였습니다. (이름조차 비슷한 것을 보십시오.) 아시아에서는 씨빌리(Cybele)과 디오이우스(Deoius)였습니다. 로마와 그리이스에서도 비슷했습니다.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로마 카톨릭 선교사들이 중국엘 가서 마돈나와 머리에서 빛줄기가 흘러나오는 아기를 발견하고 놀랬을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형상은 얼굴 생김새의 차이를 제외하고는 바티칸에 있는 것과 바꿔도 될 만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원 어머니와 아이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바벨론의 원 여신이자 어머니는 쎄미라미스(Semiramis)였는데 동쪽 나라들에서는 리어(Rhea)라고 불렸습니다. 양팔로 아들을 안고 있는데, 그 아들은 애기지만 크고, 힘이 세고, 잘 생기고 특히 여자들을 사로잡는 모습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에스겔 8:14에서 그는 담무스(Tammuz)라 불렸습니다. 고전주의 작가들 사이에서는 박카스(Bacchus)라 불렸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에게는 니누스(Ninus)였습니다. 그가 팔에 안겨 있는 아이로 그려지고 하지만 위대하고 강한 남자로 묘사되고 있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는 것은(Eng.p. 186)그가 "남편이자 아들"로서 알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직함들 중 하나는 "어머니의 남편"이었으며 그 둘이 이스와라와 이시로 알려져 있는 인도에서는 그는(남편) 아내의 가슴에 안겨 있는 애기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 니누스가 성경에 나오는 니므롯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와 창세기 이야기를 비교함으로써 확증할 수 있습니다. 폼페이우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앗시리아의 왕인 니누스는 정복욕으로 고대의 온건한 생활 양식을 바꾸었다. 그는 주변국가들에게 전쟁을 일으킨 첫번째 인물이었다. 그는 앗시리아에서부터 리비아까지 모든 나라를 정복했는데 이들은 전쟁의 기술을 알지 못했다." 디오도루스는 말하길, "니누스는 역사에 언급된 앗시리아 왕들 가운데 가장 윗대의 인물이었다. 호전적인 성품을 가진 그는 많은 청년들에게 가혹하게 전쟁 기술을 훈련시켰다. 그는 바벨론에 아무 도시도 없을 때 바벨로니아를 정복했다." 그래서 우리는 니누스가 바벨론에서 위대해지기 시작했고, 바벨을 세우고 앗시리아를 정복하여 그 나라의 왕이 되었고 그리고나서는 사람들이 전쟁 기술을 모르고 폼페이우스가 말했듯이 온건하게 살고 있던 다른 거대한 영토들을 삼키기 위해서 나아갔음을 봅니다. 그런데 니므롯의 왕국에 대해 말하고 있는 창세기 10장에서, 성경은 말하기를,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그러나 번역가들은 앗수르를 명사로 번역하는 실수를 범했는데, 그 말은 동사입니다. 갈대아말로 그것은 `강해지려고'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강해짐으로써(그는 훈련과 사냥을 엄하게 시켜 훈련시킨 세상에서 최초의 군대를 만듦으로서 나라를 세웠습니다.) 강한 군대와 함께 시날 땅으로 가서 나라들을 정복했고 니느웨같은 도시를 건설했던 사람은 니므롯(Nimrod)이었습니다. 니느웨라는 말은 그의 이름에서 따온 이름이었고 오늘날까지도 그 도시의 잔해물들 중 으뜸된 것은 님루드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니누스가 누군지 알아보았으므로 이제는 그의 아버지가 누구였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역사에 의하자면 그의 아버지는 바벨론의 창시자인 벨이었습니다.(그런데 여기서 그가 이 전체 움직임을 시작했다는 의미로는 벨이 그것을 세웠지만 아들인 니누스가 그것을 다지고 처음으로 왕이 되었다는 사실등은 주목해 볼만한 점입니다.) 그러나 성서에 따르면 니므롯의 아버지는 구스였습니다.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이뿐만 아니라 우리는 함이 구스를 낳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이집트의 문화에서 보면 벨은 헤르메스(허메)라 불리웠고 헤르메스란 "함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역사에 따르면 헤르메스는 우상숭배의 훌륭한 선지자였습니다.(Eng.p. 187) 그는 신들의 통역자였습니다. 그를 칭한 또다른 이름은 머큐리였습니다.(사도행전 14:11-12를 읽어 보십시오.)

히기누스는 벨, 허메, 머큐리 등등으로 다양하게 알려진 그 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 시대에 걸쳐서 인간은 조브(Jove)의(로마의 Jove이 아니라 로마 역사에 앞선 히브리인들의 여호와)의 정부 아래서 도성과 법 없이 모두 한 가지 언어를 말하며 살았다. 그러나 머큐리(벨, 구스)가 인간들의 말을 통역한(그러므로 통역자는 헤르메뉴테스라고 불리운다) 후로, 그 인물은 나라들을 분류했다. 그리고나서 불화가 시작되었다." 여기서 보건대 벨 또는 구스, 니므롯의 아버지는 원래 사람들을 진실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신들의 통역자"로서 사람들에게 다른 형태의 종교를 취하도록 권고한 주모자였습니다. 그는 그들로 실제로는 그의 아들이 지은 탑으로 나아가게 했습니다. 이 권고는 인간들에게 혼란과 분란을 가져온 것이었고 그래서 그는 "통역자이며 교란자"였습니다.

구스는 그때 다신 체제의 창시자였고 인간이 인간에 의해 신격화되었을 때, 물론 신들의 아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구스는 벨이라 불리웠습니다. 그런데 로마 신화에서 벨은 야누스였습니다. 그는 두 얼굴을 가진 모습과 사람들을 혼동케하여 "흩어지게"하는데 사용했던 막대기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오비드(Ovid)는 야누스가 자신에 대하여 말한 것을 썼는데, "고대인들은 나를 혼돈(chaos)이라 칭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구스는 유일신론에 반대하는 반역자의 시조로서 고대인들 사이에서 벨, 벨루스, 헤르메스, 야누스 등등으로 불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신들로부터 계시와 해석들을 전달하고자 애썼습니다. 그렇게 하는 동안 그는 하나님의 진노를 사 사람들에게 분리와 혼동을 주어 사람들을 흩어놓게 하였습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다신론이나 다신 숭배가 어디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아봤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또한 "신들의 아비"라는 직함이 주어졌던 구스라 이름한 사람을 언급한 것도 찾아봤다는 사실을 아셨습니까? 여기서 고대 신화들의 오래된 주제는 신들이 자신들을 인간으로 동일시한다는 사실을 아셨습니까? 그것이 조상을 숭배하는 풍습이 시작된 곳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상 숭배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역사를 한 번 조사해 보아도 될 것입니다. 글쎄, 구스는 아버지 아들 영의 세 신을 숭배하는 것을 소개했다고 합니다. 모두 동등한 세 신들을. 그러나 그는 여자의 씨가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한 여자와 그녀의 씨가 있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니므롯이 죽자 실현되었습니다. 그의 아내인 쎄미라미스가 그를 신격화하고(Eng.p. 188) 자신을 아들의 어미인 동시에 신들의 어미로 만들었습니다.(로마 교회가 마리아를 신격화한 것과 똑같이. 그들은 그녀가 죄도 없고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녀(쎄미라미스)는 니므롯을 "제로아시타(Zeroashta)"라 불렀는데, 그 뜻은 "여자의 약속된 씨"입니다.

그러나 그 여자가 그 아들보다 더 많은 관심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곧 뱀을 밟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 자였습니다. 그들은 그녀를 "하늘의 여왕"이라 불렀고 그녀를 신성시했습니다. 오늘날과 너무나도 흡사합니다,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불멸의 존재로 승화되었다가 이제 1964년 9월로 바티칸 공회는 마리아에게 그녀가 소유하지 않은 자격을 주려고 시도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그녀를 "메디아트릭스 마리아" "모든 신자의 어머니 마리아" 또는 "교회의 마리아"라고 부르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종교에 바벨론적 조상 숭배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로마 교회의 종교입니다.

조상 숭배가 바벨론에서 유래되었을 뿐 아니라 자연 숭배도 거기서 유래되었습니다. 바벨론 신들은 태양과 달과 기타등등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자연에서 으뜸되는 대상은 빛을 주고 토양에 열을 주고 인간에게는 하늘에 있는 불공으로 보이는 태양이었습니다. 그래서 최고 신은 바알이라고 불렸던 태양신이 되었습니다. 종종 태양은 불꽃 고리로 묘사되었고 곧 그 불꽃 주위에는 뱀이 나타났습니다. 오래지 않아 뱀이 태양의 상징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경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탄의 마음에 있던 소원은 완전히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 숭배를 받았습니다. 그의 보좌가 세워졌습니다. 그의 노예들은 그에게 절했습니다. 거기 버가모에서는 살아있는 뱀의 형태로 숭배를 받았습니다. 이제 살아 있는 뱀의 형태로 상징된 선악을 아는 나무는 이브를 꼬였을 뿐 아니라 인류의 다수를 미혹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바벨론이 자리였는데 버가모가 사탄의 위가 되었습니까? 다시 해답은 역사에 있습니다. 바벨론이 미디아와 페르시아에게 함락되었을 때, 제사장이자 왕인 앗탈루스(Attalus)는 그 성에서 도망쳐 그의 제사장들과 신성한 비밀들을 가지고 버가모로 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로마 제국 밖에다 그의 왕국을 세우고 마귀의 보살핌 아래서 번성했습니다.

이것은 바벨론 종교사와 버가모로의 이주에 대한 매우 간략한 개요입니다. 물론 많은 의문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고 의심할 여지 없이, 더 많은 것들이(Eng.p. 189) 우리에게 빛을 던져주기 위해 말해질 수 있겠지만 이것은 역사를 공부하기 위함이 아니라 말씀을 배우는데 도움이 되기 위한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탄  핵


계시록 2:14-15,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리를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내가 미워하는 니골라당의 교리를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이 버가모 시대에서 주님은 그가 미워하시는 두 가지 교리를 탄핵하고 계십니다. 1. 바알 브올에서 이스라엘에게 우상 숭배와 범죄들을 가져온 발람의 교리와  2. 에베소 시대에서는 행위에 불과했던 니골라당의 교리. 이 탄핵과 그가 버가모를 사탄의 보좌로 강조하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묶어 보십시오. 그러면 어찌 되었든지 바벨론 종교가 그리스도교와 혼합되었다는 사실을 아주 쉽게 그리고 적절하게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자 이것은 단순히 가설일 뿐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인데 우리가 주후 36년 경까지 역사를 거슬러 가서 325년 니케아 종교 회의에까지 추적해 봄으로써 증명할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주로 유대인들인데)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밖으로 흩어졌을 때 그들은 복음을 전파하면서 온 땅에, 특히 회당에 다녔습니다. 그래서 3년 내에 즉 주후 36년 경에 복음은 유니아와 안드로니고에 의해 로마에 전해졌습니다, 로마서 16:7에 보면 그들은 사도들이었습니다. 그 일은 거기서 여러 해 동안 번성했으나 유대인들 사이에서 언쟁이 계속되자 글라우디오 황제는 그들을 로마에서 쫓아냈습니다. 로마에서 유대인들이 추방당하자 그 작은 교회의 척추는 실상 부러진 상태였습니다. 아마 장로들도 유대인이었으므로 떠나야 했을 것입니다. 그 양떼는 돌보는 자가 없는 상태였고 말씀이 안내자로서 기록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이 적은 양무리가 타락하거나 그 당시의 철학자들과 이교도들에게 묻혀 버리기는 아주 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먹이를 찾는 흉악한 이리와 적그리스도의 영이 풀려진 상태에서, 우리는 역사에서 로마에 있던 이 작은 교회는 어쩔 수 없이 타락해버리고 그리스도교라는 타이틀 아래에 이교도 의식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추방 기간이 13년간 지속되자, 창시자들(Eng.p. 190)인 유니아와 안드로니고는 주후 54년까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교라는 타이틀 아래 끔찍하게도 이교도적인 교회를 보고 그들이 얼마나 놀랐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그 교회 안에는 향을 두고 이교 의식을 치루는 제단들도 있었습니다. 그 교회의 기존 지도자들과 연락이 되지 않자 신실하게 남아 있으려 하던 소수의 무리와 함께 그들은 새 교회를 즉 로마의 두번째 교회를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롭게도 그들 사이에서 이적과 기사로 역사하시사 세째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첫번째 교회는 경배에 있어 이교도적이며 그리스도적이 아니라는 비난을 받고 있었지만 그 직함을 포기하려 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고 여전히 로마의 첫번째 교회로 남아 있습니다--로마 카톨릭 교회입니다.

그런데 우리들 중 대다수는 자신들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나 모두는 마귀의 과녁이 되고 결과적으로는 정부의 폭정의 목표물이 될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 첫번째 교회는 번성하고 교인 수가 증가하기 시작하였고 황제들과 다양한 정부 관리들은 정치적 이유에서 사실 그 교회를 선호하였습니다. 그래서 로마에 있는 첫번째 교회의 지도자들이 자신들이 은총을 받고 있는 것을 발견하자, 그들은 그것을 정부가 진실한 신자들을 대적하여 그들이 자기 양우리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핍박하도록 기회로 삼았습니다. 로마의 첫번째 교회의 그와 같은 주교 가운데 한 사람은 2세기에 살았고 폴리캅과 동시대 사람인 아니세투스였습니다. 약한 폴리캅이 로마의 첫번째 그리스도 교회가 이교 의식에 연류돼 복음의 진리를 더럽힌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그는 그들에게 변모를 촉구하고자 거기로 갔습니다. 폴리캅은 그들이 사도들과 성도들의 이름을 딴 우상들 앞에 엎드려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그들이 양초에 불을 키고 제단에 향을 피우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부활절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유월절을 기념하는 것을  보았는데, 태양신을 기리는 동그란 모양의 빵을 들어올리고 그리고 나서 포도주를 쏟아 신들에게 헌주하였습니다. 그러나 1500마일을 여행했던 이 늙은 성도는 그들의 하행 추락을 멈추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떠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에브라임이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두라" 호세아 4:15. 폴리캅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니세투스를 이어 빅토르라는 악한 로마 주교가 있었습니다. 그는 첫번째 교회 안에 더 많은 이교 축제들과 의식들을 도입했고 또한 진실한 그리스도 교회들을 똑같은 사상에 연합하라고 설득하는데 전력을 기울이며 다녔습니다. 그들이 그가 요구한대로 하려 하지 않으므로 그는(Eng.p. 191) 정부 관리들을 우겨서 신자들을 핍박하게 했습니다, 그들을 법정에 소환하고 옥에 가두고 심지어 많은 이들에게 사형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그의 사악한 행위의 그런 예는 (빅토르의 친구인) 칼리스투스가 셉티무스 쎄버루스 황제를 이기고 데살로니가에 있는 7000명의 참된 신도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에 따라, 아스다롯 숭배에 따르지 않고 유월절을 축하했기 때문에 살해케 한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벌써부터 거짓 포도나무는 그들의 선조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처럼 택함 받은 자들을 죽임으로써 살아계신 하나님께 대적하여 분을 풀어놓고 있었습니다.

참 교회는 첫번째 교회가 회개하도록 하려고 계속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크기와 영향력이 점점 커졌습니다. 그것은 참된 씨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운동을 계속 벌여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그리고 자기들만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대표자라고 주장했고 그들이 로마에 처음으로 생긴 교회이며 그들만이 첫번째 교회라는 사실을 마구 자랑했습니다. 정말로 그들이 첫번째 교회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세번째 교회 시대 때에 이르면 같은 이름을 소지하고 있지만 둘 사이에 씁슬한 차이가 있는 두 교회가 있습니다. 하나는 진리를 떠나 우상들과 결혼했고 안에 생명이 없는 교회입니다. 그녀는 자신을 잡종화시켰고 그녀 뒤엔(생명이 아닌) 사망의 징조들이 바짝 뒤따릅니다. 그녀는 많는 구성원들이 있어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녀는 세상이 좋아합니다. 다른 교회는 핍박받는 소수의 무리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씀을 따르고 표적들이 뒤따릅니다. 병든 자들의 병이 낫고 죽은 자들이 일어납니다. 그 교회는 생명과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살아 움직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사랑하지 않고 그분의 이름과 그분의 믿음을 죽음이 온다 해도 고수합니다.

그런데 관료적 로마의 잔혹한 박해가 진실한 신자들에게 가해지다가 급기야는 콘스탄틴이 일어나 종교적 경배의 자유를 허용하게 되었습니다. 이 자유가 주어진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 많은 선량한 황제들은 박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죽자 그리스도인들을 살해한 자들이 그 자리를 이었습니다. 결국 그리스도인들을 그대로 놔둬야 한다는 공론에 이르는 것은 너무나도 무모한 일이었습니다. 명확해 보이는 두번째 이유는 콘스탄틴은 제국의 지배권을 차지하는데 있어서 매우 힘든 싸움이 앞에 놓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밤 꿈에서 자기 앞에 흰 십자가를 보았습니다. 그는 이것은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를 위하여 승리를 위한 기도를 드려 준다면 그가 싸움에서 이기리라는 전조라고 느꼈습니다. 그는 승리를 거두게 되면 그들에게 자유를 주겠노라고 약속했습니다.(Eng.p. 192) 그는 승리를 거두었고 주후 312년에 낭뜨 칙령에서 경배의 자유가 수여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박해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은 처음에 보이던 것처럼 그리 관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콘스탄틴이 이제 후견인이 되었습니다. 후견인으로서 그의 관심은 다소 관찰자의 관심 이상가는 것을 보였는데 왜냐하면 그는 교회가 교회의 문제로 자기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고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여러 가지 문제로 그들이 의견의 불일치를 일으키는 것을 보았는데, 그 중 하나는 알렉산더의 주교인 아리우스와 연류된 문제로, 아리우스는 자기 지지자들에게 예수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물로 진정으로 하나님이 아니며 하나님보다 열등한 존재라고 가르쳤습니다. 서부 교회는 반대 견해를 고수했는데 예수는 하나님의 본질이시며 그들이 칭하는 바 `아버지와 동등한 분'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 문제들과, 예배에 유입된 이교도 의식을 두고, 콘스탄틴황제는 325년에 니케아 회의를 소집했는데 그 모임으로 모든 그룹을 함께 모아서 그들이 그들의 견해차를 해소하고, 한 가지 공통된 이해에 이르고, 모두 하나가 되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이것이 콘스탄틴과 함께 시작되었는데 죽지 않고 오늘날도 "세계 교회 협의회(WCC)"로 생생하게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이 특이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는 진정으로 그것을 달성하지 못했는데, 오늘날에 와서는 그것은 에큐메니칼 운동(세계교회주의)을 통해 성취될 것입니다.

그런데 정부의 교회 간섭은 어리석은 행동인데 왜냐하면 세상은 말씀에서 발견되는 진리나 교회의 형식들 가운데 한 가지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냐, 아리우스가 틀렸다는 회의의 결정이 전수되어 오다가 이년 후에는 황제에 의하여 바뀌어져 여러 해 동안 그 잘못된 교리는 사람들에게 몰래 주입시켜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와 정부가 연합하리라는 사실은 진실로 주님은 먼저 알고 계셨습니다. 버가모라는 이름 자체는 "완전히 결혼한 상태"를 뜻합니다. 그래서 정말로 정부와 교회는 결혼했고, 정치와 종교는 결합했습니다. 그 결합의 자식은 계속해서 세상이 이때껏 보아온 중에 가장 끔찍한 잡종이 되어왔습니다. 진리는 그들 안에 있지 않고 가인(첫 잡종)의 모든 악한 행위가 들어 있습니다.

이 시대에는 정부와 교회가 결혼했을 뿐 아니라 바벨론 종교가 공식적으로 첫번째 교회에 합류되었습니다. 사탄은 이제 그리스도의 이름에 접근했고 그는 하나님으로 보좌에 앉아 경배를 받았습니다. 정부의 협조를 받아 교회들은 대리석 단과 죽은 성도들의 형상이 줄지어 세워진 아름다운 건물들을 상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시대에 계시록 13:3의 죽도록 상처받은 짐승이(이교국인 로마제국) 살아나 "거룩한 로마 제국"으로 권세를 잡은 때입니다.(Eng.p. 193) 자원국으로서의 로마는 많은 고갈을 겪었고 나중에완전히 고갈 상태를 겪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로마 종교 제국이 외형으로는 나타나지 않지만, 내적으로는 세계를 통치하는 선두 자리를 지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정확한 성경적 진리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저는 누구라도 제가 성경에는 없는 것을--제 자신이 받은 계시를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다니엘 2:31-45, "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 그 신상이 왕의 앞에 섰는데 크고 광채가 특심하며 그 모양이 심히 두려우니 그 우상의 머리는 정금이요 가슴과 팔들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그 종아리는 철이요 그 발은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 또 왕이 보신즉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리매 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숴져 여름 타작 마당의 겨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었나이다 그 꿈이 이러한즉 내가 이제 그 해석을 왕 앞에 진술하리이다 왕이여 왕은 열왕의 왕이시라 하늘의 하나님이 나라와 권세와 능력과 영광을 왕에게 주셨고 인생들과 들짐승과 공중의 새들, 어느 곳에 있는 것을 무론하고 그것들을 왕의 손에 붙이사 다 다스리게 하셨으니 왕은 곧 그 금 머리니이다 왕의 후에 왕만 못한 다른 나라가 일어날 것이요 세째로 또 놋 같은 나라가 일어나서 온 세계를 다스릴 것이며 네째 나라는 강하기가 철 같으리니 철은 모든 물건을 부숴뜨리고 이기는 것이라 철이 모든 것을 부수는 것 같이 그 나라가 뭇 나라를 부숴뜨리고 빻을 것이며 왕께서 그 발과 발가락이 얼마는 토기장이의 진흙이요 얼마는 철인 것을 보셨은즉 그 나라가 나누일 것이며 왕께서 철과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은즉 그 나라가 철의 든든함이 있을 것이나 그 발가락이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인즉 그 나라가 얼마는 든든하고 얼마는 부숴질 만한 것이며 왕께서 철과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은즉 그들이 다른 인종과 서로 섞일 것이나 피차에 합하지 아니함이 철과 진흙이 합하지 않음과 같으리이다 이 열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Eng.p. 194)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 왕이 사람의 손으로 아니하고 산에서 뜨인 돌이 철과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숴뜨린 것을 보신 것은 크신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 이 꿈이 참되고 이 해석이 확실하니이다." 이 안에는 미래와, 완성되지 않은 역사의 정확한 이야기가 계시되어 있습니다. 다니엘 때부터 예수님이 다윗의 아들로 오셔서 통치하실 때까지 이 땅에 임하리라고 예언된 미완성의 역사입니다. 그것은 "이방인들의 때"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안에는 네 개의 역사적 분류가 있는데 그것은 각 분류 안에 드는 통치 제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즉 바벨론, 메대와 바사(미디안-페르시아), 그리이스, 로마 제국입니다. 그중 가장 위대하고 절대적인 군주 체제는 금 머리로 묘사된 바벨론 제국이었습니다. 그 다음 영광을 차지한 제국은 역사상 실제로 덜 영화스러웠고 은으로 된 가슴과 팔로 묘사된 메대와 바사제국이었습니다. 다음에는 그리이스 시대가 이어지는데 그들의 왕은 세상에 있었던 모든 군사 지도자들 중 가장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놋으로 된 배와 넓적다리로 적절하게 묘사되었습니다. 그것은 그 이전에 있던 다른 두 제국보다는 덜 영화스러웠습니다. 마침내 종아리와 발로 묘사된 마지막 왕국 로마 왕국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의 왕국들은 순수한 광물로 묘사되었는데(순수한 금, 은, 놋) 마지막 제국은 종아리만 순수한 철이었고, 왜냐하면 발로 내려오면 그것은 철과 진흙의 혼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광물과 흙은 섞이지 않고 연계성과 세력을 산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럴 뿐만 아니라, 정말 놀랍게도, 이 마지막 제국(로마)은 예수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그 독특한 `혼합 상태'를 이끌어 갈 것입니다.

철로 된(철은 힘과 반대하는 것에 대항하는 엄청난 파괴력을 의미합니다) 이 로마 제국은 주요한 두 덩어리로 분리될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물론 정말로 두 개로 나눠지는 제국을 위한 것이었습니다--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두 제국은 매우 강력하여 그들 앞에 있는 모든 나라를 무너뜨렸습니다.

그러나 모든 제국들의 영광과 권세가 쇠하듯이, 이 제국도 역시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로마는 무너졌습니다. 이교도인 로마 제국은 더이상 철이 아니었습니다. 그 나라는 무너졌습니다. 죽을 상처를 입었습니다. 로마는 이제는 지배할 수가 없었습니다. 모두 끝났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너무나도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머리는(로마) 상처를 당했어도 죽을 정도의 상처는 입지 않았습니다.(계시록 13:3에 대한 웨스트(Wuest)의 번역을 보면,(Eng.p. 195) "그 머리 중 하나가 완전히 죽은 것처럼 보였더라, 그 목이 깊숙히 베어졌더라 그런데 그 죽음의 상처가 나았더라 그리고 전 세계가 놀라면서 그 들짐승을 좇더라.")

사람들은 로마를 봅니다. 그들은 이탈리아 나라를 봅니다. 그런데 보면서 그들은 엄한 제한 속에서 교황이 실제적으로 한 나라 속에 있는 한 나라를 다스리면서 실제적인 영역을 가지고 있는 그 로마를 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로마는 대사들을 가지고 있고 대사들을 영접합니다. 교황의 거짓 그리스도교 로마는 (로마는 영원한 도시라고 불리기까지 합니다--얼마나 신성모독적인 말입니까) 지금 이교도인 로마제국이 순수한 철의 세력으로 다스렸을 때보다도 종교로 훨씬 더 능숙하게 다스리고 있습니다. 로마는 콘스탄틴대제가 교회와 정부를 연합시키고 그 연합을 권력으로 후원해 주었을 때 새로운 생명을 다시 얻었습니다. 이교도인 로마를 움직였던 그 영은 지금 가짜 그리스도교 로마를 움직이는 동일한 영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네번째 제국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고 다만 외양만 바꾸었음을 아시기 때문에 그것이 그렇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니케아 회의가 교회에 정치적인 로마의 세력을 부여했기 때문에, 첫번째 그리스도인 교회가 갈 수 있는 곳은 무제한적으로 보였습니다. 처음에는 박해를 불러일으키는 이름이었던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이제는 박해자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힙포의 어거스틴이(354-430) 교회는 그 자녀들을 양우리 안으로 되돌이키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무력도 사용해야 하며, 이단과 배도자들을 죽이는 행위는 하나님의 말씀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라는 규례를 만든 것은 바로 이 시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기부론자들과의 논쟁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사람들은 벌이나 고통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것에 몰리는 것보다 가르침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인도되는 것이 정말로 났지만, 전자의 경우가 더 나은 사람을 만들기 때문에 그것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무시되어야 한다는 것은 합당치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많은 이들이(우리가 증명했고 실제적 체험으로 매일 증명하고 있듯이) 먼저는 두려움이나 고통에 의해 강제로 이끌려지고, 나중에는 가르침에 의해 영향을 받고, 그들이 이미 배운 말씀을 행동으로 옮기는 이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올바른 인도를 받은 자들이 더 낫기는 하지만 분명히 두려움에 의해서 고침을 받은 자들은 수적으로 더 많이 있다. 왜냐하면 누가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친 그리스도보다 우리를 더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말씀으로만 부른 이후에, 그가 바울을 부를 때가 되었을 때, 그는(Eng.p. 196) 바울을 음성으로 제지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힘으로 바울을 땅에 내동댕이치기도 하셨고, 불신의 어둠 속에서 분노하고 있는 자를 강압적으로 마음의 빛을 소원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는 먼저 그를 육신적인 눈을 치사 멀게 하셨다.  그러므로 교회가 길잃은 아들들을 돌아오도록 강요하기 위해서 무력을 사용해서 왜 안된단 말인가? 주님도 직접, `사거리와 울타리로 가서 그들을 강제로 데려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에 교회가 종교적인 성품과 왕들의 믿음을 통해, 때를 따라 주시는 하나님의 지정으로 받은 권세가 사거리와 울타리에서 발견되는 사람들--즉 이단과 당파들--을 강제로 들어오게 하는 도구가 된다면, 강제로 들어오게 되는 이들은 아무런 불평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피에 대한 목마름은 점점 더해갔습니다. 이제 스페인에 있는 거짓 포도나무는 막시무스황제에게 나아가 말씀과 표적과 기사를 가지고 있던 진실한 신자들을 공격하는데 합세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이타쿠스주교는 브리스길라파인들을 트레베스로 데려갔습니다.(385) 그는 그들을 마술과 부도덕의 죄명을 씌워 많은 사람들을 처형시켰습니다. 뚜르즈의 마틴과 밀라노의 암브로즈는 이것을 반대했고, 박해를 멈추라고 요청했으나 허사였습니다. 박해가 연장되자 이 두 주교는 히다투스와 그의 동료 주교들과의 교제를 끊었습니다. 이상하게도 트레베스에 있던 종교 회의는 그 살인을 인정했습니다.

이 때부터, 특히 암흑 시대 동안, 우리는 육신의 자녀들이 영의 자녀들을 핍박하고 멸망시키는 것을 봅니다, 둘 다 이스마엘과 이삭의 경우처럼 한 분을 아버지로 부르는데 말입니다. 영적 부패의 어두움은 깊어갈 것이고 하나님의 참 빛은 수적으로 보면 너무도 희미하게 빛을 비추는 정도로까지 쇠하여 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진실을 지킬 것입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그것에 대해 아무 것도 하지 못하더라."

지금까지 저는 제가 다루기로 약속한 것 즉 니므롯 종교와 그리스도교의 혼합을, 역사를 통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앗탈루스가 바벨론에서 버가모로 도망가 로마 제국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자기 왕국을 세웠음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나라는 여러 해 동안 번성했고  이 세상 신에 의해서 양육을 받았습니다. 앗탈루스를 이어 계속 제사장겸 왕이 이어지다가 앗탈루스 3세가 통치하게 되었는데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만 알려진 이유로 그는 자발적으로 그 왕국을 로마에 넘겼습니다.(Eng.p. 197) 그때 줄리어스 씨저는 육적, 영적 두 왕국을 다 취했는데 왜냐하면 그는 바벨론 종교의 막시무스 교황이 되어 제사장이자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직함은 다음 황제에게 물려 내려왔는데 막시무스3세는 그것을 거절했습니다. 스티븐스의 역사에 의하자면 바로 그 때 교황이 그 황제가 거절한 우두머리 자리를 취했고 오늘날 세상에 여전히 교황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진정으로 막시무스교황입니다. 그는 삼중관을 쓰고 로마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계시록 17장에서 하나님은 더이상 버가모를 사탄의 위라고 언급하지도 않고 그곳이 사탄이 사는 곳이라고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아닙니다, 그 보좌가 있는 방은 더이상 버가모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비밀 바벨론입니다. 그것은 바벨론에 있는 게 아니라 비밀 바벨론에 있습니다. 그것은 일곱 산 위에 있는 도시 안에 있습니다. 그것의 머리는 적그리스도인데 왜냐하면 그가 홀로 중보자이시고 홀로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그리스도의 자리를 빼앗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막시무스교황은 오늘날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니골라당의 교리


계시록 2:15, "이와 같이 네게도 내가 미워하는 니골라당의 교리를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여러분들은 제가 에베소 시대에서 니골라당은 두 개의 헬라어에서 왔다고 말한 것을 아실 것입니다. 정복하다를 뜻하는 니카오(Nikao)와 평신도를 뜻하는 라오(Lao). 니골라당은 "평신도를 정복하다"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왜 이것이 그렇게도 무시무시한 것입니까? 그것이 무시무시한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그의 교회를 정치적 정신으로 움직이는 선택된 지도자들의 손 안에 두시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교회를 말씀을 공급함으로써 사람들을 이끄는 하나님이 정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며,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의 보살핌 안에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여러 계층으로 분리시키셔서 미사가 거룩한 사제들에 의해 인도되도록 하시지 않았습니다. 지도층이 거룩해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전 회중도 역시 거룩해야만 합니다. 나아가, 말씀 안에는 사제나 목사들이나 누구라도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중보하는 구절은 없고, 그들이 주님을 경배하는데 서로 분리된 그런 구절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두가 다 함께 그를 사랑하고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니골라당 주의는 그런 규례를 망치고 대신 목사들을 평신도들과 분리시켜서 지도자들을 종이 아니라 감독으로 만듭니다. 그런데 이 교리는 실제로 첫번째 시대에서 행위로 시작되었습니다. 문제는 `장로'와 `감독(주교)'이라는 두 말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성경이 각 교회에 여러 장로가 있다고 보여주고 있다 해도,(Eng.p. 198) 누군가가(그들 중 이그나티우스가) 감독의 개념은 으뜸이나 권위를 가진 자 그리고 장로들을 주관하는 자라고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의 진리는 `장로'라는 말은 그 사람이 누군지를 의미하고, `감독'이라는 말은 같은 사람의 직분을 의미한다는데 있습니다. 장로는 그 사람입니다. 감독은 그 사람의 직분입니다. `장로'는 언제나 주 안에서 보낸 나이만을 의미해 왔고 앞으로도 항상 그럴 것입니다. 그는  장로입니다, 그가 선택을 받거나 지정을 받아서나 등등 그래서가 아니라 그가 나이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는 더 원숙하고, 훈련을 받았고, 초년생이 아니라, 체험과 그리스도인의 경험의 세월에 연단된 증거로 인해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감독들은 바울의 편지에 꼭 매달려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들은 바울이 사도행전 20장에서 에베소에 있는 장로들을 밀레도로 불렀을 때 바울이 한 얘기를 중시했습니다. 17절 기록은 "장로들"이 불렸음을 말하고 있고 그 다음 28절에서 그들은 감독자들(주교)라 불렸습니다. 그런데 이 감독들은, (확실히 권력에 대하여 정치적인 마음과 열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감독자'는 자기 교회 내에서만 직분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지역 장로보다 더 나은 자라는 바울이 준 의미를 주장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제 감독은 많은 지역 지도자들 위에 확장된 권위를 가진 자였습니다. 그런 개념은 성서적이지도 역사적이지도 않았지만 폴리캅의 지위에 있는 사람조차도 그런 조직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그래서 첫째 시대에 행위로 시작된 것은 실제적인 교훈(교리)으로 되어 오늘날에 이르렀습니다. 주교들은 여전히 그 사람들을 지배할 권세를 주장하고 있고 자기들 바라는대로 그들을 다루며, 그들의 사역에서 원하는 곳에 그들을 배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우라"하신 성령의 지도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적-말씀이고 적그리스도입니다. 마태복음 20:25-28,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저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태복음 23:8-9,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 곧 그리스도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이 것을 좀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저는 니골라당 주의를 이런 식으로 설명드리겠습니다. 여러분 계시록 13:3에서,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Eng.p. 199)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라고 말한 것이 생각나시죠. 이제 우리는 그 상처난 머리는 이교도인 로마 제국, 그 커다란 정치적 세계적 힘이었음을 압니다. 이 머리는 다시 "로마 카톨릭 영적인 제국"으로서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주의깊게 지켜 보십시오. 정치적 이교도 로마는 성공의 근간이 되는 어떤 일을 했죠? 로마는, "나누고 정복했습니다." 그것은 로마의 씨였습니다--분열시키고 정복하는 것은. 로마의 철 이빨은 찢고 삼켰습니다. 로마가 찢고 삼킨 나라는 다시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로마가 카르타고를 멸망시키고 바다 속에 매장시켰던 것처럼. 그 동일한 철 씨는 거짓 교회로 일어났을 때 그 안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책도 동일하게 남아 있습니다--분열시키고 정복하는 정책. 그것이 니골라당주의인데 하나님은 그것을 싫어하십니다.

그런데 이 잘못이 교회 내로 침투되자, 사람들은 주교 직분을 두고 경쟁하기 시작하여 결과적으로 이 직위가 좀 더 교육을 많이 받고 물질적으로 번성하고 정치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주어졌다는 것은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입니다. 인간의 지식과 프로그램이 신성한 지혜의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고 성령은 더이상 지배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정말로 비극적인 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중요한 것은 요소들과 형식이기 때문에 교회 내에서 말씀이나 의식을 집도하는 것은 더 이상 투명한 그리스도인의 성품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주교들은 주장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악한 자들(미혹하는 자들)로 양떼를 빌리도록 허락했습니다.

주교들을 성경에서 승인하지 않는 자리로 승진시키는 인간이 만든 교리를 가지고, 그 다음 단계는 종교적인 계층 제도로 세우는 단계별 직함을 수여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곧이어 주교들 위에 대주교가 대주교 위에 추기경이 그리고 바니퍼스 3세 때에는 그 모든 것 위에 교황이, 한 교황이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니골라당의 교리와 그리스도교의 바벨론 주의의 혼합으로 생긴 순수한 결과는 에스겔이 8:10에서 보았던 것이어야 했습니다. "내가 들어가 보니 각양 곤충과 가증한 짐승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우상을 그 사면 벽에 그렸고." 계시록 18:2,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그런데 이 니골라당 교리, 교회 내에 세워진 이 규칙은(Eng.p. 200) 많은 사람들에게는 잘 통하지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떤 경건한 사람에 의해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상한 서신이나 글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교회가 어떻게 했죠? 의로운 교사들을 파문했고 두루마리들을 불태워 버렸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읽고 이해하려면 특별한 교육이 필요합니다. 아니 왜 베드로도 바울이 적은 많은 것들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했잖습니까."하고 말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말씀을 빼앗고 나자, 곧 사람들은 사제가 하는 말만 듣게 되고 그가 그들에게 시키는 대로 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하나님과 그의 거룩한 말씀이라 불렀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생각과 삶을 차지했고 그들을 포악한 성직자들의 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카톨릭 교회가 사람들의 생활과 생각을 조종한다는 증거를 원하신다면, 데오도시우스 10세의 칙령을 들어보십시오. 데오도시우스의 칙령 제 1호.

이 칙령은 그가 로마 첫번째 교회에게 세례를 받은 직후에 발표되었습니다. "우리 세 황제는 우리 백성들이 성 베드로가 로마인들에게 가르쳤고, 전통으로 충실하게 내려왔으며, 현재 로마의 다마써스 교황과 사도들의 제도를 따라 사도의 거룩함을 가진 알렉산드리아의 베드로 주교에 의해, 그리고 복음의 교훈으로 선포되고 있는 종교를 확고부동하게 고수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다 함께 거룩한 삼위일체 안에서 동등한 권위를 가지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한 신격을 믿읍시다. 우리는 이 믿음의 추종자들은 카톨릭 그리스도인이라 불릴 것을 명하며 우리는 다른 종교를 따르는 모든 지각없는 추종자들은 이단이라는 수치스러운 이름을 붙이고 교회라는 이름을 붙인 비밀 집회소를 금하는 바이다. 그들은 신성한 공의의 정죄뿐 아니라, 우리 정부가 하늘의 지혜로 인도함을 받아서 부과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무거운 형벌을 받을 줄 알아야 한다..."

이 황제가 발표한 열 다섯 가지 형벌 규칙들은 여러 해 동안 전도자들로부터 그들의 종교 행사에 대한 모든 권리를 빼앗았고, 그들을 모든 민간 직책에서 면직시키고, 그들을 벌금과 감금과 추방과 어떤 경우엔 사형으로까지 위협했습니다.

여러분 그거 아십니까? 우리는 오늘날 그 길로 계속 향하고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자기들이 모(母) 교회라고 합니다. 자기를 첫번째 또는 원(元) 교회라고 합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맞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타락하여 죄에 빠진 로마의 원 첫번째 교회였습니다. 그 교회는 처음으로 조직된 교회였습니다. 그녀 안에서는(Eng.p. 201) 니골라당의 행위가 다음에는 교리가 발견되었습니다. 아무도 그 교회가 모 교회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교회는 어머니이고 딸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딸이 한 여자에게서 나옵니다. 붉은 옷을 입은 한 여자는 로마의 일곱 산 위에 앉아 있습니다. 그녀는 음녀이고 딸들을 낳았습니다. 그 딸들은 어미에게서 나와서 다시 조직과 니골라당주의로 돌아간 개신교 교회들입니다. 그 딸 교회들의 이 어미는 음녀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음녀는 자기 혼인 서약에 충실치 않은 여자입니다.  그녀는 하나님에게 결혼했고 그 다음엔 나가서 마귀와 음행하며 그 음행으로 자기와 똑같은 딸들을 낳았습니다. 이 어미와 딸의 연합은 적-말씀, 적-성령 그리고 결과적으로 적그리스도입니다. 네, 적그리스도입니다.

자 제가 너무 멀리 나가기 전에 저는 이 초기 주교들은 자기들이 말씀 위에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자기 죄를 고백하면 그들의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절대로 사실이 아닙니다. 그들은 2 세기에는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중생세례를 실행했습니다. 사람들이 오늘날 혼동한 상태에 있는 것도 당연합니다. 만약 그들이, 오순절 날과 그렇게 가까운데, 그때에도 그렇게 혼동한 상태였다면, 최초의 진리로부터 약 2,000년이 흐른 지금은 가장 처참한 상태에 있습니다.

오, 하나님의 교회여, 한 가지 희망밖엔 없습니다. 말씀으로 돌아 오셔서 말씀과 함께 계십시오.


발람의 교리


계시록 2:14, "거기 네게 발람의 교리를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그런데 여러분이 교회 내에 니골라당의 체제를 세워 두고서, 이 다른 교리는 들어오지 못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여러분이 경배의 수단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움직이심을 멀리한다면(나를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라) 그러면 여러분은 사람들에게 대용물로서 다른 경배 형태를 대용물로 주어야 할 것이며, 이런 대용으로 인하여 발람주의를 주입합니다.

신약에서 발람의 교리가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돌아가서 구약 교회에서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보고(Eng.p. 202) 그것을 이 세번째 시대에 적용시키고 그리고나서 그것을 현재로 끌어와야 할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민수기 22장부터 25장까지에서 발견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임을 압니다. 그들은 그들 시대의 오순절교인이었습니다. 그들은 피 아래로 피했고, 모두 다 홍해에서 침례를 받았고 성령으로 노래하고 여선지 미리암이 소고를 치는 동안, 성령의 에너지를 받고 춤을 추며 홍해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여행하다가 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압에 이르렀습니다. 여러분 모압이 누구였는지 아시죠. 모압은 롯의 딸 하나가 낳은 아들이었고,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모압은 친척이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그 점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모압인들은 진리를 알았는데, 그들이 그것에 맞추어 살고 있는지 아닌지를.

그래서 이스라엘은 모압 땅 경계에 이르렀고 왕에게 사자를 보내 말했습니다, "우리는 형제입니다. 우리로 당신네 땅을 지나게 허락하소서. 우리 백성이나 우리 동물이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기꺼이 값을 내겠습니다." 그러나 발락왕은 매우 흥분한 상태였습니다. 그 니골라당 무리의 그 우두머리는 이적과 기사와 성령의 다양한 표명들을 보이고, 얼굴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을 내는 교회가 통과하는 것을 허락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위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가 자기 무리 중 몇 사람을 잃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래서 발락은 이스라엘의 통과를 거절했습니다. 사실, 발락은 그들을 너무나 심히 두려워한 나머지 고용한 선지자 발람에게 가서 자기와 하나님 사이에 중보를 해달라고, 전능하신 이가 이스라엘을 저주하여 그들로 무력하게 해달라고 간구하도록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발람은 정치적인 일들에 참여하기를 간절히 원하고 위대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여 그렇게 하기로 기꺼이 응했습니다. 그러나 접근해야 할 대상을 보고는, 자기가 그 일을 혼자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그 백성들을 저주하신다는 말씀을 받기 위해서, 그는 가라는 하나님의 허락을 받을 수 있을지 하나님께 가서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오늘날 우리와 함께 있는 니골라당과 똑같지 않습니까? 자기 식대로 하지 않는 사람은 다 저주합니다.

발람이 하나님께 가도 되는지 물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거절하셨습니다. 세상에, 그것은 찔렀습니다! 그러나 발락은 그에게 더 많은 보상과 영광을 약속하면서 고집했습니다. 그래서 발람은 다시 하나님께 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한 번 하신 대답으로 충분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가 강한 발람에게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발람의 완고함을 보시고, 그에게 일어나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재빨리 나귀에 안장을 얹고 떠났습니다. 그는 이것이 오로지 하나님의 허용된 뜻임과 스무 번 가서 스무 번 시도한다 해도 그들을 저주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았어야 했습니다.(Eng.p. 203) 오늘날 사람들은 얼마나 발람과 같은지 모릅니다! 그들은 세 하나님을 믿고 이름 대신에 세 개의 직함으로 세례를 받고, 하지만 하나님께선 발람에게 하셨듯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보낼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계속해서 자기들이 정말로 옳다고 믿을 것인데, 그들은 실제로 완전히 발람인들입니다. 아시겠죠, 발람의 교리. 아뭏든 그대로 하십시오. 여러분 식대로 하십시오. 그들은, "어,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축복하셨습니다. 그것은 틀림없이 괜찮을 겁니다."하고 말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축복하셨음을 압니다. 저는 그걸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발람이 취했던 동일한 조직적인 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항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짓된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발람은 급히 길을 내려갔는데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가 길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러나 그 선지자는 (주교, 추기경, 의장, 회장, 그리고 총감독) 영예와 영광과 돈에 대한 생각으로 영적인 것에 너무나 눈이 멀어서 칼을 빼들고 서 있는 천사를 볼 수 없었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미친 선지자를 가로막기 위해 서 있었습니다. 그 작은 나귀는 천사를 보고 이리 저리 피하다가 마침내는 발람의 발이 돌벽에 부딪히게 했습니다. 나귀는 멈추어서 나아가지 않으려 했습니다.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발람은 뛰어내려 나귀를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나귀가 발람에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귀에게 방언으로 말하게 하셨습니다. 그 나귀는 잡종이 아니었습니다, 그 나귀는 원 종자였습니다. 그 나귀는 눈 먼 선지자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당신의 나귀가 아닙니까, 그리고 내가 당신을 충성스럽게 태우고 다니지 않았던가요?" 발람이 대답했습니다, "그래, 맞다, 너는 내 당나귀이고 너는 지금까지 나를 충성스럽게 태우고 다녔다. 그런데 너를 가게 할 수 없다면 난 널 죽이겠다...와! 이게 뭐지, 내가 나귀에게 말을 하고 있다니? 그것 참 이상하구나, 저 나귀가 말하는 것을 들었고 나는 나귀에게 대답을 한 것 같은데."

하나님은 언제나 방언으로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벨사살의 잔치에서 그 다음에는 오순절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그 일을 다시 하시고 계십니다. 그것은 다가오는 심판에 대한 경고입니다.

나중에 그 천사가 발람에게 보이게 되었습니다. 천사는 발람에게 나귀가 아니었더라면 하나님을 시험한 죄로 지금 죽었으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발람이 돌아가겠다고 약속하자, 천사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말씀만 말하라는 충고를 하고 앞으로 보냈습니다.

그래서 발람은 내려가서 깨끗한 희생 제물 짐승들을 위해 일곱 단을 세우게 했습니다. 그는 메시야의 오실 것을 의미하는 수양을 죽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접근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기계는 올바로 가지고 있었지만 동력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그 니골라당을 보실 수 없습니까? 이스라엘이 거기 골짜기에서 똑같은 제물을 드리며, 똑같은 일을 하고 있었는데 오직 한 쪽만이 표적이 따랐습니다. 오로지 하나만이 그들 가운데 하나님을 모시고 있었습니다.(Eng.p. 204) 형식은 여러분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표명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니케아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교리가 아닌 발람의 교리를 믿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들은 죽은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희생 제물이 바쳐진 뒤에, 발람은 예언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혀를 꼭 묶었기 때문에 그들을 저주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들을 축복했습니다.

발락은 매우 화가 났습니다. 하지만 발람은 그 예언에 대해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성령에 의해서 말해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발락은 발람에게 아래로, 골짜기로 내려가 그가 그들을 저주할 수 있는 길이 있을 지 보기 위해 그들의 뒷부분을 보라고 했습니다. 발락이 사용했던 그 수법은 오늘날 그들이 사용하는 술수와 동일한 것입니다. 커다란 교파들은 작은 무리들을 멸시하고, 추문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그들에게서 발견한 것을 들춰내어 소리를 높입니다. 현대인들이 죄를 지으며 살면 아무도 그것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택함을 받은 자 중 한 사람이 문제에 빠지면 모든 신문이 그것을 전국에다 퍼뜨립니다. 네, 이스라엘은 뒷(육적인) 부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칭찬을 받기에 부적합한 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불완전에도 불구하고, 행위로가 아니라 은혜로 되는 택하심을 따라 역사하는 하나님의 계획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낮에는 구름, 밤에는 불기둥을 가지고 있었고, 친 바위와 불뱀과 표적과 기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입증을 받았습니다--그들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은 그들의 철학박사, 법학박사, 신학박사 학위와 그들의 온갖 훌륭한 조직과 사람이 자랑하는 최상의 것을 가진 그 니골라당을 조금도 존중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귀히 보셨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은 그들 가운데 입증받은 말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이스라엘은 겉보기에는 세련되어 보이지 않았습니다, 방금 애굽을 황급히 도망치듯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어쨌든 축복받은 백성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약 300년이 넘는 해 동안 안 일이라곤 양 치는 일과 들일을 하는 것과 이집트인들 밑에서 죽음을 두려워 하면서 노예 생활을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은 자유로왔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주권을 통해 축복받은 백성이었습니다. 물론 모압은 이스라엘을 업신여겼습니다. 다른 나라들도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조직은 언제나 조직되지 않은 것을 멸시하고 단호히 그들을 조직에 끌어들이거나 오지 않으려 하면 멸해 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저에게 이렇게 물을 지도 모릅니다, "브래넘형제, 어째서 이스라엘은 조직되지 않았는데 모압은 조직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생각을 어디서 얻어냈습니까?" 저는 바로 여기 성경에서 얻어냈습니다.(Eng.p. 205) 그것은 모두 다 여기에 예표로 나와 있습니다. 구약에서 이야기 형식으로 적혀 있는 모든 것은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배울 수 있도록 우리를 권고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여기 민수기 23:9에 있습니다,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처할 것이라 그를 열방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바로 그겁니다. 하나님은 바위 꼭대기 위에서 내려다 보십니다, 그들의 단점을 찾아 그들을 정죄하면서 골짜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그들을 보기 원하시는 식으로 그들을 보십니다--사랑과 자비의 꼭대기에서. 그들은 홀로 거했고 조직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왕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선지자 한 사람이 있었고, 그 선지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기 안에 하나님을 모시고 있었고, 말씀이 그 선지자에게 왔고 그 말씀은 사람들에게 갔습니다. 그들은 유엔(U.N.)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세계 교회 협의회(WCC)에, 침례교들에, 장로교들에, 하나님의 성회나 다른 어떤 무리에게 속하지 않았습니다. 속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 연합되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협의회로부터 상담을 필요로 하지도 않았습니다--그들은 그들 가운데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니라"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발람이 하나님께로의 올바른 접근과 특별한 능력의 부여 수단으로 주님으로부터 계시를 가질 수 있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거짓 무리들 속에 있는 주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발락의 호의를 얻기 위해서 무엇을 했죠? 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죽음으로 다루시도록 강요당하는 계획을 한 가지 짰습니다. 마치 사단이 자기가 이브를 미혹할 수 (그녀를 육적인 죄에 빠지도록) 있다는 것을 알고, 그래서 하나님으로 그의 죄에 대해 선언된 죽음의 형을 단행하도록 만들었던 것처럼, 발람도 그가 이스라엘로 죄를 짓도록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죽음으로 다루셔야 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발람은 그들이 와서 죄에 참여하도록 하는 방법을 계획했습니다. 그는 바알 브올의 잔치에 오라는 초청을 보냈습니다(와서 우리와 함께 경배합시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아무 의심없이, 이집트인들의 잔치를 보았었으므로 가서 구경하고 어쩌면 사람들과 함께 먹는 것은 그리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교제를 나누는게 뭐 그리 잘못인가? 우리는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했잖아요, 안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그들을 사로잡을 수가 있겠어요?) 다정하게 대하는 것은 결코 아무도 다치게 하지 않는다--그렇게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성적인 모압 여인들이 춤을 추기 시작했고 락큰롤과 트위스트를 하면서 빙빙 돌며 옷을 벗기 시작하자, 이스라엘 사람들 안에서 정욕이 일어났고 그들은 간음을 저지르기에 이르렀고 하나님은 분노하사 사만 이천 명을 죽이셨습니다.(Eng.p. 206)

그것이 바로 콘스탄틴대제와 그의 후계자들이 니케아에서 그리고 니케아 이후에 행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집회에 초대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앉아서 먹을 때, 일어나서 놀았습니다(교회 형식과 행사들과 그리스도인의 의식을 따라 이름을 붙인 이교도의 잔치들을 참석하면서) 교회는 덫에 걸렸습니다, 교회는 음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가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등을 돌리고 성령을 받는 대신에 교회에 가입하면, 그 사람은 죽습니다. 죽는 겁니다! 그것이 그의 상태입니다. 교회에 가입하지 마십시오. 조직 속에 들어가 말씀과 성령을 대신하는 신조들과 전통 혹은 어떤 것도 취하지 마십시오 안 그러면 여러분은 죽습니다. 모든 게  끝장입니다. 여러분은 죽습니다. 영원히 하나님으로부터 격리됩니다!

그 일이 매 시대마다 생긴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구원해 내십니다. 그들은 피로 말미암아 나와, 말씀으로 성화되고, 침례의 물을 헤치고 걸어나와 성령으로 충만됩니다. 그러나 잠시 후엔 처음 사랑이 식어 누군가가 그들이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들의 이름을 내기 위해서는 조직을 만들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세대에서 곧장 자신들의 조직을 만드는데 어떨 때는 그보다 더 전에 만듭니다. 그들은 더이상 하나님의 영을 가지고 있지 않고 예배의 형식만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죽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신조와 형식으로 잡종을 만들었고 그들 안에는 생명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발람은 이스라엘로 행음하게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육적인 음행이 조직된 종교 안에 있는 영과 동일한 영임을 아셨습니까? 저는 음행의 영은 조직의 영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행음자들은 모두 다 불못에 자리를 가질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조직에 대해서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네, 맞습니다, 음녀와 음녀의 딸들은 불못에 있을 것입니다.

종파들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전에도 그렇지 않았고 앞으로도 결코 속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성직 계급과 평신도로 분리시키는 잘못된 영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러므로, 사람들로부터 사람들을 분리시키는 잘못된 영입니다. 그것이 바로 조직과 교파들이 하는 일입니다. 조직을 만들면서 그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분리시키고 영적 간음을 행케 만듭니다.

그런데 콘스탄틴대제가 사람들에게 특별한 잔치를 베풀었음을 보십시오. 그 잔치들은 교회에서 취한 새 이름을 가진 옛날 이교도의 잔치였습니다, 또 어떤 때에는 그리스도인의 의식들을 취해 이교도의 형식들과 섞어버렸습니다. 그는 태양(sun)신 경배를 하나님의 아들(son)로 바꾸었습니다. 대개 태양신에게 드리는 잔치를 축하하곤 하던 12월 21일 대신에, (Eng.p. 207) 그들은 12월 25일로 하나님의 아들의 탄생일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12월에가 아니라 생명이 싹트는 4월에 태어나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스다롯에게 드리는 잔치를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축하하게 되어 있는 부활절 행사라고 불렀습니다. 사실 그것은 아스다롯에게 드리는 이교도의 잔치였습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 제단을 설치했습니다. 우상들도 들여놓았습니다. 그들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도 없는 사도신경이라 부르는 것을 사람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조상을 숭배하도록 가르쳤고 그것으로 로마 카톨릭 교회를 세상에서 가장 영적인 교회로 만들었습니다. 모든 가증한 새가 그 새장 안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개신교들도 조직들을 통해 동일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었다. 그런데 저는 이것이 정말로 그들이 실제로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었다라는 의미라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예루살렘 공회가 그런 것에 반대하여 말했다 할지라도 바울은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면서 그것에 대해 그리 중요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단지 양심의 문제였을 뿐인데 믿음이 약한 형제에게 걸림이 될 때에는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게다가 이것들은 이방인 교회들이기 때문에 이 계시는 유대인들이 아닌 이방인들과 관계된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제가 다음의 주님의 말씀을 보는 것과 똑같은 견해로 보고 있습니다. 주님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여러분은 먹는 행위가 실제로 영적인 의미에서 참예함임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우상에게 절하고, 촛불을 켜고, 이교도의 명절을 사용하며, 사람들에게 자기들의 죄를 고백할(그것들은 다 마귀의 종교에 속합니다) 때, 그들은 마귀에게 참예한 자이지 주님에게 속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인정하든 하지 않든지간에, 우상 숭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단과 향은 주님의 기도를 상기시키는 것일 뿐이라든지, 그들이 그것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든지 자기들이 말하고 싶은대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우상 앞에서 기도할 때, 그것은 오로지 강조를 위한 것일 뿐이고, 그들이 신부에게 고해 성사를 할 때, 그것은 정말로 그들 마음 속으로는 하나님께 하는 것이며, 신부님이 그들을 용서해주면. 그것은 다만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지만, 잘 알려진 바벨론의, 사탄의 종교에 참예했고, 우상에게 연합하여 죽음을 의미하는 영적인 간음을 행했습니다. 그들은 죽었습니다.(Eng.p. 208)

그래서 교회와 정부는 결혼했습니다. 교회는 우상과 연합했습니다. 배후에 정부의 권력을 둔 그들은 이제, "주님 나라가 임했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위에 이루어졌다"고 느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가 주 예수님의 돌아오심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들은 천년왕국주의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지금 여기에서 천년왕국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 말에 의하면 하나님이 오시면, 그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준비된 때여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틀렸습니다. 그 교황은 거짓 교회의 우두머리입니다. 천년왕국이 올 것인데, 그것이 진행되는 동안 그는 천년왕국 안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어딘가에 있을 것입니다.


경  고


계시록 2:16,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그가 무슨 다른 말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주의 이름을 헛되이 지니고 있는 사람들의 죄를 하나님이 간과하실 수 있겠습니까? 죄의 시각에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길은 단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회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고백하십시오. 죄 사함과 하나님의 영을 받고자 하나님 앞에 나오십시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불순종은 죽음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내가 내 입의 검으로 너와 싸우리라,"하셨기 때문입니다. 짐승은 성도들에게 싸움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짐승과 싸우실 것입니다. 말씀에 싸움을 건 사람들은 언젠가는 말씀이 그들에게 싸움을 거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제하거나 말씀에 더하는 것은 심각한 일입니다. 그것을 바꾸거나 그것을 자기들에게 맞도록 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종말이 죽음과 멸망말고 뭐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아직도, "회개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오, 회개에 대한 생각은 얼마나 달콤한 지. 빈 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드네. 저는 제 슬픔을 가지고 옵니다. 현재의 제 모습과 제가 행한 일들에 대해 회개합니다. 이제 그것은 피라네, 예수의 피 밖에 없네. 그게 뭐가 되겠습니까? 회개냐 아니면 죽음의 검이냐? 그것은 여러분에게 달렸습니다.


상  급


계시록 2: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Eng.p. 209)

각 시대에 주는 각 메시지는 신자들에게 자극적인 동기를 주면서 그에게 극복하는 자가 되어 주님에게 상을 받으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성령은 감춰진 만나와 흰 돌 안에 적혀진 새 이름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메시지들은 각각 `천사'(사자인 인간)에게 지시되는데--놀라운 특권뿐 아니라 아주 커다란 책임도 그의 몫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열 두 사도에게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는 약속을 주신 경우처럼, 특별한 약속을 하십니다. 그리고나서, 바울은 특별한 약속을 받았음을 기억하십시오: 그의 시대의 신부된 사람들을 예수님께 드리는 것, 고린도후서 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의 시간과 그의 시대의 말씀에 충실한 모든 사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에게 주어진 것과 동일한 특별 보상일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 대부분이 제가 너무나 여러 번 하나님께 실수를 많이 저질렀기 때문에 주님을 만났을 때 주님이 저를 기뻐하지 않으실까 봐서 항상 죽기가 겁난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시리라고 믿습니다. 글쎄, 저는 어느 날 아침 침대에 누워서 그것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제가 아주 독특한 환상 속으로 들어 올려졌습니다. 저는 그것이 독특했다고 말하는데 이유는  환상을 수천 번 가졌지만 한 번도 제 몸을 떠난 적은 없었던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거기로 들려 올려졌고, 아내를 돌아 보았고, 제 몸이 아내 옆에 누워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나서 저는 지금껏 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에 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낙원이었습니다. 저는 지금껏 본 중에 가장 아름답고 가장 행복해 하는 사람들 무리 무리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다 정말로 젊어 보였습니다. 열 여덟에서 스물 한 살 가량 되보였습니다. 그들에게는 흰 머리나 주름이나 어떤 기형도 없었습니다. 젊은 여자들은 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가지고 있었고, 젊은 남자들은 너무도 건강하고 튼튼했습니다. 오, 그들은 절 얼마나 환영했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절 부둥켜 안았고 절 사랑하는 형제라고 불렀고, 계속 그들이 저를 보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그 사람들이 누군지 몰라 궁금해 하고 있었을 때, 제 옆에 있던 분이, "그들은 당신의 사람들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너무도 놀라, "이 사람들이 모두 다 브래넘 집안 사람들이라고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아니, 그들은 당신이 개심시킨 자들입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나서 그는 한 여자분을 가리키고, "잠시 전 당신이 경탄해 하던 저 젊은 여자를 보십시오. 그녀는 당신이 그녀를 주님께 인도했을 때 구십 세였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오 이런, 내가 이것을 두려워했으니."하고 말했습니다.

그 남자는, "우리는 주님이 오실 것을 기다리면서 여기서 쉬고 있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Eng.p. 210)

저는, "저는 주님을 뵙고 싶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는, "아직은 주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곧 오실 것입니다. 그가 오시면 먼저 당신에게 갈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이 설교한 복음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고, 우리는 당신의 백성들이 될 것입니다."했습니다.

저는, "제가 이 사람들 모두를 책임져야 한다는 말씀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모두 다. 당신은 지도자로 태어났으니까요."하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모두 책임이 있다구요? 바울 성도는 어떻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제게, "그는 그의 시대에 대하여 책임을 질 것입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럼, 저는 바울이 전한 동일한 복음을 전했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무리들이, "우리는 그걸 믿고 있습니다."하고 외쳤습니다.

네, 저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지워주신 책임을 충실하게 이행한 그의 사람들에게 특별한 보상을 주시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그 시대를 위한 말씀의 계시를 받았고 충실하게 그들의 시대에 전파했고, 전파한 것을 그대로 실천하며 살았다면, 그들은 커다란 상을 받을 것입니다.

이 생각을 마음 속에 새기면서, 그 절을 다시 봅시다. "내가 그에게 감추었던 만나를 주리라." 우리는 모두 만나는 천사의 양식이라는 걸 압니다. 만나는 이스라엘이 방랑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풀 위에 내려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완벽한 양식이었습니다. 어떻게 그 조그마한 동그란 양식이 그들의 건강을 완벽하게 유지시켜 주었는지 놀랍습니다. 아무도 아프지 않았습니다. 만나는 그들이 필요한 전부였습니다. 언약궤가 만들어졌을 때 그들은 그 안에다 그 만나를 조금 넣었습니다. 그리고나서 그 궤는 휘장 안에 놓여졌고 대제사장만이 그것에 감히 접근하는데 희생 제물의 피를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했습니다. 만나로 상징된 하늘로부터 내려온 떡은, 어느 날 하늘에서 내려와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을 위한 생명이 되셨습니다. 그는, "나는 생명의 떡이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니,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떠나시면서 그는 우리에게 말씀을 남겨 두고 가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그의 말씀은 떡이었습니다. 그것은 완벽한 만나였고, 그것으로 사는 사람은 결코 죽지 않을 만나였습니다. 그러나 열조들이 죽은 직후에는, 아무도 정확한 진리를 모르는 것 같더니 잠시 후에 이 만나는 사람들에게 감춰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계시록 10:7에 의하면 이 마지막 때까지 감춰져 있던 것을 계시로 하나님께서 돌려주기 시작하는 그 시대에는, 한 선지자가 와서 모든 비밀들을 나타낼 것이고 그 다음에 주님이 오실 것입니다. 그런데 각 시대에, 제가 말씀드리겠는데, 사자들은 감춰져 있던 진리를 받았습니다.(Eng.p. 211) 그러나 사자들은 자기들 자신만을 위해서 그것을 받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무리들에게 떡과 물고기를 나눠주라고 부탁받았던 때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음식을 떼어 주셨고, 이제 제자들이 그것을 사람들에게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긴 자에게 그의 감춰져 있던 만나를 주십니다. 달리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계시된 것을 거절한 사람들에게 그의 보물을 열어주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으로부터 오순절의 원래 진리의 일부를 받은 각 시대의 사자들에 대해서 말한 것은 구약에서 모세가 만나 한 오멜을 금 항아리에 넣어 지성소 휘장 뒤에 두라는 명을 받았던 것으로 예표되어 있습니다. 거기로 매 세대의 대제사장은 희생 제물의 피를 들고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때 대제사장은 이 만나를 조금(그것은 썩지 않았기 때문에) 즉 원 만나의 일부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매 시대마다 주님의 사자는 그 시대에 그 특정한 기간을 위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일단 그 사자가 진리의 빛으로 깨이고 나면, 그는 그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합니다. 그래서 성령이 열어주신 귀 있는 자들은 그 진리를 듣고, 그것을 믿고, 그것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춰진 만나를 미래에 참여할 수 있다는 생각도 있습니다. 저는 그것은 다가오는 영원한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영원히 참여하는 것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달리 어떻게 우리가 그의 존재의 측량할 수 없는 풍요를 알기 시작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간절히 알기 원하는 모든 것, 우리의 답변을 받지 못한 모든 질문들, 계시될 모든 것을.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우리는 그것을 받을 것입니다. 오, 때때로 우리는 우리가 이 아래 여기서 주님과 그의 말씀을 조금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너무나 좋고, 우리를 기쁘게 하는데, 어느 날 우리 육신이 변할 때 그 말씀과 주님은 우리가 결코 상상도 못했던 것이 될 것입니다.

또한 여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이긴 자에게 흰 돌을 주실텐데 그 돌 안에(위에가 아니라) 새 이름이 있는데 받는 자만이 알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새 이름이라는 개념은 우리에게 익숙한 것입니다. 아브람은 아브라함으로 바뀌었고, 사래는 사라로, 야곱은 이스라엘로, 시몬은 베드로로, 그리고 사울은 바울로 바뀌었습니다. 이 이름들은 변화를 일으켰거나 변화를 위해서 주어졌습니다. 아브람과 사래는 주님이 이름을 바꿔주신 후에야 장차 올 아들을 받을 준비가 되었습니다. 야곱의 경우, 그는 이겨야 했고 그리고나서 그는 하나님과 겨룬 자라고 불리웠습니다. 시몬과 사울의 경우, 그들이 주님을 영접했을 때, 그들에게 변화가 왔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진정한 신자인 우리 각자도 이름의 변화를 가졌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Eng.p. 212) 그것은 우리 모두가 공동 소유하는 이름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엔가 우리는 또다른 변화를 겪을 것인데, 우리는 분명히 새 이름을 받을 것입니다. 그 이름은 창세 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우리의 진짜 원 이름일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그 이름을 아시지만 우리는 모릅니다. 어느 날 그의 선하신 뜻 가운데, 우리도 역시 알 것입니다.

흰 돌.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여기에 하나님의 손에서 지상에서의 시련에 대한 보상을 받는 성도를 묘사하는 다른 장면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콘스탄틴 대제 이후에, 거짓 교회는 국고에 손을 집어 넣을 수 있게 되었고 그럼으로 인해 아름다운 신상이 가득한 아름다운 건물을 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조각상들은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졌고, 실제로는 성도들의 이름을 딴 로마 우상들이었습니다. 교회들과 그들이 꾸며놓은 장식은 오늘날 우리도 보는 것처럼 굉장히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하나님은 어떤 작은 가정이나 동굴이나 거짓 교회 교인들로부터 숨어지내는 거친 산 속에서 그의 성도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들은 아름다운 건물도 가운을 입은 성가대도, 좋은 옷도, 다른 세상적인 눈길을 끄는 것들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모든 시대들의 진실한 신자들에게 하신 이 특별한 약속에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참으로 아름답고 영원히 지속되는 상을 주시겠노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멸시하도록 놔 두십시오. 그들로 교회에 거금을 주고 교회는 그 보답으로 모든 사람들이 칭찬하도록 훤히 잘 보이는 곳에 대리석 상패나 그들을 칭송하는 어떤 조각상을 세움으로써 그 기부자를 존중하도록 내버려 두십시오. 어느 날엔가 모든 것을 보시고 아시는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자기 전부를 내놓은, 비록 그게 두 렙돈이라 하더라도, 그 과부를 칭찬하실 것이고, 하나님이 직접 하늘의 보화로 상을 주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춰진 만나와 흰 돌 안에 있는 새 이름. 우리에게 그렇게 훌륭하게 상을 주시는 주님은 얼마나 선하신 분이고, 우리는 얼마나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까. 오, 저는 어느 때든지 주님의 뜻을 행하고 하늘에 보화를 쌓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