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교회시대]일곱 교회 시대 강해 9 라오디게아 교회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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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Chapter 9 - The Laodicean Church Age

CAB - 09


윌리엄 매리언 브래넘


‘일곱째 천사의 음성….’ 계시록 10:7






라오디게아 교회 시대

일곱 교회 시대 강해

제 9 장

소 개


윌리엄 브래넘의 놀라운 사역은 말라기 4:5,6, 누가복음 17:30, 그리고 계시록 10:7 말씀에서 예언된 일들에 대하여 성령께서 응답하신 것이었습니다. 이 세계적인 사역은 많은 다른 성경 예언들이 절정에 달한 것이었고,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으로 지속적으로 역사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 언급된 이 사역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케 하는 사역이었습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면서 이 메시지를 읽을 동안 인쇄된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에 쓰이기를 우리는 기도합니다. 정확하면서도 축약하지 않은 번역을 제공하고자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영어 오디오 파일들이 브래넘 형제가 하신 영어 설교를 가장 잘 대표할 것입니다. 윌리엄 브래넘이 설교한 1,100여개의 설교들은 여러 언어로 통역과 번역이 되어 있으므로,   www.messagehub.info 에서 무료로 다운로드하고 인쇄할 수 있습니다.  더 자세히 알고자 하시면 이메일로 연락하시기 바랍니다. 이메일: biblechurch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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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  장


라오디게아 교회 시대

(THE  LAODICEAN  CHURCH  AGE)


계시록 3:14-22



라오디게아 교회의 천사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라오디게아 도성


 사람들의 권리들 을 의미하는 라오디게아는 아주 흔한 이름이었고 귀부인들에게 경의를 표하려고 여러 성에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이 성은 소 아시아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중요하고 경제적으로 번성한 곳 중 하나였습니다. 막대한 양의 재산이 유력한 시민들의 유언으로 이 도시에 기증되었습니다. 라오디게아에는  훌륭한 의학 학교가 하나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예술과 학문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주변에 있는 스물 다섯 개 도시의 군 소재지였으므로 종종  메트로폴리스 라고 불리우기도 했습니다. 이곳에서 숭배한 이방신은 제우스였습니다. 사실 이 성은 한때 그들의 신을 기리는 뜻에서 디오폴리스(제우스의 도시)라고 불리기도 했었습니다. 4세기에는 한 중요한 교회 회의가 여기서 개최되었습니다. 잦은 지진으로 마침내 이 도시는 완전히 버려진 곳이 되었습니다.

이 마지막 시대의 특징이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시대를 대표한다는 건 얼마나 적합한 사실입니까. 예를 들어서, 그들은 한 신, 제우스를 숭배했는데(Eng.p. 320) 제우스는 최고의 신이며 신들의 아비였습니다. 이 사실은 인류의 형제애를 제시하는, 지금 현재 한 가지 상호적인 예배 형태가 우리의 사랑과 이해와 서로에 대한 관심을 증가시킬 것이라는 의도를 가지고 개신교들, 구교들, 유대인들, 힌두교들, 기타등등을 모으고 있는 이십 세기의  우리 모두의 아버지되시는 한 하나님 이라는 종교적 전제를 예고했습니다. 구교들과 개신교들은 지금 현재 무척 애를 쓰고 있고, 다른 모든 이들이 따라올거라는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실제로 연합의 세력을 넓히고 있습니다. 이런 태도는 국제연합기구(UNO)에서도 볼 수 있었는데 세계 정상들은 영적 예배에 대한 어떤 한 가지 개인적인 개념을 인정하는 걸 거부하고 모든 종교가 하나로 평준화되게 하려는 바램에서, 모두 똑같은 목표들을 소원하고, 모두가 똑같은 목적들을 가지고 있고, 모두가 기본적으로 올바르기 때문에, 그런 모든 분리된 개념들을 제거하도록 추천했습니다.

라오디게아라는 이름은,  사람들의 권리들  또는  사람들의 정의 를 뜻함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십 세기 교회 시대같이 모든 국가들이 일어나 사회적 경제적 평등을 주장한 시대가 있었습니까? 이 시대는 이론적으로만 가능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시대입니다. 이 시대는 자신들이 그리스도인 민주당원, 그리스도인 사회주의자, 그리스도인 연방론자, 기타등등, 이라고 부르는 정당들의 시대입니다. 해방신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예수는 사회주의자였으며 초대 교회는 성령의 지도 하에 사회주의를 실행했고, 그래서 오늘날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합니다.

고대인들이 라오디게아를 메트로폴리스라고 부른 것은 우리가 현재 수립하고 있는 하나의 세계 정부를 예견하고 있었습니다.  이 도시에서 큰 교회 회의가 열렸던 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얼마 안 있어 모든  자칭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오늘날 진행중인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모이게 되는 것의 그림자를 봅니다. 정말로, 교회와 정부, 종교와 정치는 연합하고 있는 중입니다. 가라지들은 단으로 묶이고 있는 중입니다. 밀은 곧 곳간에 들어갈 준비가 될 것입니다.

라오디게아는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도시였는데 마침내는 지진으로 망했습니다. 이 시대는 하나님께서 옛 음녀와 음행을 저지른 전 세계를 흔들으심으로써 끝날 것입니다. 세상의 체제가 무너질 뿐만 아니라 지구조차도 흔들리고 그 이후에는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를 위해서 혁신될 것입니다.

라오디게아는 부자들에게 기증을 받아 부유했고 문화의 도시였습니다. 학문이 충일했습니다. 어쩌면 오늘날과 그렇게 똑같습니까. 교회들은 부유합니다. 경배는 아름답고 형식을 차리고 있지만 차갑고 죽은 경배입니다. 문화와 교육이 성령이 주시는 말씀을 대신하고(Eng.p. 321) 믿음은 학문에 뒤져 있어 인간은 물질주의의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모든 면에서 고대 라오디게아는 이십 세기 라오디게아 시대에서 다시 태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들을 귀 있는 자들은 그녀의 죄와 다가오는 심판에 참예하지 않기 위해서 거기에서 나오기를 바랍니다.


라오디게아 시대


라오디게아 시대는 이십 세기의 전환점 부근에, 1906년경에 시작되었습니다. 이 시대가 얼마나 지속될까요? 한 가지도 어김이 없었던 수 없는 환상을 받았던 하나님의 종으로서, 저는 예고하겠는데(예언하는게 아니라 예고하는 겁니다) 이 시대는 1977년 경에 끝날 것입니다. 여기에 개인적인 기록을 언급해도 괜찮다면, 저는 1933년 6월 어느 일요일 아침에 제게 온 일곱 가지 연속된 주요 환상에 기초하여 이 예고를 합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게 주의 강림이 가까와지고 있다고 말씀하셨고, 그가 오시기 전에, 일곱 주요 사건들이 발생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것들을 다 적었고 그 날 아침에 주님의 계시를 전했습니다. 첫번째 환상은 뭇솔리니가 이디오피아를 침공하겠고 그 나라는  그의 발 앞에 무너지리라 는 환상이었습니다. 그 환상은 정말로 많은 반발을 야기시켰는데, 어떤 사람들은 제가 그것을 말했을 때 화를 내며 그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그대로 일어났습니다. 뭇솔리니는 현대적인 무기들을 사용하며 침입해 들어가 장악했습니다. 원주민들은 싸울 기회도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환상은 또 뭇솔리니는 자기 국민들에게 배척당해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리라고 말했습니다. 그것도 말해진 그대로 일어났습니다.

그 다음 환상은 아돌프 히틀러라는 이름의 오스트리아인이 독일의 독재자로 일어나겠고 그가 전 세계를 전쟁으로 끌어들일 것을 예고했습니다. 그 환상은 지그프리트 라인을 보여주었고 우리 군대는 그것을 정복하느라 힘이 들 것임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나서 그 환상은 히틀러가 의혹스런 최후를 맞이할 것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세번째 환상은 세계 정치의 영역에 드는 것인데 그것은 제게 세 위대한 주의가 즉 파시즘, 나치주의, 공산주의가 일어나겠고, 첫번째 두 주의가 세번째 주의에게 먹힐 것을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음성은  러시아를 지켜 보아라, 러시아를 지켜 보아라. 북방 왕을 눈여겨 보라, 고 권고했습니다.

네번째 환상은 이차 세계 대전 후에 있을 과학의 혁혁한 진보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 환상에서 멋있는 고속도로를 원격 조정으로 달리는 방탄용 플라스틱 덮개가 있는 차가 맨 마지막에 보였는데, 사람들은 운전대가 없는 이 차에 앉아서 어떤 게임을 하면서 즐기고 있었습니다.(Eng.p. 322)

다섯번째 환상은 우리 시대의 도덕적 문제와, 주로 여자들을 중심으로, 관계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게 여자들이 투표권을 부여받고나서 자기들의 위치를 벗어나기 시작했다고 보여주셨습니다. 그후 여자들은 머리를 잘랐는데, 그것은 더이상 남자의 권위 아래 있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동등권을 주장하거나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는 동등권 이상의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녀는 남자들의 옷을 입기 시작했고 벌거벗은 상태로 나아갔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본 장면은 작은 무화과 잎 모양의 앞치마 하나를 제외하면 다 벗은 한 여자였습니다. 이 환상과 함께 저는 극심한 왜곡과 전세계의 도덕적 곤경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나서 여섯째 환상에서 미국에서 너무도 아름답지만 잔인한 한 여자가 일어났습니다. 그녀는 사람들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미국에서 여성들의 인기 투표에 의해 커다란 권력을 가지고 일어나는 어떤 여자에 대한 환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지만, 이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부상이라고 믿었습니다.

일곱째이자 마지막 환상은 저는 그 환상에서 너무도 무시무시한 폭발소리를 들었습니다. 보려고 몸을 돌렸을 때 미국 땅 전역에는 파편 더미와 분화구와 연기뿐이었습니다.

지난 오십 년 동안 세계를 휩쓴 신속한 변화와 더불어, 이 일곱 가지 환상을 기초로 해서, 저는 예고하는데(예언하는게 아닙니다) 이 환상들은 모두 다 1977년까지는 이루어질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예수께서  아무도 그 날과 그 시간을 알지 못하리라 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무책임한 진술이라고 느끼실지도 모르지만, 저는 그래도 이 예고를 삼십 년 후에라도 주장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강림이 마쳐질 때에 아무도 그 해나 달이나 주를 모르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거듭 말하겠는데, 저는 말씀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주신 영감을 함께 가지고서 1977년은 세계 체제를 종료시키고 천년왕국을 안으로 안내해 자리에 앉히는 때임을 진실로 믿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누구든지 그 환상들 중 어떤 것이 잘못되었다고 증명할 수 있습니까? 그것들이 모두 다 성취되지 않았습니까? 네, 각각의 환상이 성취되었거나 지금 현재 성취되는 중에 있습니다. 뭇솔리니는 이디오피아를 침공하는데 성공했고, 다음엔 넘어져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히틀러는 끝내지 못할 전쟁을 시작했다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공산주의가 다른 두 주의를 장악했습니다. 플라스틱 방탄차는 이미 만들어졌고 더 나은 도로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자들은 벗은거나 다름없는 상태에 있고 지금은 하의만 있는 수영복을 입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저는 어느 잡지에서 제가 환상에서 본 똑같은 옷을(그것을 옷이라 부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보았습니다. 그것은 플라스틱으로된 투명한 형태의 옷이었는데(Eng.p. 323) 양쪽 가슴을 조금 가리고, 아래에 작은 앞치마같이 가린 세 개의 조그만 불투명한 지점을 가진 옷이었습니다. 카톨릭 교회가 부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카톨릭 신자인 대통령을 가졌는데 분명히 또 있을 것입니다. 뭐가 남아 있습니까? 히브리서 12:26밖에는 남지 않았습니다.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가라사대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또 한 번 하나님이 땅을 진동하실텐데 땅과 함께 진동될만한 것은 모두 다 진동시킬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그는 땅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1964년, 지난 3월, 그 금요일날 알라스카에서 일어난 지진은, 그것이 균형에 맞지 않았어도, 전 세계를 진동케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진동시키심으로써 그가 앞으로 더 큰 강도로 행하실 것을 경고하셨던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죄 때문에 저주받은 세상을 폭발시키고 뒤흔들 것입니다. 형제여, 자매여, 그 충격을 견딜 수 있는 곳은 딱 한 군데가 있습니다, 그곳은 주 예수의 양우리안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들에게 아직도 하나님의 자비가 허용되고 있는 동안에 여러분들이, 충실한 목자되사 여러분들을 구원하시고 돌봐주시고 여러분을 넘치는 큰 기쁨과 함께 영광 가운데 흠없게 만드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여러분의 전 생애를 아낌없이 내어 놓으시길 간청하는 바입니다.


사  자


바울이 사자였던 첫째 시대를 제외하고는 어느 시대든지 하나님이 그 시대에 보내주신 사자를 진정으로 알았다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시대에서도 많은 이들은 바울을 사자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매우 짧은 시대일 것입니다. 사건들은 매우 신속하게 발생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라오디게아 시대에 보냄을 받은 사자는 지금 여기에 있어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아직 그를 모르고 있다 해도 말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가 알려지게 될 때가 와야할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우리가 그의 사역을 기술하고 있는 성경 구절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것을 입증할 수 있습니다.

맨 먼저, 그 사자는 선지자일 것입니다. 그는 선지자의 직분을 가질 것입니다. 그는 예언적 사역을 가질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에 굳게 기초를 둘텐데 그 이유는 그가 예언하거나 환상을 가질 때, 그것은 언제나  말씀 중심으로  할 것이고 그것은 언제나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정확성 때문에 선지자로 입증될 것입니다. 그가 선지자라는 증거는 계시록 10:7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일곱째 사자가 소리내는 날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  그런데 이 절에서 킹 제임스 역에서  천사 로 불리는 이 사람은(Eng.p. 324) 하늘에 있는 천사가 아닙니다. 여섯번째 나팔을 부는 천사는 하늘에 속한 존재인데 계시록 9:13에 있고, 그 순열의 일곱째는 계시록 11:15에 있습니다. 여기 계시록 10:7에 나오는 이 천사는 일곱째 시대의 사자이고 한 사람이고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한 메시지를 전할 것이고 그의 메시지와 사역은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의 비밀들을 끝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선지자이기 때문에 이 마지막 사자를 선지자로 다루실 것입니다. 첫째 시대에 바울이 그랬고 마지막 시대도 선지자가 있을 것입니다. 아모스 3:6-7,  성읍에서 나팔을 불게 되고야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시키심이 아니고야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예수의 일곱 우뢰(천둥)이 소리냈던 때는 마지막 때 기간 중이었습니다. 계시록 10:3-4,  사자의 부르짖는 것 같이 큰 소리로 외치니 외칠 때에 일곱 우뢰가 그 소리를 발하더라 일곱 우뢰가 발할 때에 내가 기록하려고 하다가 곧 들으니 하늘에서 소리나서 말하기를 일곱 우뢰가 발한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 하더라.  그 우뢰들 안에 있었던 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계시를 얻기 위해서는 선지자가 필요할 것인데 하나님은 선지자로 하지 않고는 자신의 성경적 계시들을 전할 다른 방법은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항상 선지자에 의해 왔고 항상 그럴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이라는 사실은 성경을 가볍게 훑어보아도 명백해집니다. 불변하는 방법들을 가지고 계신 불변하는 하나님은 변함없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질서를 떠나 어그러진 길로 가는 매 시대마다 그의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신학자들과 사람들이 다 말씀을 떠나 있으면, 하나님은 언제나 잘못된 가르침을 고치고 사람들을 하나님께 돌이켜 인도하기 위해서 이 사람들에게(신학자들에게가 아니고) 그의 종을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곱째 시대의 사자가 오는 것을 보는데, 그는 선지자입니다.

우리는 이 사자가 여기 계시록 10:7에서 오는 것을 볼 뿐만 아니라 말씀이 예수님이 돌아오시기 전에 오는 엘리야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마태복음 17:10에서,  제자들이 묻자와 가로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그러자 예수님은,  엘리야는 정말로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오시기 전에, 엘리야는 교회에서 회복의 일을 하기 위해서 돌아와야만 합니다. 이것은 말라기 4:5-6이 말하는 것입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Eng.p. 325)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엘리야가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돌아와야 함에는 정말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그는 성취해야할 구체적인 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일은 말라기 4:6의 일부입니다,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리라.  우리가 이것이 그때에 그가 해야할 구체적인 일이라는 걸 아는 이유는 그가 엘리야의 사역이 여기 침례 요한 안에 있었을 때,  그가 아비들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리라 고 말하는 부분을 이미 성취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17,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요한의 사역에서  아비들의 마음은 자녀들에게로 돌려졌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압니다. 그러나 성경은 자녀들의 마음이 아비들에게 돌려졌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일어날 일입니다. 마지막 날의 자녀들의 마음은 오순절 아비들에게로 돌려질 것입니다. 요한은 아비들로 예비시켜 예수님이 자녀들을 양우리 안으로 환영하여 맞아들이게 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의 영이 임한 이 선지자는 자녀들을 준비시켜 다시 예수님을 환영하도록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침례 요한을 엘리야라 부르셨습니다. 마태복음 17:1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예수님이 요한을 엘리야라 부른 까닭은 아합 왕의 통치 후 그 영이 엘리사에게 돌아왔던 것과 똑같이 엘리야에게 임했던 그 영이 요한에게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시 한 번 예수님이 오시기 직전에 그 영이 또 다른 사람 위에 돌아올 것입니다. 그는 선지자일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에게 그렇게 입증받는 사람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육신이 되사 그를 입증하기 위해 여기에 계실 수는 없으므로,(요한에게 하셨던 것처럼) 이 선지자의 사역에는 크고도 놀라운 표명이 나타남으로써 성령에 의해 입증될 것입니다. 선지자로서, 모든 계시는 입증을 받을 것인데 왜냐하면 모든 계시는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믿음으로 명할 때 기이한 권능의 역사들이 행해질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사람들을 진리와 하나님의 진정한 능력에 돌이키기 위한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에서 주신 메시지가 전파될 것입니다. 일부는 들을 것이지만 대다수는 형식에 매달려 그를 배척할 것입니다.

이 계시록 10:7의 선지자겸 사자는 말라기 4:5-6과 똑같은 자이므로 그는 자연히 엘리야와 요한을 닮을 것입니다. 두 사람 다 당시의 인정받는 종교 학교와는 거리가 먼 자들이었습니다.(Eng.p. 326) 두 사람은 다 광야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로 받은  주께서 가라사대 를 가졌을 때에만 행동했습니다. 두 사람은 그들 시대의 종교 질서와 지도자들을 질책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부패한 자들 모두를 또는 다른 이들을 부패케 하는 자들을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 두 사람 다 부도덕한 여자들과 그들의 행위들을 심하게 대적하며 예언했습니다. 엘리야는 이세벨을 비난했고 요한은 빌립의 아내인 헤로디아를 꾸짖었습니다.

그는 인기가 없을 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입증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을 인정하셨듯이, 성령이 예수를 인정하셨듯이, 우리는 이 사람이 무엇보다도 그의 삶 가운데서 논박할 수 없고 다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능력의 역사들로 역사하시는 성령에 의해 인정을 받을 것과 예수님께서 요한을 인정하신 것처럼, 돌아오셔서 직접 그를 인정하실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오심을 증거했습니다--그런데 이 사람도 요한처럼 예수님이 오심을 증거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재림 그 자체가 이 사람이 진실로 그의 재림의 예비자였음을 증명할 것입니다. 이것은 이 사람이 정말로 말라기 4장의 선지자라는 마지막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이방인 기간의 끝은 예수님 본인의 나타내심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에는 이 사람을 거절한 사람들에게는 너무 늦어버린 때가 될 것입니다.

이 마지막 날 선지자에 대한 설명을 더욱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특별히 마태복음 11:12의 선지자는 말라기 3:1에서 예고된 자였던 침례 요한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해 봅시다.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마태복음 11:1-11,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 이에 저희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 가시니라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Eng.p. 327)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침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이것은 이미 일어난 일입니다. 이 일은 일어났습니다. 끝났습니다. 그러나 이제 말라기 4:1-6을 잘 보십시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나의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보십시오, 이 엘리야가 온 직후 땅은 불로 깨끗케 될 것이고 악인들은 불타 재가 될 것입니다. 물론, 이 일은 요한(그의 시대를 위한 엘리야)의 때에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말라기 3:1에 나오는 사자(요한)의 오는 것을 예고했던 하나님의 영은 적어도 삼 세기 이전에 예언된 이사야 40:3의 이전번 예언적 진술을 반복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그래서 우리는 이 성경 구절들로부터 말라기 3장에 있는 선지자는(요한), 정말로 요한과 마지막 날의 선지자 두 사람 위에 엘리야에게 임했던 동일한 성령이 임했었다 할지라도, 말라기 4장의 선지자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라기 4장과 계시록 10:7의 이 사자는 두 가지 일을 할 것입니다. 하나: 말라기 4장에 의하면 그는 자녀들의 마음을 아비들에게 돌릴 것입니다. 둘: 그는 일곱 인 안에 들어있는 계시인 계시록 10장에 나오는 일곱 우뢰의 비밀들을 나타낼 것입니다.(Eng.p. 328) 실제로 자녀들의 마음을 오순절 아비들에게로 돌리는 것은 이 하나님이 계시하신  비밀의 진리들 일 것입니다. 분명히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고려해 보십시오. 이 선지자-사자는 성품과 품행이 엘리야와 요한과 똑같을 것입니다. 이 선지자요 사자의 시대의 사람들은 아합 시대와 요한의 시대의 사람들과 똑같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돌려지는 자들은  자녀들 뿐 이므로, 들을 사람들은 자녀들 뿐입니다. 아합의 시대에는 단지 7,000명의 참된 씨인 이스라엘인들이 있었을 뿐입니다. 요한의 시대에도 역시 매우 소수였습니다. 두 시대의 대중들은 우상 숭배로 음행하는 가운데 있었습니다.

저는 한 가지 더 라오디게아 시대의 선지자요 사자와 예수님의 초림에 앞서 왔던 선지자-사자인 요한을 비교하고 싶습니다. 요한의 시대에 사람들은 요한을 메시야로 잘못 알았습니다. 요한복음 1:19-20,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그런데 이 마지막 날의 선지자요 사자는 주님 앞에 너무도 큰 권능을 가지고 있어서 그를 주 예수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마지막 때에는 사람들을 미혹해 이 사실을 믿게 하려는 영이 세상에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24:23-26,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 그러나 여러분은 그것을 믿지 마십시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그는 단지 형제들 중 하나이며 선지자요 사자요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는 요한이  나는 그가 아니라, 그러나 그가 내 뒤에 오시느니라. 고 외쳤던 음성이었을 때 받았던 영예보다 더 큰 명예를 부여받을 필요가 없는 사람입니다.

라오디게아 시대의 사자에 대한 이 부분을 끝맺기 전에, 우리는 이 두가지 생각을 심각하게 고려해 봐야만 합니다. 먼저, 이 시대는 한 사람의 선지자요 사자를 가질 것입니다. 계시록 10:7은,  그가(한 사람) 소리내기 시작할 때에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시대에서도 하나님은 한 번에 두 명의 주요한 선지자를 그의 백성들에게 보내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에녹을(혼자) 보내셨고, 노아를(혼자) 보내셨고, 모세를(모세 혼자 말씀을 가지고 있었고 다른 이들은 예언을 했습니다), 침례 요한은 혼자 왔습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날에도 한 선지자가 있어야 합니다.(Eng.p. 329) (여선지자가 아닙니다--비록 이 시대에 남자들보다도 더 많은 여자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주려고 애쓴다 할지라도), 그리고 실패할 수 없는 말씀은 그가(선지자) 마지막 때 사람들에게 비밀들을 나타낼 것이고 자녀들의 마음을 아비들에게로 돌리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집계된 한 계시를 통해 모이리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저는 그 진술에 도전합니다. 그것은 계시록 10:7에 대면하는 노골적이고 타당치 않은 가정입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시대에 사람들이 예언을 하고 그들의 사역이 정확할 수도 있고 정확하리라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흉년을 예언한 한 선지자 아가보라는 사람이  있었던 바울의 시대처럼, 예언자들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렇다고 동의합니다. 그러나 저는 말씀가운데 들어있는 비밀들을 나타낼 사람, 자녀들의 마음을 아비에게로 돌리는 사역을 가진 사람은 주요한 선지자요 사자인 한 명 이상일 거라는 것을 말씀의 실패할 수 없는 증거를 근거로 부인하는 바입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는 그의 실패하지 않는 말씀에 의해서 서고, 설 것이며 입증될 것입니다. 이 시대에는 한 선지자요 사자가 있습니다. 인간의 행동만을 기초로 할 때, 누구나 여러 사람이 있는 곳에는 함께 뭉치는 한 가지 주요 교리 중 덜 중요한 부분들에 대해서 분리된 의견이 있음을 압니다. 그러면 누가 이 마지막 시대에 회복되어야 할 오류가 없는 능력을 가질 것입니까? 왜냐하면 이 마지막 시대는 순수한 말씀 신부를 표명하는데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바울 시대에 완벽하게 주어져 완벽하게 이해되었던 것처럼 다시 한 번 말씀을 가지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제가 누가 그것을 가질 것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사람은 완전하게 입증받는, 에녹부터 오늘날까지의 모든 시대에 있던 어떤 선지자들보다도 더욱 철저하게 입증받는 선지자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필수적으로 머릿돌의 예언적 사역을 가질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를 보여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에 대해 피력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적의 음성으로 말미암아 그를 대변하실 것입니다. 아멘.

우리 마음 속에 새겨져야 할 두번째 생각은 일곱 교회 시대는 영원히 찬송을 받으실 성령과 더불어 적그리스도의 영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요한 1서 4: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보셨습니까? 적그리스도의 영은 거짓 선지자와 동일시되고 있습니다. 시대들은 거짓 선지자와 함께 들어왔고 거짓 선지자들과 함께 나갈 것입니다. 그런데 물론 계시록에 언급된 그 사람을 크게 비추어볼 때 진짜 거짓 선지자가 한 사람 있을 것입니다.(Eng.p. 330) 그러나 그의 계시가 있기 전인 지금으로서는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4:23-26,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이들 거짓 선지자들은 다음에 나오는 다양한 성서 구절 안에서 우리를 위해서 귀표가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2:1-2,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디모데후서 4:3-4,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디모데전서 4: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그런데 매번 여러분은 거짓 선지자는 말씀 바깥에 있는 자임을 보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분들에게  적그리스도 는  적말씀 을 뜻한다고 보여드렸듯이 이들 거짓 선지자들은 자신들의 마귀적 목적에 적합한 의미를 만들며, 말씀을 왜곡하며 옵니다. 여러분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사람들이 어떻게 겁을 주고 자기들에게 가까이 묶어놓는지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들은 사람들이 그들이 하라고 하는 것을 하지 않으면 또는 그들이 떠나면, 멸망이 잇따를 거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거짓 선지자들인데, 왜냐하면 참 선지자는 언제나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에로 인도하고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묶어 두고 그는 사람들에게 자기나 자기가 하는 말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이 말하는 것을 두려워 하라고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유다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돈을 좋아하는지 보십시오. 그들은 여러분들에게 가진 모든 것을 팔아서 자기네와 자기들의 책략에 바치게 합니다. 은사를 나타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안에 약간의 잘못이 있는 은사를 사용하고 그리고나서는 돈을 요구하고, 말씀을 무시하면서도 그것을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이 사망의 길인지도 모르고 그들에게 가서, 그들을 용납하고 지지하고 믿을 것입니다. 네, 이 땅은 육적인 모방자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마지막 시대에 그들은 그 선지자요 사자를 흉내내려고 할 것입니다. 스게와의 일곱 아들은(Eng.p. 331) 바울을 모방하려고 했습니다. 술객 시몬은 베드로를 모방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들의 모방은 육적인 모방입니다. 그들은 참 선지자가 나타낸 것을 나타낼 수 없을 것입니다. 그가 부흥은 끝났다고 말하는데 그들은 커다란 계시를 받았는데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올바르며 하나님은 사람들 사이에서 더 크고 더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겠다고 말하며 돌아 다닐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말에 넘어갈 것입니다. 이들 거짓 선지자들은 마지막 날의 사자는 신학자가 아니므로 그의 말을 들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들은 그 사자가 나타내는 것을 나타낼 수도 없고 마지막 날의 사자가 입증을 받는 것처럼 하나님에게 입증도 받지 못할 것이며 과장된 말과 그들의 전세계적인 악명의 무게로 사람들에게 그 사람(사자)의 말을 듣지 말라고 경고할 것이고 그들은 그가 잘못되게 가르친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들은 마귀에게서 난 바리새인들인 자기네 조상들에게 충실한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요한과 예수는 둘 다 잘못된 것을 가르친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거짓 선지자들은 참 선지자를 대적하고 그의 가르침을 멸시할까요? 왜냐하면 아합 시대에 미가야를 대적했을 때 자기들 조상이 한 그대로 형식에 매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백명의 선지자가 있있고 그들은 모두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었으며 모두 똑같은 말을 하여 백성들을 속였습니다. 그러나 한 명의 선지자--딱 한 사람--의 말이 옳았고 나머지 모든 사람의 말은 틀렸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계시를 단 한 사람에게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거짓 선지자를 조심하십시오, 그들은 탐욕스러운 이리들입니다.

여러분 아직도 이것에 대해 의심이 간다면 하나님께 성령으로 여러분을 채우시고 인도해 주시도록 기도하십시오, 왜냐하면 택함을 받은 자는 속아 넘어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아무도 여러분을 속일 수 없습니다. 바울이 틀렸었더라면, 그는 택함받은 자들을 어느 누구도 속일 수 없었습니다. 그 첫번째 에베소 시대에서 그 당시 택함받은 자들은 속아 넘어갈 수 없었고 거짓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시험하여 그들이 거짓말 하는 자임을 알아내고 쫓아버렸습니다. 할렐루야. 그의 양은 그의 음성을 듣고 그들은 그를 따라갑니다. 아멘. 저는 그 말씀을 믿습니다.


인 사 말


계시록 3:14,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세상에, 우리의 사랑하는 주요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이 너무도 훌륭하게 묘사돼 있지 않습니까? 이 말씀은 소리를 지르고 싶게 만드는 말씀입니다. 제 마음 속에 생생하게 와 닿게 하는 영이 그 말씀에 담겨져 있습니다.(Eng.p. 332) 성령께서 그 말씀의 완전한 계시를 주시도록 기다리지도 않고 그저 읽어만 봐도 기쁨이 솟아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마지막 시대와 관련하여 자신에 대한 이 설명을 주고 계십니다. 은혜의 날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는 1 세기서부터 20 세기까지 쭉 보고 계시다가, 우리에게 이 시대들에 대해 모든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무리에게 마지막 시대의 특징을 계시해 주시기 전에, 그는 자신의 은혜롭고 높으신 신성을 마지막으로 한 번 보게 하십니다. 이것은 그분에 대한 머릿돌 계시입니다.

 아멘 이 가라사대. 예수는 하나님의 아멘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그렇게 될지어다(So Let It Be) 입니다. 아멘은 종료를 나타냅니다. 아멘은 인정을 나타냅니다. 아멘은 승리하는 약속을 나타냅니다. 아멘은 변치않는 약속을 나타냅니다. 아멘은 하나님의 인침을 나타냅니다.

이제 여러분이 이것을 주의깊게 관찰하고 정말로 달콤하고 아름다운 뭔가를 보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것이 그의 자신에 대한 마지막 때의 계시다라고 말했습니다. 은혜의 날이 끝마쳐갈 때, 그 후엔 천년왕국이 금세 따라옵니다, 그렇죠? 자, 제가 이사야 65:16-19을 읽겠습니다.  이러므로 땅에서 자기를 위하여 복을 구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할 것이요 땅에서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리니 이는 이전 환난이 잊어졌고 내 눈 앞에 숨겨졌음이니라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 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며 그 백성으로 기쁨을 삼고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 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이것은 새 예루살렘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때는 천년왕국입니다. 그러나 천년왕국으로 들어갈 때, 그가 어떤 하나님이신지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어보십시오, 16절,  이러므로 땅에서 자기를 위하여 복을 구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할 것이요.  네, 그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진짜 번역은  진리의 하나님 이 아닙니다.  아멘의 하나님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읽어야 합니다,  자기를 위하여 아멘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할 것이요 땅에서 맹세하는 자는 아멘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리니 이는 이전 환난이 잊어졌고 내 눈 앞에 숨겨졌음이니라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며 그 백성으로 기쁨을 삼고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 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Eng.p. 333) 할렐루야. 여기에 구약의 여호와,  아멘의 하나님 이 있습니다. 여기에 신약의 예수님,  아멘의 하나님 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한 하나님이시라. 또 나옵니다. 구약의 여호와는 신약의 예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한 하나님이시라.  신약은 또다른 하나님을 계시하지 않습니다, 한 분이시며 똑같으신 하나님을 더 많이 계시할 뿐입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알리려고 내려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아들을 나타내려고 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나타내고 알리려고 오셨습니다. 그는 결코 두 분 하나님을 얘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한 분 하나님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시대에서, 우리는 머릿돌 계시, 성경 전체를 두고 가장 중요한 신성에 대한 계시에 다시 이르렀는데, 그것은 예수는 하나님이시고, 그와 아버지는 하나이시며, 한 분 하나님이 계신데, 그의 이름이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는 아멘의 하나님입니다. 그는 결코 변치 않으십니다. 그가 행하시는 것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그가 뭘 말씀하시면, 그것은 그대로 있습니다. 그가 뭘 하시면, 그 일은 영원히 행해집니다. 아무도 그가 말씀하신 것에서 빼거나 보탤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될지어다. 아멘. 그렇게 될지어다. 여러분 그런 하나님을 섬기고 계심이 기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아무 때나 언제나 여러분이 그분과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아멘이신 하나님이시고 결코 변하지 않으십니다.

 아멘이 가라사대  저는 이 말이 좋습니다. 그것은 그가 말씀하신 것은 뭐든지 최종적임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그가 첫째 시대와 둘째 시대와 모든 시대에게 자신의 참 교회와 거짓 포도나무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은 모두 다 정확하게 옳고 그것은 변하지 않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그가 창세기에서 시작하신 것은, 계시록에서 끝내실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아멘, 그렇게 될지어다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셔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마귀가 창세기와 계시록을 싫어하는지 그 이유를 다시 볼 수 있습니다. 마귀는 진리를 미워합니다. 그는 진리가 승리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의 종말이 어떨지 알고 있습니다. 마귀가 그걸 얼마나 저항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승자 쪽에 있습니다. 우리는(제 말은 그의 말씀을 믿는 자들만) 아멘 편에 있습니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신 이가 가라사대  이제 저는 여러분들에게  충성된 이란 생각에서 제가 발견한 것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가끔 위대하신 불변의 하나님에 대하여, 그의 말씀은 변치 않습니다, 말하는 것을 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하여 말할 때 우리는 종종 매우 비인격적인 분인양 그분을 바라봅니다. 하나님께서 전 우주와 우주에 속한 모든 법칙을 만드시고 그 후에는 뒤로 물러나서 위대하신 인격이 없는 하나님이 되신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길잃은 인류를 위한 구원의 길을 만드시고,(Eng.p. 334) 그 길은 십자가이죠, 그때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 죄를 대속하고, 그의 부활이 우리에게 그에게로 나아갈 수 있는 열린 문을 주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저 팔짱을 끼고 뒷전에 서 계신 것처럼 말입니다. 마치 우리가 창조하신 후 자기 피조물에 대해 개인적인 관심을 잃어버린 위대한 창조주를 믿는 것을 전공이나 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생각하기가 쉽다는 걸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지금 당장에도 인간사를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창조주이신 동시에 유지시키는 자이십니다. 골로새서 1:16-17,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주권적인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자신의 뜻으로 미리 아신 택하신 자들에 대한 구원의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아들은 십자가에서 구원의 수단을 세우기 위해 죽었고 성령은 조심스럽게 아버지의 뜻을 수행합니다. 그는 자기 뜻의 목적에 따라 지금 이 순간에도 모든 일을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는 모든 일의 한 가운데서 조종하고 계십니다. 그는 자기 교회 가운데 계십니다. 이 위대하신 창조주 구세주 하나님은 지금도 양의 목자로서 자신의 소유된 백성들 가운데서 충성스럽게 일하고 계십니다. 그의 임재 자체는 자기 백성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는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보살피십니다. 그의 눈은 항상 그들을 보고 있습니다. 말씀이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 말 그대로를 의미합니다. 오, 저는 하나님이 언제나 충성스러운 분이셔서 너무나 기쁩니다. 그는 진실하셔서 거짓말을 하지 않으십니다. 그는 말씀에 진실하시므로, 그 말씀을 지지하실 것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진실하시므로 우리 가운데 한 사람도 잃지 않으시고 마지막 날에 우리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저는 제가 그의 충실하심에 안식하고 있음이 기쁩니다. 빌립보서 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그는 참된 증인이라.  그런데 참되다라는 말은 우리가 계시록 3:7에서 본 말과 똑같은 말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이  거짓 과 대조되는  참 의 의미가 아님을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것은 훨씬 더 풍성하고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편적 인식과 대조하여 완전한 인식을 표현합니다. 자 빌라델비아 시대에서, 주님의 강림은 가깝다고 했습니다. 그 시대는 주님께서 얼마나 커다란 사랑을 보였었습니까. 저는 베드로전서 1:8의 아름다운 말씀이 생각납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그들과 함께 우리도 역시 기뻐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Eng.p. 335) 우리는 그분을 느꼈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한정적인 감각들이 허용하는 만큼 그를 압니다. 그러나 어느 날엔가는 서로 얼굴을 바라볼 날이 올 것입니다. 그것은 이 시대입니다. 그는 이 시대의 마지막에 가서 오실 것입니다. 단편적인 인식이 완전한 인식, 종료된 인식이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거울을 통해서 침침하게 보아 왔지만, 곧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우리는 영광에서 영광으로 나아왔지만 곧 있으면 영광 가운데 있게 될 것이고, 그의 영광으로 우리는 빛날 것입니다. 우리는 그와 같을 것이고 신성한 우리 구주 예수와 놀라우리만치 같을 것입니다! 그것 참 좋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분 안에서 완전합니다. 그건 사실입니다. 그는 그것에 대해서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날엔가 우리는 완전히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는 불멸의 옷을 입을 것이고 모두 생명에 삼키울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인식을 깨달을 것입니다.

 그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라.  이제 우리는  증인 이라는 말을 생각해 봅시다. 자, 그 말은 우리가  순교자 라는 말을 뽑아내는 말입니다. 성경은 스데반과 안디바와 기타 다른 이들을 순교자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순교자였고 증인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충성스러운 순교자이셨습니다. 성령은 그것의 증인이 되십니다. 성령이 그것을 증거하십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미워했고 그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랑하셨고 그는 아버지께로 가셨습니다. 그가 아버지께로 가셨다는 증거는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 영접받지 못하셨다면 성령은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을 요한복음 16:7-11에서 읽어보십시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예수께서 여기 계시는 대신 성령의 임재가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예수님은 의로운 분이셨고 아버지께로 가셨음을 증명합니다. 그러나 또 요한복음 14:18에서 말합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위로 없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그는 위로자(보혜사)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는 위로자였었습니다. 그는 참 교회 위에 영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는 교회 가운데서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십니다. 그러나 어느 날엔가는 그는 다시 육을 입고 돌아오실 것입니다. 그때 그는 누가 유일한 지혜로운 주권자인지 증명하실텐데--그가, 영광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주권자입니다.

충성되고 참된 증인, 창조주인 동시에 유지시키는 분, 완벽한 인식, 하나님의 아멘이십니다.

오, 제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얼마나 사랑하고 경외하는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Eng.p. 336)

저는 고린도후서 1:18-22 말씀을 드리고나서 인사말의 이 부분에 대한 제 생각을 끝맺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  주 예수님은 자신이 그런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 말들은 우리가 알아듣는 것을 그대로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어떤 사람들은(사실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첫번째 창조물이므로 신성이 좀 부족한 분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첫번째 창조물이 우주의 모든 나머지 것과 우주 안에 있는 것을 다 창조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이 다른 성경구절과 맞지 않음을 아실 것입니다. 그 말은,  그는 하나님의 창조의 개시자 또는 창시자이시다  입니다. 지금 우리는 분명하게 예수는 하나님, 진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압니다. 그는 창조주이십니다. 요한복음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는 다음과 같이 말씀된 바로 그분입니다,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또한 출애굽기 20:11에서 말씀하시길,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아시겠죠, 그가 창조주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그는 완성된 육적 창조물의 창조주였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 말들이 분명하게 뭘 의미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식으로 해석을 하면 하나님이 하나님을 창조하셨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자신이 창조주이신데 어떻게 하나님이 창조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제 그는 교회 한 가운데 서 계십니다. 서 계시면서 그는 이 마지막 시대에서 자기가 어떤 분인지를 계시하고 계시는데, 자신을,  하나님의 창조의 근원 이라고 부르십니다. 이것은 또다른 창조입니다. 이것은 교회와 연관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에 대한 특별한 지정입니다. 그는 그 교회의 창조주이십니다. 하늘의 신랑은 자신의 신부를 창조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그는 내려오셔서 처녀 마리아 안에 자신의 몸이 태어나게 될 세포들을 창조하셨습니다. 저는 그것을 거듭 말하고 싶습니다. 그는 그 몸을 위해서 마리아의 태 안에 그 세포들을 창조했습니다. 마리아에게서 나오는 인간의 난자 속에 성령이 단순히 생명을 주는 걸로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몸을 낳는 죄성이 가득한 인간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지막 아담 을 낳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Eng.p. 337)  보라 나를 위하여 당신이(아버지)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하나님께서(마리아가 아니라) 그 몸을 예비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인간 인큐베이터였고 그 거룩한 아이를 배고 있다가 그를 탄생시켰습니다. 그 아이는 하나님이자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새 창조물에 속한 자였습니다. 인간과 하나님이 만나 연합했습니다. 그는 이 새로운 인종의 첫번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 새로운 인종의 머리입니다. 골로새서 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제 여러분은 비록 사람이 옛 질서나 피조물에 속했다 해도,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면 그는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이 됨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에베소서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되어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에베소서 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이 새 창조는 옛 창조를 변경시킨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새 피조물이라고 불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말하는 그대로  새 창조 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옛 창조와는 구분되는 또다른 창조입니다. 그는 더 이상 육을 통해 다루고 계시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을 다루실 때는 그렇게 하셨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셨고 아브라함의 자식 중에서도 경건한 이삭의 혈통을 통해 다루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만민과 만국 중에서 새로운 피조물을 계획하셨습니다. 그는 그 창조의 처음 나신 자가 되십니다. 그는 인간의 형태로 창조된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는 자기에게 많은 아들들을 창조하고 계십니다. 창조주되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의 창조의 일부로 창조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참된 계시입니다. 이것은 그의 목적이었습니다. 이 목적은 택하심을 통해 형태를 이루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모든 것이 끝날 마지막 시대까지 곧장 내려다 보시고, 하나님의 이 새로운 창조의 저자로서 여전히 교회가운데 계신 자신을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의 주권적인 능력이 그 일을 성취시켰습니다. 자신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는 이 새로운 창조의 구성원들을 택하셨습니다. 그는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그들을 양자삼을 것을 예정했습니다. 자기의 전지함과 전능함으로 말미암아 그는 그것을 이루셨습니다. 그가 확신하지 않았다면 달리 어떻게 그가 그의 형제들로부터 영광을 받으며 교회 가운데 서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겠습니까?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모든 일을 그의 목적과 기쁘신 뜻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 그가 알고 있는 것에 의해서 이루셨습니다. 에베소서 1: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Eng.p. 338) 할렐루야! 여러분 여러분이 그 분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이 기쁘지 않습니까!


라오디게아 시대에 주는 메시지


계시록 3:15-19,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우리가 이 말씀을 함께 읽을 때, 성령께서는 이 시대에 대하여 한 가지도 좋은 말씀을 하시지 않았다는 것을 아셨으리라 확신합니다. 그는 두 가지 죄목을 들어서 그것에 대해 선고하십니다.

(1) 계시록 3:15, 16,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우리는 이것을 주의깊게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은 이 라오디게아 교회 시대 무리는 미지근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미지근함은 하나님께로부터 벌을 부릅니다. 그 벌은 하나님의 입에서 토해 내쳐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잘못 가는 것처럼 우리도 어긋난 길로 가지 않기를 바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아주 어리석게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그의 입에서 뱉아내실 수 있는데 그것은 성도들의 끈질긴 인내에 대한 교리에 아무런 진리가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말합니다. 저는 여러분의 생각을 지금 바로 고쳐드리고 싶습니다. 이 절은 한 개인에게 해당되는 절이 아닙니다. 이것은 교회에게 해당되는 절입니다. 그는 교회에 말씀하고 계십니다. 게다가, 마음 속에 말씀을 간직하고 계신다면, 여러분은 어디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입 속에 있다고 말하지 않음을 상기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를 자기의 품에 품고 계십니다. 저 옛날 시간이 있기 전 알려지지 않은 시대들 동안에 우리는 그의 생각 속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의 양우리 안에, 그의 초장 안에 있지, 결코 그의 입 안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주의 입에 뭐가 있습니까?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4: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입 속에도 있어야 합니다.(Eng.p. 339) 우리는 교회가 그의 몸이 됨을 압니다. 그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여기입니다. 교회의 입 속에 무엇이 있게 될까요? 말씀입니다. 베드로전서 4: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베드로후서 1: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그렇다면 마지막 날의 이 사람들은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그들은 말씀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그들은 더이상 말씀에 대해 열심을 품지 않습니다. 말씀에 대해 미지근합니다. 저는 지금 당장 그것을 증명하겠습니다.

침례교는 말씀에 근거한 자기네 신조들과 독단들을 가지고 있고 여러분은 그들을 흔들 수 없습니다. 그들은 기적이 일어나는 사도 시대는 끝났고 믿음에 수반되는, 성령의 침례도 없다고 말합니다. 감리교는(말씀에 기초하여) 물침례는 없고(물뿌림은 침례가 아닙니다) 성화가 성령 침례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중생의 침례를 강조하는데 너무도 많은 경우를 보면 그들은 맹숭맹숭한 죄인으로 내려갔다가 눈물젖은 죄인으로 올라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네 교회는 말씀에 기초하고 있노라고 주장합니다. 쭉 내려가서 오순절 교인들에게 가 보십시오. 그들은 말씀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들에게 말씀으로 시험해 보십시오. 그들은 거의 매번 감정을 취하기 위해서 말씀을 버릴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말씀에 있든 없든 또는 말씀에서 적절하게 해석된 것이라 해도, 기름과 피와 방언과 다른 표적들 같은 은사 표명을 나타낼 수 있다면, 대다수는 그것으로 인해 넘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말씀은 문 밖으로 쫓겨났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들 모두를 대적하리라. 너희를 내 입에서 내치리라. 이것이 끝이다. 일곱 시대 중에서 일곱이니까, 나는 인간이 내 말보다 자기 자신의 말을 존중하는 것 밖에는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끝에 가서 내가 너희를 내 입에서 토해 내리라. 모두 끝장이다. 나는 괜찮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 나는 여기 교회 한 가운데 있다. 충성되고 참된 하나님의 아멘이 자신을 계시할 것이고 그것은 내 선지자로 말미암아 되리라.  오, 그렇습니다, 그건 그렇습니다. 계시록 10:7,  일곱째 사자가 소리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  그렇습니다. 그는 입증받은 한 선지자를 보내고 계십니다. 그는 약 이천 년 후에 한 선지자를 보내시고 계십니다. 그는 조직과 교육과 종교계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사람을 보내시는데, 침례 요한과 옛날 엘리야와 같이 오직 하나님의 말만 들을 것이고  주께서 가라사대 를 가질 것이고 하나님을 대변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대변자(mouthpiece)가 될 것이고 말라기 4:6에 선포된대로(Eng.p. 340) 자녀들의 마음을 아비들에게 돌릴 것입니다. 그는 마지막 날의 택함받은 자들을 돌이킬 것이고 그들은 입증받은 선지자가 주는 바울 때에 있던 말씀과 똑같은 진리를 들을 것입니다. 그는 그들이 가졌던 진리를 회복시킬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대에 그와 함께한 그 택함받은 자들은 진실로 주님을 나타내는 자들이 될 것이고 주의 몸이 되고 주의 음성이 될 것이며 주님이 하던 일을 행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해하시겠습니까?

잠시 교회사를 보면 이 생각이 얼마나 정확한지 증명해 줄 것입니다. 암흑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거의 전적으로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루터를 말씀을 주어 보내셨습니다. 루터교인들은 그 당시 하나님을 대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조직을 만들었고 다시금 순수한 말씀은 자리를 잃었는데 조직은 단순한 말씀에로가 아니라 독단과 신조들 쪽으로 기울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더이상 하나님을 대변할 수 없었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은 웨슬리를 보내셨고, 웨슬리는 그의 시대에 말씀을 가진 음성이었습니다. 웨슬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알려진 그들 세대를 위한 살아있는 서신이 되었습니다. 감리교가 실패했을 때, 하나님은 다른 이들을 세우시고 그것도 해를 거치면서 똑같이 되어버렸는데 마침내 이 마지막 시대에는 다시금 그들의 사자 밑에서 마지막 시대에 주는 마지막 음성이 될 또다른 사람들이 이 땅에 있게 됩니다.

네 그렇습니다. 교회는 더이상 하나님의  대변자 가 아닙니다. 교회는 자기 자신의 대변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에게서 등을 돌리십니다. 하나님은 그 선지자와 신부를 통해 교회를 혼란케할 것인데, 하나님의 음성이 신부 안에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계시록의 마지막 장 17절에서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세상은 오순절 때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들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연히 그 말씀 신부는 첫째 시대에서처럼 배척당할 것입니다.

이제 그는 이 마지막 시대에게 외치십니다,  너희들은 말씀을 가지고 있다. 너희들은 이전 시대들보다 성경을 더 많이 가지고 있지만 말씀을 분리하고 조각조각내고, 원하는 것은 취하고 싫은 것은 빼는 것 말고 말씀에 대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다. 너희들은 말씀을 실천에 옮기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말씀을 가지고 논쟁하는데만 관심을 두고 있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차가워서 그것을 거절한다면, 나도 참을 수 있겠다. 네가 그 진리를 알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느라 열심낸다면, 나는 너를 칭찬하겠다. 그러나 너희는 내 말을 받기만 하고 그 말씀을 존중하지 아니하니, 나도 너를 존중하지 않아야 하겠다. 너는 내 속이 거북하게 하므로 너를 토하리라. 

그런데 누구나 미지근한 물이 배를 아프게 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여러분이 구토를 해야한다면, 미지근한 물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미지근한 교회는 하나님을 아프게 하였고(Eng.p. 341) 하나님은 그것을 토해내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홍수 전에 하나님이 어떠했을지 짐작케 하지 않습니까?

오, 교회가 하나님에 대하여 차갑든지 뜨겁든지 했으면 좋겠습니다. 최고로 좋은 일은, 교회가 열렬한(뜨거운) 상태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질 않습니다. 판결이 언도되었습니다. 교회는 더이상 세상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되지 못합니다. 교회는 그렇다고 주장할 테지만 하나님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오, 하나님은 아직도 세상 사람들을 위해서 한 음성을 가지고 계시는데, 하나님은 신부에게 한 음성을 주셨습니다. 그 음성은 우리가 앞에서 말했고 앞으로도 더 얘기할텐데 신부 안에 있습니다.

(2) 계시록 3:17-18,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그런데 이 절 처음 구절을 보십시오,  네가 말하기를  보십시오, 그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대변자로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16-17절이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을 그대로 증명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것을 말한다해도, 그것을 옳게 하지는 않습니다. 카톨릭 교회는 자기가 하나님을 대변하며 자기가 주님의 확실한 음성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어쩌면 그토록 영적으로 악할 수 있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 속에 있는 씨를 나타내고 있고, 우리는 그 씨가 어디에서 나온 씨인지 압니다, 안 그렇습니까?

라오디게아 교회는,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평가였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기를 바라보았고 그것이 교회가 본 모습이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나는 부자라 고 말했는데 그것은 이 세상 것들에 부유하다는 뜻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야고보서 2:5-7 앞에서 자랑을 하고 있는 겁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저희는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  그런데 저는 부자인 사람은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없다는 뜻을 시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아주 소수만 부자임을 말씀이 말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참 교회의 몸 안에서 우세하는 쪽은 가난한 자들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치부하게 되면, 우리는 딱 한 가지를 압니다:  이가봇(슬프도다 영광이 사라졌도다) 라는 말이 교회 문 위에 쓰여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이므로, 여러분은 그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겁니다.

교회 안에 있는 부요함에 대해 얘기해 보면--이제까지 그와 같이 부요함을 나타낸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Eng.p. 342) 이전에 없던 아름다운 성전들이 수가 늘어나고 다양한 무리들이 누가 가장 크고 가장 아름다운 교회를 지을 수 있는지 보려고 서로 경쟁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 교육관을 짓고, 그들 건물을 고작 일주일에 한두 번 사용합니다. 그러나 너무도 무시무시한 건 그 사실이 아니라, 그들이 그 교육 공장에서 아이들이 보내는 이 적은 시간으로 가정에서 이루어져야 할 훈련의 시간을 대치하기를 기대한다는 사실입니다.

돈이 교회 안에 쏟아져 들어와 교파들은 각기 증권, 채권, 공장, 유전, 보험회사들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복지와 퇴직연금에 돈을 쏟아넣습니다. 그런데 이건 좋은 일 같지만, 목사들에게 올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더 많은 진리의 빛 또는 더 많은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 그들의 무리를 떠나기로 결정한다면, 연금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이것을 견디지 못해서 그들을 억압하는 무리와 함께 머무를 것입니다.

그런데 이건 마지막 시대임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이 시대가 마지막 시대라는 걸 압니다. 우리가 주님이 진짜로 오실 것을 믿는다면, 그렇게  광대하게 짓는 사람들은 뭔가 잘못된게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여기서 영원히 머물 계획을 세우고 있다거나 예수님이 수백 년 뒤에나 오실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종교는 기업이라고 알려진 것을 아십니까? 교회 안에 재정을 맡아볼 사업가를 두고 있는 것은 절대적인 사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까? 말씀은 사도행전에서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일곱 남자들이 재정을 맡아 주님을 섬겼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은 어째서 하나님이,  너는 네가 부유하다고 말한다, 나는 절대로 그렇게 말하지 않겠다, 라고 말씀하시는지 분명히 아셨을 것입니다.

지금은 라디오 프로그램, 텔레비젼 프로그램, 수백만 수백만 달러의 비용이 드는 교회의 수많은 노력들이 있습니다. 부요함이 교회로 쏟아지고 또 쏟아져 들어오고, 돈과 함께 교인도 증가하지만, 돈은 없지만 성령에 의해 그들에게 주어진 능력만을 의지했던 때에 행해졌던 것처럼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습니다.

급료받는 목사, 급료받는 부목사, 음악과 교육을 맡은 급료받는 목사들, 급료받는 성가대원, 급료받는 수위들, 프로그램과 오락--모든 것이 엄청난 비용을 소모하는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력은 줄어들고 있습니다. 네, 교회는 부자지만 능력은 거기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영으로 움직이시지 교회 내에 있는 돈의 많고 적음이나 재능들로 움직이시지 않으십니다.

이제 저는 이 돈에 대한 충동이 얼마나 악마적이 되었는지 여러분에게 보여드리고 싶습니다.(Eng.p. 343) 교회들은 다 교인을 찾으러, 특히 부유한 교인을 찾으러 나섰습니다. 종교를 주의를 끌고 호소력있게 만들려고 하는 곳마다 부자와 교양있는 사람과 세상적 명망을 가진 모든 이들이 들어와 그 교회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할 것입니다. 그들은 부가 영성(靈性)의 척도가 된다면, 세상은 이미 하나님을, 하나님의 모든 것을 가지고 있고, 교회는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요?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유하다.  이것을 글자 그대로  나는 영적인 부를 소유하고 있다 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마치 황금 거리가 있고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가진 천년왕국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에 대해 의심이 듭니다. 교회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적인 것들로 부유합니까? 이 20세기 라오디게아가 자랑하는 것을 말씀에 비추어 조사해 보기로 합시다.

교회가 진실로 영적으로 부자라면, 그 영향은 지역 사회 생활에서 느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이들 자칭 영적이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지역 사회 생활은 어떤 삶입니까? 교외에 나가 살고, 더 나은 계층들이 모여 살고, 거기에는 부부교환, 매춘이 성행하고 어린이들은 떼로 모여서 엄청난 재산 피해를 가져오는 깨부수는 파티를 열고 있습니다. 부도덕성이 난잡한 성행위와 마약 중독과 도박과 절취와 온갖 악으로 최고 기록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 세대가 참으로 좋고, 교회들은 사람들로 가득하고, 심지어 선교 지역에서 원주민들이 좋은 반응을 보인다고 주장하고 다닙니다. 교회는 사람들을 의사들에게 특히 신경정신과 의사들에게 맡겨버렸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영적으로 부유하다고 재잘거릴 수 있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그들은 파산지경에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주변을 유심히 살펴 보십시오. 사람들이 지나갈 때 검사해 보십시오. 보이는 무리 중에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한 사람들을 골라낼 수 있습니까? 그들이 어떤 옷을 입고, 어떻게 행하고, 그들이 무슨 얘기를 하고, 어디를 가는지 잘 보십시오. 분명히 지나가는 사람들 전체 가운데서 신생(新生)의 참 증거가 어느 정도 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조금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정통파 교회들은 구원을 받고 또 심지어는 성령충만한 수백만명이 있다고 말합니다. 성령충만하다고요? 꼬불꼬불한 짧은 머리를 하고, 짧은 바지나 긴 바지를 입고, 잔등과 팔을 노출시키는 옷과 짧은 속바지를 입고, 이세벨같이 화장을 하고서 돌아다니는 여자들을 성령 충만한 여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만약 이 여자들이 그리스도인에게 어울리는 정숙한 의상으로 단장한다면, 저는 정숙치 못한 장면을 보게 될 때 어떠할 지 생각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여성들이 스타일을 정하지 않음을 압니다. 헐리우드가 정합니다. 하지만 여자분들은 들어보십시오, 시장에는 아직도 옷감과 재봉틀을 팔고 있습니다.(Eng.p. 344) 가게에 있는 것을 사고는 그것을 핑게삼을 수는 없습니다. 제가 다루려고 하는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남자가 여자를 보고 그 마음에 음욕을 품으면, 그는 마음 속으로 이미 그 여자와 간음을 했다는 것을 읽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이 남자가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 옷을 입었다고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죄를 짓는 그의 파트너가 되게 합니다, 비록 여러분이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그런 생각을 갖지도 않은 진짜 처녀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책임이 있다고 하시고 여러분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자분들은 이런 설교 말씀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압니다, 하지만 자매님, 여러분이 지금 행하는 일은 정말로 잘못된 행동입니다. 성경은 여러분이 머리를 자르는 걸 금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머리를 덮는 목적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머리를 기르라는 명령을 주셨습니다. 그 긴 머리는 여러분의 영광입니다. 여러분이 머리를 자른다면, 여러분은 남편이 머리 됨을 부인하는 게 됩니다. 이브처럼 여러분은 밖으로 나가서 여러분 자신의 길을 간 것입니다. 여러분은 투표권을 가졌습니다. 남자들의 직업도 가졌습니다. 여러분은 여자다움을 상실했습니다. 여러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셔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것 말고도, 많은 여성들 중에는 하나님께서 남자들에게만 허락하신 설교단과 교회 직분을 침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 제가 상처난 곳을 건드렸죠, 안 그렇습니까? 저, 제게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어느 여자에게 설교하거나 남자를 주관하라고 정해주셨는지 한 군데를 지적해 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제가 말한 것을 사과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제가 틀리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할 겁니다. 저는 말씀가운데서 말씀과 함께 서 있기 때문에 옳습니다. 여러분이 영적으로 부자라면, 여러분은 그게 사실임을 아실 것입니다. 참된 것은 말씀 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치 아니하노니, 하고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에베소서 4장에 나오는 5중 사역 가운데서 하나라도 차지할 수 없고 남자들을 주관할 수 없습니다. 자매님, 그 말씀에 귀 기울이는게 좋을 겁니다. 성령과 말씀은 하나이므로 여러분에게 설교하라고 말했던 것은 성령 충만한 삶에서 표명하는 하나님의 영이 아니었습니다. 성령과 말씀은 동일한 말씀을 합니다. 누군가 실수를 했고 누군가 속아 넘어갔습니다. 때가 너무 늦기 전에 정신을 차리십시오. 사탄이 여러분의 어머니인 이브를 속였습니다, 사탄은 지금 딸들을 속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도와 주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부족한 것이 없도다.  그런데 누가  내게 아무 것도 필요한 게 없다 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요 라고 말하는 것일 테고  나는 지금 충분하니까 더 이상은 원하지 않아요 라고 말하는 것일 겁니다. 여러분은 그 말을 원하는 대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다 교회는 만족한 상태에 있다는 사실에 보태는 말입니다. 교회는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자기가 전부를 가졌다고 또는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날 그것을 그대로 보고 있습니다. 어느 교파가(Eng.p. 345) 자기들은 계시와 능력과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지 않고 있습니까? 침례교 말을 들어보면, 그들이 다 가지고 있습니다. 감리교 말을 들어보면 그들이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 말을 들어보면 자기들 말고 다른 이들은 다 틀립니다. 오순절 말을 들어보면 그들은 순복음 중의 순복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제가 그들에 대해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안내서 중 어느 것 하나도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두 다 그것을 너무도 훌륭하게 써서 자기네 이름을 써 넣고 그것을 다 끝냅니다. 하나님께서는 더이상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더이상은 원칠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병고침이 말씀 가운데 있는데도 병고침을 믿지도 않고 원치도 않으려 듭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을 열어 이적을 보여주신다해도 성령을 받으려 하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다 자기들이 모든 것을 가졌다고, 아니면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고, 그 사실을 증명하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그게 사실입니까? 이십 세기 교회를 일 세기 교회에 비교해 보십시오. 한 번 비교해 보십시오. 비교해 보세요. 능력은 어디에 있습니까? 사랑은 어디에 있습니까? 죄를 몰아내고 믿음을 가지고 예수 쪽으로 걸어간 정결케된 교회는 어디에 있습니까? 어디에 일치가 있습니까? 여러분은 찾을 수 없습니다. 만약 이 교회가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면, 어째서 사도행전에서 오늘날 우리가 가진 것보다 훨씬 더 많이 가진 그들이,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을 더 많이 원하고 외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진단


그런데 하나님이 보신 것은 그들이 보았다고 말하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부자이고 영적으로 부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성취했습니다. 그들은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달리 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이것을 모르는구나, 너는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 멀고 벌거벗었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이 그런 식인데, 특히 벌거벗은 상태인데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은, 뭔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된 겁니다.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의 눈을 멀게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하신 것은 아닐까요? 복음이 유대인들에게로 돌아가려는 것일까요? 역사가 되풀이되고 있는 걸까요? 저는 그렇다고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라오디게아 시대의 교회가  곤고 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은  견디다 와  시험 을 의미하는 두 헬라어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참된 그리스도인에게 오는 시험들과는 관계없는 것인데 왜냐하면 하나님은 시험받는 그리스도인이  복이 있다 고 말하고 이 서술은  곤고하고 가련하다 라고 묘사된 반면 그의 태도는 기뻐할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이상합니까. 풍족한 이 시대에, 전진하는 이 시대에, 충만한 이 시대에, 어떻게 시험이 있을 수 있습니까?(Eng.p. 346) 정말 이상합니다, 풍족함과 기회가 많은 이 시대에, 모든 사람이 너무도 많이 가지고 있고 더 가져야 할 게 너무도 많은 이 때에, 우리 일을 대신해 주는 온갖 문명의 이기들과 우리들을 즐겁게 하는 너무도 많은 것들을 가지고서도, 갑자기, 우리는 나라 전체에 경각심을 일으킬 정도로 높은 정신질환을 발견합니다. 모든 이들이 행복해 해야 하고, 진정 불행스럽게 여길 게 아무 것도 없는데,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밤에는 진정제를 먹고, 아침에는 각성제를 먹고, 의사에게 달려가고, 입원하고, 술로 원인 모를 두려움을 몰아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네, 이 시대는 세상 상품들이 엄청나게 쌓여 있음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전보다 불행한 상태에 있습니다. 이 시대는 영적인 성취들을 자랑하지만 사람들은 예전보다 자신감이 없습니다. 이 시대는 더 나은 도덕적 가치를 자랑하지만 대홍수 이래 어느 시대보다도 더 부패한 시대입니다. 이 시대는 지식과 과학에 대해서 말하지만, 모든 싸움에서 패배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마음과 영혼은 이 땅에 임한 온갖 변화들을 이해하거나 보조를 맞출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세대에서 우리는 말과 마차 시대에서 우주 시대로까지 달려왔고, 우리는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자랑을 늘어 놓습니다, 그렇지만 마음 속은 고통가운데 외치는 컴컴하고 텅빈 동굴이고,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두려워 떨고 있고 세상은 너무도 어두워져서 이 시대는 신경증 환자들의 시대라고 불러도 될 정도입니다. 자랑을 하지만 그 근거를 댈 수는 없는 시대입니다. 평화를 외치지만 평화가 없는 시대입니다. 모든 것을 엄청나게 가지고 있다고 외치지만 끌 수 없는 불처럼 욕망으로 계속 불타고 있는 시대입니다! 나의 하나님은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가련하다.  그것은 그들이 동정을 받는 대상이라는 뜻입니다. 동정받는다고요? 그들은 동정을 비웃습니다. 그들은 자만심으로 꽉 차 있는 자입니다. 자기들이 가진 것을 뽐내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소유는 시간의 시험을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계시의 반석이 아닌 떠내려 가는 모래 위에 세워진 것들입니다. 머지 않아 지진이 일어날 것입니다. 머지 않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진노의 폭풍이 몰아칠 것입니다. 그러면 갑작스런 멸망이 찾아오고, 그들은 육적인 준비를 다 갖췄다해도 여전히 땅에 임한 일에 대비되지 않은 상태에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온갖 세상적인 노력을 하고는 있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을 대적하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동정의 대상은 정말로 그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마지막 시대에 에큐메니칼 운동에 가담한 그 불쌍한 사람들을 동정하십시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이 사탄의 움직임인데 하나님의 움직임이라고 부르기 때문입니다. 조직의 저주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십시오. 너무나 많은 아름다운 교회와 너무도 훌륭한 목사관과 너무도 장엄하게 훈련된 성가대와 부의 위세를 떨치고 너무도 조용하고 엄숙한 예배형태를 가지고 있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십시오.(Eng.p. 347)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다시 오래된 창고 건물로, 희미한 불빛이 있는 방으로, 지하실로, 다시 세상을 덜 갖고 하나님을 더 많이 가진 상태로 돌아가십시오. 크게 떠들어대고 은사에 대해서 말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십시오. 그들은 곧 진노의 대상이 될 테니까 그들을 동정의 대상으로 여기십시오.

 그들은 가난하다.  물론 영적으로 가난하다는 뜻입니다. 이 시대가 끝나간다는 징조는 더 많은 사람들과 성령의 나타내심이어야 할 더 많은 표명들이 있는 더 크고 더 좋은 교회입니다. 그러나 제단이 꽉 메워지고 성령의 은사가 나타내지고 많은 이들이 출석하는 것이 하나님의 대답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제단 앞에 나온 자들 중 소수만이 하나님을 계속 찾기 때문입니다, 대집회가 끝난 후에는 복도로 나온 그 사람들은 다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은 한 사람의 호소를 듣고 그물 속으로 들어왔지만, 물고기가 아니었으므로, 거북이와 같이 자기 물로 다시 기어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모두들 방언홍수(glossalalia)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그것을 성령 침례의 증거로 여기고 사람들은 우리가 커다란 신앙 부흥에 휩싸여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흥은 끝났습니다. 미국은 1957년에 마지막 기회를 가졌었습니다. 그런데 방언은 벨사살의 잔치 때 벽에 나타났을 때 그랬듯이 임박한 재난에 대한 하나님의 징조입니다. 마지막 날에 많은 이들이 와서  주여, 주여, 우리가 당신의 이름으로 많은 놀라운 역사들을 행하고 마귀도 쫓아내지 않았던가요? 하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너희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나는 너희를 모르느니라. 하실 것입니다. 마태복음 7:22-23. 예수님은 그들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와서 병자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고, 회중 가운데서 나타나는 기름과 피를 가지고, 예언이 나가고 온갖 초자연적인 현상이 나타나는 사람이 있으면, 여러분은 그 사람에게 빙 둘러 모이고, 그 사람이 실제로는 종교를 돈벌이로 삼으며 죄가운데 산다 해도, 주님이 보내신 자라고 맹세할 것입니다. 그들은  어, 그 사람은 결과를 보여주고 있어요, 그는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임에 틀림없어요, 하면서 비성경적인 대답을 할 뿐입니다. 얼마나 끔찍스런 일입니까. 이 시대가 하나님의 영에 있어서 얼마나 가난한 상태에 있습니까, 그런데 가난에 쪼들리고 있는 불쌍한 사람들은 그 사실을 깨닫지도 못합니다.

 너희는 눈 멀고 벌거벗었다.  자 이 말은 절박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눈 멀고 벌거벗었으면서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까? 성경은 그들이 눈멀고 벌거벗었으면서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해답은, 그들은 영적으로 눈 멀고, 영적으로 벌거벗었다는 겁니다. 여러분 엘리사와 게하시가 아람 군대에게 포위되었던 때를 기억하십니까? 여러분은 엘리사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들을 눈멀게 했던 일을 기억하실 것입니다.(Eng.p. 348) 하지만 그들의 눈은 멀쩡하게 뜨여 있었고 자기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소경 됨은 그들이 어떤 것은 볼 수 있지만 엘리사와 그의 종과 이스라엘의 진영같은 것은 볼 수 없었기 때문에 특이한 것이었습니다. 이 군대가 볼 수 있는 것은 그들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보지 못한 것은 그들이 사로잡히도록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줍니까? 저 옛날 예수님의 지상 사역에서 의미했던 것을 그대로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진리를 가르치려고 애쓰셨지만 그들은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9:40-41,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이 시대의 태도는 그때와 똑같은 태도입니다. 사람들은 전부 다 소유하고 있고 전부 다 압니다. 그들은 가르침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말씀 가운데서 진리를 한 가지 가지고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에게 설명하려고 하면, 청취자는 뭘 좀 배우려고 듣는게 아니라 오직 말해진 것을 반박하기 위해서 들을 뿐입니다. 그런데 저는 한 가지 공정한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성서가 성서와 싸울 수 있습니까? 성경이 성경에 모순될 수 있습니까? 말씀가운데서 서로 다른 말을 하거나 다른 것에 맞서는 두 가지 진리의 가르침이 말씀 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진리에 대해 열린 눈을 가지고 있습니까? 제가 아는 바로는, 단 일 퍼센트도 모든 성경은 하나님이 주셨고 모든 말씀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에 유익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일 성경 말씀 전체가 그렇게 주어진 것이라면, 모든 절은 매 번 서로 들어맞을 것입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정되어 택함받는 것과 버림받아 멸망당하는 것을 믿고 있습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들을까요? 아뇨, 그들은 듣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두 가지 다 말씀 가운데 있고, 어떤 것도 그 사실을 바꾸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시간을 내서 그 사실에 대해서 배우고 그런 교리의 진리와 맞서는 것처럼 보이는 다른 진리들을 융화시키려는 노력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귀를 막고 이를 갈며 패자 쪽에 들어갑니다. 이 시대에 끝에 가서, 한 선지자가 올텐데 그들은 그가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에 눈이 먼 자들이 될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옳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소경된 가운데 그들은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눈이 멀었을 뿐만 아니라 벌거벗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눈멀고 벌거벗었으면서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의 상태만큼 비참한 것은 없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런 상태가 될 수 있는 것은 딱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그는 정신이 돈 사람입니다. 그는 이미 깊은 망각의 늪에 빠진 사람입니다. 모든 기능이 상실되고, 영적인 기억상실증에 걸렸습니다. 또 무슨 뜻이 될 수 있을까요? 성령이 이 마지막 날의 교회를 떠나셨다는 뜻이 될 수 있을까요?(Eng.p. 349) 사람들이 로마서 1:28에서 말씀된 것이 그대로 일어나도록 자기 마음에서 하나님을 몰아냈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을까요?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분명히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난 것처럼 보입니다. 여기에 자기들은 하나님 편에 있고 하나님을 알며 그의 성경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벌거벗고 눈멀지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속아 넘어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잘못된 영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택함을 입은 자들은 속지 못합니다, 하지만 다른 이 사람들은 속아 넘어갔음에 틀림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했기 때문에 눈멀게 된 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돌보심과 보호를 떠남으로써 스스로 옷을 벗어 벌거벗고 자신의 구원 방식을, 조직으로 자신의 바벨탑을 세우려고 애쓰던 자들입니다. 그들이 총회와 연합회와 기타등등을 형성할 때 그들이 자신의 눈에는 얼마나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옷을 입은 것처럼 보이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하나님은 그것을 모두 다 찢어 버리시고 그들은 벌거벗은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이 조직들은 적그리스도의 진영, 가라지 밭 속으로 인도해 마침내 묶여 불태워지게 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정말로 동정받아 마땅한 자들입니다. 네, 그들을 동정하시고 경고하시고 간구하십시오, 그런데도 그들은 불탈 소재가 되는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시도를 화를 내면서 무조건 거절하고 고집스럽게 멸망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너무도 가련한 사람들인데, 그들은 그 사실도 알지 못합니다. 무뎌지고 가망이 없는 그들은 사실은 수치된 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말씀에 반항적인 그들은 어느 날엔가는 그 말씀으로 심판을 받고 무시무시한 고발을 댓가로 받아야할 것입니다.


전 시대에 주는 마지막 권면


계시록 3:18-19,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하나님의 권면은 딱부러집니다. 핵심을 찌르는 권면입니다. 하나님은 이 마지막 날의 교회에게 한 가지 희망을 제시하십니다. 그 희망은 그분 자신입니다. 하나님은,  내게 와서 사라 고 말씀하십니다.  내게서 사라 는 구절로 보아 라오디게아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영적인 산물을 위해서 예수님과 전혀 거래를 하고 있지 않다는 건 명백한 사실입니다.(Eng.p. 350) 그들의 거래는 영적인게 될 수 없습니다. 자기들은 영적이다 생각할 지 몰라도 어떻게 영적이단 말입니까? 그들 가운데 있는 행위는 바울이 말하는 것과 절대로 같지 않은데 말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립보서 2:13. 그렇다면 교회들과 학교들과 병원들과 선교 사업들과 기타등등 이런 것들 모두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그것들이 하나님의 씨와 성령이 아니라 교파의 씨와 교파의 영이라면 그것들 가운데 계시지 않습니다.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  그런데 이 사람들은 금을 엄청나게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목숨을 사서 그들을 죽인 금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성격을 비뚤어지게 하고 뒤틀리게 한 금입니다, 그것에 대한 사랑은 일만 악의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18:1-14,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 그가 준 그대로 그에게 주고 그의 행위대로 갑절을 갚아주고 그의 섞은 잔에도 갑절이나 섞어 그에게 주라 그가 어떻게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난과 애통으로 갚아 주라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황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그러므로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곧 사망과 애통과 흉년이라 그가 또한 불에 살라지리니 그를 심판하신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니라 그와 함께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들이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위하여 울고 가슴을 치며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일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 땅의 상고들이 그를 위하여 울고 애통하는 것은 다시 그 상품을 사는 자가 없음이라 그 상품은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와 세마포와 자주 옷감과 비단과 붉은 옷감이요 각종 향목과 각종(Eng.p. 351) 상아 기명이요 값진 나무와 진유와 철과 옥석으로 만든 각종 기명이요 계피와 향료와 향과 향유와 유향과 포도주와 감람유와 고운 밀가루와 밀과 소와 양과 말과 수레와 종들과 사람들의 영혼들이라 바벨론아 네 영혼의 탐하던 과실이 네게서 떠났으며 맛있는 것들과 빛난 것들이 다 없어졌으니 사람들이 결코 이것들을 다시 보지 못하리로다.  이것은 분명히 마지막 날의 조직된 교회들인데, 그 이유는 4절에서,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 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휴거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신부는 이 부유한 가짜 교회에서 이런 끔찍한 상태가 존속될 때는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금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7.  너희 믿음의 시련이...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하나님의 금은 고난의 극렬한 풀무풀에서 만들어진 그리스도 닮은 성품입니다. 그것이 올바른 종류의 금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어떤 금을 가지고 있습니까? 없어질 세상적인 금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교회는 부자이고 만족해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풍요를 영적인 상태를 가늠하는 척도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교리의 정확성과 기타 다른 모든 것들의 증거가 이제는 교회 안에 부자가 얼마나 많이 있는가에 따라 결정되고 있습니다.

 늦기 전에 와서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 그러면 너희가 진실로 부자가 되리라, 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이해하십니까? 제 말을 들어보십시오,  우리는 세상에 벌거벗고(육적으로) 나왔지만, 벌거벗고(영적으로) 세상을 뜨지 않을 것입니다.  오, 그렇습니다, 우리는 뭔가를 가지고 갈 것입니다. 그게 뭐냐하면, 우리가 가져갈 수 있는 것, 덜도 더도 아닌, 전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로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만들 뭔가를 가지고 가는가를 이제 정말로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면, 우리가 뭘 가지고 갈까요? 형제여, 우리는 우리의 성품을 가지고 갈 것입니다, 그게 우리가 가져갈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성품을 가지고 갈까요? 그건 고난의 극렬한 풀무불 속에서 고통을 당함으로 빚어진 주님의 성품과 같은 성품일까요 아니면 이 성품이 없는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유약함일까요? 그것은 우리 각 개인에게 달린 문제입니다, 그 날엔 각 사람이 각자의 짐을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 저는 라오디게아라는 도시는 부유한 도시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양면에 그림을 새긴 금화를 주조해 냈습니다. 금화는 그 시대를 특징지웠습니다--그것 때문에 상업이 번성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양면이 있는 금화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기도 팔기도 합니다. 교회에서도, 우리는 똑같은 것을 성취하려고 시도합니다. 우리는 죄로부터 나오도록 우리를 사고(Eng.p. 352) 천국에 가는 값을 지불합니다--아니면 우리는 그렇게 얘기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교회는 막대한 부를 소유하고 있어서, 때가 주어지게 되면 아무 때라도 전 세계의 상업 체제를 장악할 수 있고, 정말로 세계 교회 협의회(WCC) 회장은 공개적으로 교회는 가까운 장래에 그렇게 해야 하고, 그렇게 할 수 있고, 꼭 그렇게 하리라고 예언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금으로된 바벨탑은 무너질 것입니다. 오로지 불에 연단된 금만이 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교회가 시대를 거쳐 내려오면서 계속 행한 일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고 자신들이 만든 신조와 독단을 취해서 조직하고 세상과 연합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벌거벗은 상태에 있고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호색을 심판하고 계십니다. 교회가 이 끔찍한 상태에서 빠져나올 유일한 길은 주님의 말씀에 다시 돌아와 주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계시록 18:4,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  고린도후서 6:14-18,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그 옷들을 얻기 위해서는 값을 지불해야 하는데 그것은 따로 떨어져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안약을 눈에 발라 보게 하라.  하나님께서는 이 안약을 사야 한다고는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네, 아닙니다. 성령에는 가격표가 붙어 있지 않습니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갈라디아서 3:2. 성령의 침례를 받지 않으면 여러분은 말씀의 진정한 영적 계시에 결코 열린 눈을 가질 수 없습니다. 성령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과 그분의 진리에 눈 먼 사람입니다.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는 이 안약을 생각할 때, 저는 켄터키 주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제 동생과 저는 짚 요를 깔고 다락방에서 잠을 잤습니다. 갈라진 틈 사이로 바람이 들어왔었습니다. 우리는 겨울이 되면 때때로 새벽에 잠을 깨곤 했는데 너무 추워서 눈에 염증이 생겨 눈이 붙어서 떠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우리가 엄마를 부르며 울면, 엄마는 뜨거운 너구리 기름인가 뭔가 하는 것을 가지고 올라오셔서 눈에 낀 딱딱한 곱이 떨어질 때까지 우리 눈에 발라 주시곤 했습니다.(Eng.p. 353) 그러고나면 우리는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대에 교회에 엄청나게 차가운 외풍이 있는 것을 아실 겁니다, 그런데 저는 교회의 눈이 뭐라고 할까 얼어붙어버려 하나님이 교회를 위해 가지고 계신 것을 눈이 멀어 보지 못하지 않나 하는 염려가 듭니다. 교회는 눈을 뜨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성령의 뜨거운 기름이 필요합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교회는 능력 대신에 대치 프로그램을, 말씀 대신 신조를 계속 고수할 것입니다. 교회는 열매를 찾지 않고 숫자로 성공 여부를 가늠합니다. 신학 박사들은 믿음의 문을 닫아 버리고 모두들 들어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들어가지도 않으면서 다른 이들도 못들어가게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신학은 불신자가 쓴 심리학 교과서에서 나옵니다. 심리학 교과서가 하나 있는데 우리는 모두 다 그 책이 필요합니다,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쓰신 하나님의 심리학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설명해 주는 박사님이 필요 없습니다. 여러분 성령을 받으시고 성령께서 설명해 주시게 하십시오. 성령이 그 책을 쓰셨으므로 성령이 여러분에게 그 안에 있는 것과 그 의미들을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9-16,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야 분변함이니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그런데 성령께서 꾸짖고 계신 이 모든 것이 이 시대에 적용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침례 요한이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가 등장해서 유례없이 교회에 도전해야 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시대에 있을 일입니다. 또다른 침례 요한이 올 것이고 첫 예비자가 했듯이 똑같이 외칠 것입니다. 우리는 다음 절이 말하는 것을 봐서 그가 그러리라는 걸 압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Eng.p. 354) 계시록 3:19. 이것은 요한이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이교도들의 종교적인 광야에서 외쳤던 것과 똑같은 메시지입니다,  회개하라!  그 당시 다른 코스는 없었습니다, 지금도 다른 코스는 없습니다. 그 당시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 딴 길은 없었습니다, 오늘날도 딴 길은 없습니다. 회개하는 길 뿐입니다. 여러분 마음을 바꾸십시오. 돌아서십시오. 회개하십시오, 안 그러면 죽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다 같이 첫 구절  내가 사랑하는 자마다(as many as I love) 를 조사해 봅시다. 헬라어로 강세가  내가 라는 인칭대명사 위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는 자마다 라고 말씀하셔야 한다고 짐작하듯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이 절에서 예수님을 인간적 사랑의 대상으로 만들려고 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안됩니다! 핵심은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사실입니다. 거론되고 있는 것은 우리들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우리는 그의 구원과 그의 목적과 그의 계획에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고, 더욱 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가르침의 진리 안에서 더욱 더 굳건히 확증을 받습니다. 그가 로마서 9:13에서 말씀하셨듯이.  내가 야곱은 사랑하였다.  그러면 그것은 하나님이 오직 그 많은 이들만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게 가까이 오지 아니한 자들의 사랑을 기다리시면서, 만족해 하고 계신다는 말이 성립되는 겁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로마서 9:13에서 또한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에서는 미워하였다.  그리고 11절에서 성령은 담대하게 외칩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이 사랑은  선택적인 사랑(Elective Love) 입니다. 그것은 그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적 공로와는 관계가 없는 사랑인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이 정말로 행위나 인간이 속에 가진 모든 것에 반대되는 택하심 가운데서 서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 자식들이 나기도 전에  하나님은 이미,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의 자녀들에게,  내가 사랑하는 자마다 책망하여 징계한다.  하십니다. 책망한다는 것은 꾸짖는다는 겁니다. 꾸짖는다는 것은  잘못을 고치려고 드러낸다 는 것입니다. 징계한다는 것은 벌을 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문제의 수정을 염두하고 있기 때문에 단련시킨다 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히브리서 12:5-11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Eng.p. 355) 참 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지금 이 말씀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가족, 아들들, 자신과 같은 아들들로 이루어진 가족들이 사랑 안에 있는 것을 소원하셨습니다. 거기 하나님 앞에는 온 인류가 진흙 한 덩어리로 놓여 있습니다. 그 한 덩어리에서 그는 이제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만드실 것입니다. 선택은 하나님이 혼자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영으로 태어난 그 선택된 자들은 그들이 신앙 생활에서 그분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훈련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오래참음과 온유하심과 자비하심을 가지고 질책하십니다. 그는 못박힌 손으로 징계하십니다. 때때로 이 토기장이는 작업하던 그릇을 그가 원하는 대로 다시 세우기 위해서 그것을 완전히 망가뜨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입니다. 그게 그분의 사랑입니다. 다른 사랑의 표현은 없습니다. 있을 수도 없습니다.

오, 적은 무리여,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이 시대는 빠르게 끝이 나고 있습니다. 그러할 때, 그 가라지들은 한데 묶일 것입니다, 그런데 삼겹줄이 쉽게 끈기지 않듯이, 그들은 정치적, 물질적, 영적(사탄적) 힘인 엄청나게 센 삼중의 힘을 가질 것이고, 그리스도의 신부를 멸하고자 할 것입니다. 신부는 고통을 받겠지만 견뎌 나갈 것입니다. 이 땅에 임할 그런 일들을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3:1.

 열심을 내어 회개하라.  그런데 이 거짓 교회는 열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열심은 글자그대로 유대인들의 열심입니다, 요한복음 2:17,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그러나 그것은 그릇된 열심입니다. 그것은 그들 자신의 건물 전을 위한 열심입니다. 자기들의 신조와 독단과 조직과 자신들의 의로움을 위한 열심입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들의 생각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몰아냅니다. 그들은 성령을 폐위시키고 사람들을 지도자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한 분이신 영생을 옆으로 제끼고 그것을 선행으로, 아니 선행이라기 보다는 교회에 순응하는 걸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열심을 내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나는 잘못됐습니다. 라고 외치는 열심입니다. 그런데 누가 자기가 틀렸다고 말할까요?(Eng.p. 356) 이 모든 교파들이 뭘 근간으로 삼고 있죠?--정통성에 대한 주장, 하나님께로 났다는--자기들이 옳다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전부 다 옳을 수는 없습니다. 사실 그들 중 한 교파도 옳지 않습니다. 그들은 죽은 이들의 뼈로 가득한 회칠한 무덤입니다. 그들은 아무런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무런 입증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조직 가운데서 자신을 나타내신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그렇다고 말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자기네가 옳다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말하는 게 그렇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입증된  주께서 가라사대 가 필요합니다, 그들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제 저는 여기서 이 말씀을 하고자 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거짓 교회에게만 회개하라고 하시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이 절에서 하나님은 그의 택함받은 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들도 뭔가 회개할 게 있습니다. 많은 그의 자녀들은 아직도 그 거짓 교회들 안에 있습니다. 그들은 에베소서 5:14이 말하는 자들입니다,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잠자는 것은 죽은 게 아닙니다. 이 사람들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들은 저 밖에 있는 죽은 교파들 안에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과 함께 떠내려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잠을 깨라! 네 어리석음을 회개하라 고 외치십니다. 그들은 그들의 영향력을 빌려주고 있고, 시간과 돈과, 실제로 목숨까지도 이 적그리스도 조직들에게 주고 있는데 그렇게 함이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회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회개해야 합니다. 그들은 마음을 바꾸고 진리를 향해 돌아서야 합니다.

네, 이 시대는 대부분 회개할 필요가 있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회개할까요? 말씀으로 돌아올까요? 다시금 사람들의 삶 속에서 성령을 보좌에 앉힐까요? 다시금 예수를 유일하신 구세주로서 존경할까요? 저는 아니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다음 절은 충격적이고 경악할 이 시대의 마감의 진리를 계시해 주기 때문입니다.


교회 밖에 계신 그리스도


계시록 3:20-22,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개인 사역자들이 전도하면서 예수님이 각 죄인의 마음 문에 서서 들어가시려고 문을 두드리는 걸로 사용하기 때문에 이 절을 두고 많은 혼동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만일 죄인이 문을 열면(Eng.p. 357) 주님이 들어가시겠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절은 개인인 죄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전 메시지는 각 시대마다 각 메시지가 그랬듯이 총체적인 것입니다. 2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그래서 이것은 마지막 시대의 교회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이것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끝이 다가올 때의 교회 상태입니다. 이것은 한 사람에게 주는 개인적인 메시지가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예수님이 계신 위치를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떠나셨습니다. 신조때문에 말씀이 밀려나고, 교황, 주교, 회장, 고문등을 위해서 성령이 폐위되고, 행위를 나타내는 프로그램이나 교회 가입이나 어떤 타입이든 교회 체제에 순응케 하는 걸 위해서 구세주께서 밀려난다면 이것은 당연한 결과나 결말이 아닙니까? 더 어떻게 그를 대적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배교입니다! 이것은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적그리스도에게 문을 열어 놓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자기 아버지의 이름으로 와서(예수) 영접받지 못하면, 배척당하면, 그러면 자신의 이름을 가진(거짓말쟁이요 위선자인) 다른 이가 올 것이고 그들은 그 사람을 영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5:43. 그리고 그 죄의 사람, 멸망의 아들이 장악하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이 마지막 날과 관련하여 하늘에 나타날 표징을 언급하셨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우리가 토론해 오고 있는 바로 그 진리를 묘사하는 최근에 이루어진 표징을 보셨는지 궁금합니다. 그 진리는 예수님께서는 그가 교회 밖으로 밀려나는 마지막 시대까지 계속 밀려나 왔다는 것입니다. 첫째 시대에 그것은 거의 동그란 진리의 교회였다는 것을 회상해 보십시오. 하지만 원이 둥그렇지 못하게 만든 니골라당의 행위라 불리는 조그만 잘못이 있었습니다. 그리고나서 그 다음 시대에 더 많은 어두움이 슬며시 들어오더니 나중에는 빛의 공은 덜 비추고 어두움이 원을 더 많이 덮어버렸습니다. 세째 시대에 그것은 더욱 더 개기 월식이 되더니, 암흑 시대인 네째 시대에서 빛은 거의 없는 거나 다름없었습니다. 이제 이것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는 그리스도의 반사된 빛으로 비춥니다. 그는 해이고 교회는 달입니다. 그래서 이 빛의 원은 달입니다. 그것은 첫째 시대에서는 거의 보름달에 가까웠는데 줄어들어 네째 시대에서는 은빛 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섯째 시대에서 그것은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여섯째 시대에서는 앞으로 한 걸음 성큼 내디뎠습니다. 일곱째 시대에서 그것은 여전히 커지다가 갑자기 줄어들고 거의 아무 빛도 없는 상태로 기울어 빛 대신 배교의 암흑이 되어버렸고 그 시대의 끝에 가서는 암흑이 다 차지해 버려 빛을

 



































교황이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의 개기월식 사진. 옆으로 돌려서 보시기 바랍니다.


  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지금 교회 밖에 계십니다. 여기에 하늘에 나타난 징조가 있습니다. 마지막 월식은 완전히 빛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일곱 단계에서 그것은 완전한 어둠으로 변했습니다. (Eng.p. 358) [원문에 개기월식 사진이 실려 있다.](Eng.p. 359) 일곱째 단계에서, 완전히 어두워졌는데 그때는 로마 교황이 (바울 6세) 예루살렘 성지 순례를 하려고 팔레스타인에 갔을 때였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을 처음으로 방문한 교황이었습니다. 그 교황은 바울 6세입니다. 바울은 첫번째 사자였는데 이 사람은 그 이름으로 갑니다. 그런데 그의 이름은 6세로 사람의 수임을 지켜보십시오. 이것은 우연의 일치라고만 볼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가 예루살렘에 갔을 때, 달은 또는 교회는 완전히 어두움에 쌓이게 되었습니다. 이게 그겁니다. 이걸로 끝입니다. 이 세대는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지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주 예수여 그렇습니다, 빨리 오시옵소서!

이제 우리는 왜 두 포도나무가, 하나는 참이고 하나는 거짓인 포도나무가 있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왜 아브라함이 두 아들을, 하나는 육을 따라 난 자요(이삭을 핍박했죠) 그리고 하나는 약속을 따라 난 자를,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똑같은 부모에게서 두 아들이 쌍동이로 태어났는지, 하나는 하나님의 것을 알고 좋아하고 다른 하나는 똑같은 진리를 많이 알지만 동일한 성령에게서 나지 아니하여 택함을 받은 아이를 핍박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저버림을 위해서 버리시지 않습니다. 그는 택함받은 자를 위해서 버리셨습니다. 택함받은 자들은 택함받은 자들을 핍박하지 못합니다. 택함받은 자들은 택함받은 자들을 해치지 못합니다. 택함받은 자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자들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들입니다. 오, 그 버리운 자들은 종교적입니다. 영리합니다. 그들은 뱀의 씨인 가인의 혈통에서 난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바벨을 세우고, 도시를 세우고, 제국을 세우고, 여전히 하나님을 부릅니다. 그들은 참된 씨를 미워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멸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뭐든지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들도 필요합니다.  껍질은 알곡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껍질이 없으면 알곡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겨는 어떻게 되죠? 겨는 꺼지지 않는 불에 불태워집니다. 그러면 알곡은요? 그건 어디에 있죠? 주님의 곡간으로 결집됩니다. 그곳에 주님이 계십니다.

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이들이여, 조심하십시오. 주의깊게 공부하십시오. 유의하십시오. 두려움과 떨림으로 여러분의 구원을 이루십시오.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힘으로 강해지십시오. 여러분의 대적 마귀는 지금도 삼킬 자를 찾는 우는 사자같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삼가 기도하고 확고부동한 자세를 가지십시오. 지금은 마지막 때입니다. 참 포도나무와 거짓 포도나무 둘 다 성숙한 단계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곡이 익기 전에, 익은 그 가라지들은 불사르기 위해서 묶여져야 합니다. 아시겠죠, 그들은 모두 다 세계 교회 협의회(WCC)에 가입하고 있습니다. 그게 묶는 것입니다. 곧이어서 알곡을 거둘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두 영이 두 포도나무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중입니다. 가라지들 가운데서 나오십시오. 극복하기 시작하십시오, 여러분이(Eng.p. 360) 우리 주님께 마땅히 칭찬을 받을 사람이고 그와 함께 통치하고 다스릴 자격이 있다고 간주되도록 말입니다.


이긴 자의 보좌


계시록 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그런데 우리가 무얼 이겨야 합니까? 이것은 여기서 꼭 묻게 되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이 절이 말하고 있는 것은 그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뭘 이겨야 하는지가 중요한게 아니라 어떻게 이겨야 하는 지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자 이것은 논리적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겨야 할 지 안다면 우리가 뭘 이겨야 할 지가 그렇게 중요하겠습니까?

주 예수께서 이기고 계신 것을 다루는 성경 구절을 살짝 보면 우리는 이 주제의 진리를 파악할 수 있을 겁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는데, 말씀으로, 말씀 한 가지로, 사탄의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에덴 동산의 유혹과 그대로 상응하는 세 가지 주요 시험들을,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만날 때마다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이브는 말씀을 사용하지 못해서 사탄의 개인적인 꾀임에 넘어갔습니다. 아담은 말씀에 곧바로 불순종함으로써 넘어졌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지금, 저는 말씀은 실패할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이 이기는 자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고, 그것이 여러분이 이기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런데 다시 한 번 예수님께서 세상의 종교 체제를 어떻게 이기셨는지 보십시오. 예수님은 당대 신학자들에게 거듭 거듭 괴롭힘을 당할 때, 그는 계속 말씀을 적용시켰습니다. 그는 오직 아버지께서 그에게 말하라 하는 것만 말했습니다. 세상이 그의 지혜로 완전히 혼동되지 않았던 때는 한 번도 없었는데 그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개인적인 생애에서, 그는 자신과 싸우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