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ING ROOM
지금 예배를 마친다 해도, 저는 이 간증들을 들으며 참 좋은 시간을 보냈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리고... 들어와서 이 작은 예배당을 보니, 참 아름답더군요. 이곳 유티카에 사는 분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을 핑계가 없겠지요? 여러분이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이렇게 아늑하고 아름다운 곳을 마련하셨으니 말입니다. 너무 으리으리해서 오히려... 불편하게 느껴지는 곳이 아니라, 정말 마음 편히 있을 수 있는 곳입니다. 그저 아름답고 깨끗하고 단정합니다. 저는 교회가 그런 것이 좋습니다. 그레이엄 형제님이 읽어 주신 짤막한 시, 두 편 다 정말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대개 남을 깎아내리려는 사람들은 자기가 들켜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지요. 저도 그런 사람 중 하나입니다. 그레이엄 형제님은 여러 번 들키셨습니다. 그러니 저는 그게 무슨 뜻인지 잘 압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밸러드 앤드 밸러드에 일자리를 구하러 갔습니다. 회사에서는 그에게 종이에 서명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가 서명을 하려는데, 연필 끝에 지우개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회사 사람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지우개가 없군요.” 그는 “저는 실수를 하지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밸러드 씨가 말했습니다. “그러면 당신을 쓸 수 없겠군요. 아무 일도 안 할 테니까요.” 그러니 대략... 저는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실수를 하지 않는다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셈이겠지요. 하지만 제가 사람에게서 좋아하는 점은 이것입니다. 실수를 했을 때, 참된 군인은 기꺼이 일어나 다시 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부르곤 하던 짤막한 찬송이 있었습니다. “제가 넘어지거든”, 아니면 “제가 실패하거든”, 뭐 그런 가사였는데, “일어나 다시 해 보게 하소서. 주님, 저를 용서하시고 한 번만 더 써 주소서.” 저는 하나님께 그 기도를 하도 많이 해서 제 자신이 거의 부끄러울 지경입니다. “일어나 다시 해 보게 하소서.” 끊임없이 넘어지지만, 그때마다 주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셔서 제가 다시 돌아오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우리가 돌아보면, 하루 중 거의 한 시간도 잘못을 하지 않고 지나가는 때가 없습니다. 그런데 작은 잘못과 큰 잘못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큰 잘못입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도 날마다 죽어야 했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날마다 죽어야 하겠습니까? 그리고 어떤 사람이 잘못을 하고 그것을 바로잡으려 한다면, 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태도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레이엄 형제님, 오늘날 교인들이 크게 놓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을 다시 일으켜 주려고 하기보다, 자꾸 더 아래로 밀어 버립니다. 아시겠죠? 우리가 가장 밑바닥에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몸을 굽혀 우리를 일으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런 영을 가져야 합니다.
이름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군요. 여기 형제님들 중에는 아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곳에 올라온 뒤로 줄곧 그 이름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도망친 종을 붙잡은 적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그 종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어쨌든 그는 큰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얼마나 사랑하게 되었던지, 그 종의 주인에게 이렇게 전했습니다. “이제 그는 사랑하는 형제가 되었습니다. 그가 저지른 모든 일과 당신에게 진 모든 빚을, 아시겠죠, 내 회계장부에 넣으십시오. 내가 들를 때 갚겠습니다.” 보십시오. 바울은 그리스도인으로 오래 살아오면서 용서가 무엇인지,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았습니다. 자신도 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용서를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용서가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 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방금 그레이엄 형제님이 버스티 형제님에 대해 하신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분은 크리치 자매님의 아버지인 로저 형제님입니다. 며칠 전에 수술을 받으셨는데, 암이 발견되어 의사들이 그냥 다시 봉합했습니다. 그러니 그분을 위해 계속 기도합시다. 그런데 참으로 감미로운 일이 있었습니다. 크리치 형제님이 그분을 찾아가 달라고 제게 전화하셨습니다. 저는 그분이 병원에 계신 줄 몰랐습니다. 제가 병실에 들어가자 그분이 말했습니다. “빌 형제님, 여러분이 누구에게 손을 얹는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습니다.” 저는 “그렇지요, 버스티”라고 했습니다. 버스티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별명이고 실제 이름은 에버렛입니다. 저는 “그렇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분은 “제가 왜 여기 들어왔는지 이제 알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제가 들어온 뒤로 주님께서 계속 저와 함께 계셨습니다. 조금 전에는 무언가가 제게 손을 얹었습니다.” 그리고 방 한구석에서 무지개를 보셨습니다. 바로 그때, 어떤 일이 그 시간을 향해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는... 크리치 자매님의 아버지라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훌륭한 분입니다. 여러 해 전에 제가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분에게 침례를 준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레이엄 형제님,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참으로 헌신하고 다시 태어나는 체험에 그분은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병원에서 바로 그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분은 달라지셨습니다. 그를 영생에 이르도록 정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무지개를 주셨습니다. 무지개는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맺으신 언약을 지키신 것입니다. 이제 그분은 떠날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참 기쁩니다. 그분은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입니다. 조금 전... 아니, 오늘 아침에는 오랜 친구에게 와 달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분을 찾느라 꽤 애를 먹었습니다. 여러분 중 많은 분이 시내에 사시던 모스 부인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러들 형제님도 조금 전에 그곳에 다녀오셨습니다. 그분은 며칠째 의식이 없으신데, 계속 누군가를 부르고 계십니다. 제가 들어갔을 때도 제 이름을 부르고 계셨습니다. “빌리는 착한 아이야. 고생을 많이 했지. 내가 가기 전에 그 애를 보고 싶어.” 잠깐 기다리셨다가 또 “아직 그 애를 못 봤니? 빌리를 보고 싶어”라고 하셨습니다. 몇 분 뒤에는, 아, 사오십 년 전에 세상을 떠난 남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남편과 이야기를 하시더니 사랑하는 다른 이들과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아시지요. 문에 아주 가까이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분은 눈이 완전히 멀어 어둠의 세계에 계십니다. 나이가 아흔입니다. 아흔이 다 되셨습니다. 여든아홉 살하고 몇 개월쯤 되셨지요. 그런데도 그분의 눈은 저편에 너무 가까이 가 있어서, 이편에 있는 것은 보지 못하시면서 저편에 있는 것들은 보십니다. 그런 생각을 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이가 인생길의 끝에 이를 때, 그 모습을 잘 보십시오. 저의 오랜 동역자인 보스워스 형제님도 그랬습니다. 약 2년 전, 그분이 임종을 앞두셨을 때 미다와 저는 그분을 뵈러 플로리다로 급히 내려갔습니다. 거의 여든 몇 살, 제 기억으로는 여든넷이셨습니다. 그분은 저와 함께 아프리카 집회에 갔다가 막 돌아오신 참이었습니다. 그 경건한 노인이 방 한구석에 누워 계셨습니다. 제가 들어가자 가느다란 노인의 팔을 저를 향해 내미셨습니다. 약 70년 동안 설교해 오신 노장이셨습니다. 저는 그분을 이렇게 품에 안고 외쳤습니다.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것의 기병들이여!” 저는 침대 가장자리에 그분과 함께 앉아서 그분의 머리를 제 어깨에 기대어 드렸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저를 토닥이시며 말했습니다. “아들아, 포기하지 말게. 서둘러 사역의 현장으로 나가게. 우리에게 시간이 얼마 없으니.” 저는 “떠나실 것을 알고 계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분은 “그렇네. 이제 떠나네. 곧 갈 거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브래넘 형제님, 한 가지 말해 주고 싶네. 지금이 내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라네”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보스워스 형제님, 임종을 앞두고 계시면서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분은 말했습니다. “내가 이 오랜 세월 사랑해 온 그분께서, 어느 순간이든 저 문으로 들어와 나를 데려가실 것을 기다리고 있으니까.” 아내와 저는 그분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다시 갔을 때는... 그분이 돌아가시기 한두 시간쯤 전에 주무시다가 깨어나 방 안을 바라보시며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힘을 내어 몸을 일으키고 아버지와 악수하시고, 어머니와 악수하셨습니다. “여기 존 형제가 있군요. 50년 전 내 집회에서 회심한 사람이지요. 여기 아무개도 왔군요.”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자신의 사역을 통해 회심한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셨습니다.
친구 여러분,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우리가 이 모든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경배하러 모임에 올 때조차, 그저 함께 모이러 오는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합니다. 함께 모이는 것도 좋습니다. 거기에도 목적이 있습니다. 기뻐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 그것도 목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준비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을 여러 번 했지만, 다시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레이엄 형제님, 나이가 들고 제게 남은 날들이 줄어드는 것을 보면서, 저는 이 삶을 어떻게 생각하게 되었느냐 하면, 지금까지 제가 꾸어 온 악몽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 계신 많은 분이 무서운 꿈을 꾸어 보셨을 것입니다. 애써 몸부림을 치지요. 그런 경험을 하신 분이 많을 것입니다. 저도 여러 번 그랬습니다. 잠에서 깨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어떻게 된 것인지 자기가 잠들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삶도 그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이제 일이 바로잡히고 모든 것이 잘되겠다고 생각할 즈음이면, 또 무슨 일이 생겨 모든 것을 무너뜨립니다. 연세가 드신 분들, 특히 제 또래의 분들은 모두 아실 것입니다. 삶의 시련과 싸움 말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잠에서 깨어나려고 애씁니다. “오 주님...” 언젠가 어느 아침이나 어느 저녁, 그 어느 때에 저는 깨어날 것입니다. 그분 앞에 있게 될 것이며 모든 시련과 슬픔이 끝날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언젠가 깨어나 그분과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분의 모습으로 깨어나 그분을 뵙는 것이 제 마음의 소원입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지금 제가 정신이 온전할 때 확실히 해 두고 싶은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분의 부활의 권능 안에서 그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해 두고 싶습니다. 다른 어떤 일이 일어나든 상관없습니다. 가난뱅이로 죽어서 빈민 묘지에 묻히든, 제 무덤이 강바닥이나 바닷속이 되든 말입니다. 어디가 되든 한 가지를 알고 싶습니다. 그분을 알고 싶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그것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의 부활의 권능 안에서 그분을 아는 것...
저는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제 앞에 아주 커다란 문이 놓여 있고, 그 이름은 죽음입니다. 우리 모두가 지나갈 문입니다. 제 심장이 한 번 뛸 때마다 우리는 그 문에 한 박동씩 가까워집니다. 방금 뛴 그 박동은 다시 뛰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한 박동 더 가까워졌습니다. 언젠가 우리는 그 문 앞에 이를 것입니다. 그 문을 죽음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각 사람은 그것을 만나게 됩니다. 그곳에 이를 때, 저는 결코 겁쟁이처럼 들어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분의 옷과 은혜로 감싸인 채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분께서 부르시면 언젠가 제가 거기서 나오게 되리라는, 이 한 가지를 알면서 말입니다. 오늘 제가 사는 목적은 바로 그것입니다. 그분을 알고 섬기는 것입니다. 여기 계신 더 젊은 사역자들, 그레이엄 형제님과... 러들 형제님 같은 분들에게 굳게 붙들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라고 간곡히 권합니다.
오늘 저녁 들어와 이 뒤에 앉아서 그 찬송들을 들으니, 그저 그... 손뼉을 치며 부를 때, 그 빛은... “와서 먹으라.” 스넬링 자매님이 거기 서서 이렇게 손뼉을 치시며 “와서 먹으라, 주님께서 부르신다, 와서 먹으라” 하고 부르시는 모습이 아주 선명하게 보이는 듯했습니다. 정말 선명했습니다. 먼저 떠나간 그 모든 옛 성도들도 보이는 듯했습니다. 그분들은 저 경계 너머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언젠가 그분들을 뵙고 싶습니다. 연로하신 푸 어머님도 그렇습니다. 노앤 아주머니가 몹시 위독하셨던 그때, 거기 문 앞에 서 계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조지와 제가 그곳으로 걸어 올라갔습니다. “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한 사람이 한 분 계시는군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라네.” 그 모습이 아주 선명하게 보입니다. 웨버 자매님과 다른 모든 분들도...
아, 그런데 프랭키는 이제 잘 지내는 것 같습니다. 며칠 전 저녁 장거리 전화를 걸어서 그와 다시 기도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여러 해 만에 처음으로 하나님께서 만져 주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인디애나로 돌아가면, 그곳으로 다시 내려가면, 가장 먼저 할 일 중 하나가 태버내클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찬양합니다. 프랭키는 착하고 좋은 청년입니다. 그도 우여곡절이... 돈은 여기 없지요? 없을 것 같았습니다만, 프랭키도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계속 나아오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언젠가 그를 이 세상에서 데려가실 것입니다. 그러니 그를 위해 기도합시다. 말씀을 펴기 전에, 그 말씀을 쓰신 분 앞에 머리를 숙입시다.
오 위대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시여, 삶이, 이 죽을 수밖에 없는 삶이 우리의 머리카락을 희게 하고 이마에 주름을 짓게 할수록, 우리는 이 죽을 몸 안에서 영생의 떨림을 느낍니다. 그것이 목까지 차오릅니다. 주님이 아니시라면 이 삶이 끝나는 즉시 모든 것이 끝나 버릴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옛적 바울이 말했듯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노라.” 죽음은 그를 쏠 수 없었고 무덤도 그를 붙들 수 없었습니다. 그 성도의 몸을 이루었던 흙은 오늘 밤 부활을 기다리고 있지만, 그의 혼은 그리스도 앞에 있습니다. 그가 떠나서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다고 말했던 바로 그분 앞에 있습니다. 그가 살아 있는 동안 그토록 담대하게 선포했던 위대한 복음, 감옥의 창살 뒤에서도, 눈이 너무 불편해 아주 큰 글자로 기록했던 그 복음... 그는 짐승들과 싸웠고 몸에 수많은 채찍 자국을 지녔습니다... 그날까지 이 영광스러운 동일한 복음이 계속 전해지게 하려고 저희는 온 힘을 다해 싸우고 있습니다.
이 작은 예배당과 목사님, 성도들, 모든 임원, 그리고 이 교회가 자리한 작은 마을로 인해 감사드립니다. 주님, 참으로 이곳은 제가 처음 설교했던 곳입니다. 오 주님, 이 작은 교회와 교회를 세우려는 그 정신이 주 예수님께서 오실 때까지 남아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곳의 성도들과 이곳에 오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도 잃어버린 자가 없게 하옵소서. 이곳 유티카에 큰 영적 각성이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이 이 작은 마을을 휩쓸어 많은 이들을 그리스도께로 부르게 하옵소서. 주님, 이 일에 관계된 모든 이들을 축복하옵소서. 오늘 저녁 성령께서 저희에게 말씀해 주시기를 구합니다. 이들이 기대하는 일요일의 큰 집회를 허락하옵소서. 주님께서 함께하심으로 영광스러운 집회가 되게 하옵소서. 저희 죄를 용서하옵소서. 혹시 오늘 저녁 저희 가운데 주님을 알지 못하여 이 은혜로운 소망이 가슴속에서 뛰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주님, 오늘 저녁 그 소망을 찾게 하옵소서. 영생에 이르도록 솟아나는 큰 기쁨의 샘들을 찾게 하옵소서. 저희의 겸손한 기도를 들어 주옵소서. 말씀을 읽을 때 복을 주옵소서. 영께서 이 말씀을 가져다가 가장 유익을 줄 곳에 심어 주옵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합니다. 아멘. 여러분, 저는 유티카에 오면 설교하러 왔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그저 여러분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러 온 것 같습니다. 여러분을 모두 아니까요. 그저 잠깐 교제를 나누는 것이지요.
오늘 저녁에는 마태복음 11장에서 몇 절을, 15절쯤까지 읽겠습니다. 저는 그분의 말씀을 읽는 것이 좋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참되고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읽기 좋아하는 까닭은 제 말은 틀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그분의 말씀은 결코 틀릴 수 없습니다. 오늘 저녁 여기 계신 귀한 여러분에게, 이 말씀을 읽어 드리는 것만으로도 여러분이 무언가를 얻어 가시리라는 것을 압니다. 집으로 돌아가실 때 말입니다. 이것이 그레이엄 형제님이 말씀하셨던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읽을 때 주님께서 그 말씀을 우리 안에 살아 있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의 열두 제자에게 명령하기를 마치신 뒤에 그들의 도시들에서 가르치시며 선포하시려고 거기를 떠나시니라. 그런데 요한이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들을 감옥에서 듣고 자기 제자들 중 두 사람을 보내어 그분께 이르되, 선생님이 오실 그분이니이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리리이까? 하니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가서 너희가 듣고 보는 그것들을 요한에게 다시 보이되 눈먼 자들이 시력을 받고... 다리 저는 자들이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정결하게 되고 귀먹은 자들이 들으며 죽은 자들이 일으켜지고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선포됨을 보이라. 누구든지 나로 인해 걸려 넘어지지 아니할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그들이 떠나매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기 시작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느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느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보라,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들의 집에 있느니라. 아니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느냐? 대언자냐? 그러하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대언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이 사람은...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얼굴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예비하리라, 하고 기록된 말씀이 가리키는 자니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에게서 태어난 자들 가운데 침례자 요한보다 더 큰 자가 일어나지 아니하였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의 왕국에서 가장 작은 자가 그보다 더 크니라. 그날부터... 침례자 요한의 시대부터 지금까지 하늘의 왕국은 폭력을 당하며 폭력배들이 강제로 그것을 빼앗느니라. 모든 대언자들과 율법은 요한까지 대언하였나니 만일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려 한다면 와야 할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 주제의 맥락에서 잠시 이야기할 제목을 정한다면, “무엇을 보러 나갔느냐”로 하겠습니다.
요한은 그 당시 세상 사람들에게 야인으로 여겨졌습니다. 양가죽 조각을 몸에 두른 채 반쯤 벗고 있었고, 얼굴에는 덥수룩한 수염이 났으며, 머리카락도 아마 옆으로 뻗쳐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는 야인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를 미쳤다고 했을 것입니다. 광야에 사는 늙은 은둔자라고 말입니다. 교회에서는 그가 설교를 하니 광신자로 여겼습니다. 교회는 “저 사람은 틀림없는 종교적 괴짜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오늘날 있었다 해도, 그때와 다름없이 여겼을 것입니다. 세상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왔다 가고 새로운 세대가 일어나지만, 세상을 다스리는 영은 그때와 같습니다. 세상이 있는 한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요한을 아는 사람들, 그를 믿은 사람들은 참된 것을 보러 나갔습니다. 오늘날도 그때처럼 세 부류로 나뉩니다. 세상, 교회, 그리고 참으로 믿는 신자입니다. 오늘날 세상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세상, 곧 불신자, 교회, 곧 미지근한 교인, 그리고 참으로 믿는 신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교회의 흠을 찾으러 교회에 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회적 지위를 얻으려고, 혹은 자기들이 더 나은 부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어울리거나 친목을 나누려고 갑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평안을 찾으러, 하나님과 참된 것을 찾으러 갑니다. 그런 사람이 그 모임에서 유익을 얻습니다. 저는 복음이 세 부류의 사람을 낳는다고 늘 말해 왔습니다. 불신자, 가짜 신자, 그리고 신자입니다. 언제나 그랬습니다. 무엇을 위해 가느냐, 어떤 태도를 가지고 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가 전한 메시지, 세상 사람들은 그런 메시지를 들으러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때만큼이나 그것을 비난할 것입니다. 그 동일한 메시지가 전해진다면 똑같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메시지가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때까지 태어난 사람 가운데 침례자 요한만큼 큰 사람은 없었다고 하셨으니까요. 예수님께서는 그의 메시지를 인정하셨습니다. 그분은 “너희가 갈대를 흔드는 바람, 무엇에나 이리저리 굽혀지는 그런 것을 들으러 갔느냐? 요한은 그렇지 않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좋은 옷을 입은 사람을 보러 갔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좋은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보러 갔느냐? 선지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요한은 선지자보다 더 큰 사람이었다. 네 얼굴 앞에서 네 길을 예비하리라고 예언된, 곧 미리 말해 둔 사람이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요한은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보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을 끈 것은 요한의 어떤 점이었습니까? 어떤 이들은 반쯤 벗고 온몸에 털이 난 채 팔을 휘두르는 야인을 보러 갔습니다. 그는 꽤 거친 모습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팔과 손에도 털이 났을 것입니다. 그는 엘리야의 완전한 모형이었고, 엘리야는 털이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그를 보러 갔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저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러 갔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에게 반대하려고 갔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거기서 어떤 유익을 얻을 수 있는지 알아보려고 갔습니다. 그가 오늘날 온다 해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오늘날 그가 이곳에 있거나 그의 메시지가 그때와 똑같이 계속 전해진다면, 똑같을 것입니다.
자, 그러면... 그때 그의 메시지가 그토록 놀라워 온 지역을 뒤흔들었다면, 그가 무엇을 설교했는지 봅시다. 그가 맨 먼저 전한 것은 모든 사람을 향한 회개였습니다. 그런데 회개는 언제나 불신자나 교인의 눈을 멀게 합니다. 교인은 자신에게 회개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든, 여러분이 회개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면, 더 심각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일원이면서도 길거리에 있는 죄인보다 더 심각한 상태에 있습니다. 성경이 요한계시록에서 교회에 관하여 “벌거벗고 비참하며 가련하고 눈멀었으나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길거리에 있는 사람이 눈이 멀었다면, 그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가난하다면 끔찍한 일이고, 벌거벗었다면 끔찍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 참으로 가련한 점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고 교회에 속해 있으면서도 자기에게 회개가 필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그 말을 하면 발끈합니다.
요한이 그 교회 사람들에게 회개를 전하기 시작하자,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보시오. 우리에게는 아브라함이 우리 아버지로 있소. 광야에서 나오는 이런 거친 설교자들, 배우지도 못하고 교단에도 속하지 않은 무리는 필요 없소. 그들이 고함치며 떠드는 것은 하나도 필요 없소. 우리에게는 아브라함이 우리 아버지로 있으니까.” 그 동일한 메시지는 오늘날 교회도 눈멀게 할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대뜸 “그리스도인이십니까?”라고 물으면, “그렇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러고는 곧 “어느 교단에 속해 계십니까?”라고 하지요. 교단에 속한 것이 나쁘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어떤 이는 “저는 감리교인입니다. 침례교인입니다. 장로교인입니다”라고, 자신이 속한 교회가 어디인지 말할 것입니다. 그것은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질문의 답이 아닙니다. 여전히 회개가 필요합니다. 회개는 사람들을 뒤흔듭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회개가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저는 집사입니다. 저는... 교회에서 이런저런 일을 합니다.” 그것이 아무것도 면제해 주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회개가 필요합니다.
요한은 그저 하나님의 약속을 확증하며 지식에 치우친 종교를 거슬러 설교하고 있었습니다. 그 동일한 메시지가 오늘날 전해진다면, 그때만큼이나 종교인들 사이에 큰 소동을 일으킬 것입니다. 차이라면, 그때는 아브라함이 우리 아버지라고 했다면 오늘날은 “나는 아무개 교회의 교인이라는 것을 알아두시오”라고 한다는 것뿐입니다. 요한은 말했습니다. “그러나 도끼가 나무의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지느니라.” 또 말했습니다. “그분께서 손에 키를 들고 오시며, 타작마당을 철저히 정결하게 하시고, 껍질을 태우시며, 알곡을 모아 곳간에 넣으시리라.”
오, 예수님께서 그와 같은 사람은 태어난 적이 없다고 하신 것도 당연합니다. 요한이 이렇게 한 까닭은 그가 특별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갖추실 때는, 하나님 자신의 재료로 갖추어 주십니다. 사람들이 광야로 나간 것은 정치인의 연설 같은 지적인 강의를 들으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갔을 때 무엇을 들으러 갔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요한의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은 어머니의 태에서 태어날 때부터 성령으로 충만했던 사람의 말을 들었습니다. 복음을 두고 타협하는 사람의 말을 들은 것이 아닙니다. “이쪽이 옳고 저쪽은 그르다”라고 다투는 교단의 말을 들은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마음을 찌르는 복음의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요한은 성령 침례를 전했습니다. 자신에게 없는 것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받은 것을 전했습니다. 오늘날 사역의 현장으로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도 성령 침례 없이는 복음을 전할 자격이 없습니다. 사역자의 첫째 자격은 성령으로 충만한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러 갔느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그분은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요한은 잘 차려입고 사교계에 어울리는 부류의 설교자가 되기에는 할리우드와 너무도 거리가 멀었습니다. “무엇을 들으러 갔느냐? 훌륭한 교육을 받은 사람이냐?” 역사에 따르면 요한은 아홉 살에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배웠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의 대전도 집회 책임자를 보러 갔습니까? 집회를 마련하고 모든 교회의 협조를 이끌어 낼 수 있는 달변가 말입니다. 물론 아닙니다. 그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꾸짖었습니다. 목회자 협회를 뱀 무리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오 독사들아, 누가 너희에게 경고하여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게 하더냐? 너희 속으로 ‘우리는 여기에 속했다, 저기에 속했다’라고 말하기 시작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에게 자손들을 일으키실 수 있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은 침례자 요한과 같은 설교가 더 많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는 말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보았을 때... 그가 결혼과 이혼에 관하여 설교할 때, 곧고 바른 복음을 그대로 전했습니다. 그는 그 말을 거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런 사람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인 것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 죄인이라 해도, 죄인으로 태어난 데 대해서는 책임이 없습니다. 죄인으로 남아 있는 데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여러분을 위해 길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죄인이라는 것은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죄인이라는 이유로 지옥에 보내시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 때문에 지옥에 보내십니다. 여러분이 바른 길을 택하기를 거절했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고통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자신의 확신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하여 자기 혼을 그 영원한 목적지로 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지옥에 보내지 않으십니다. 한 번도 그러신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러지 않으실 것입니다. 사람들이 구원의 길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하기 때문에 스스로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십니다. 아무도 멸망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결코 원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빛 가운데 걷기보다 어둠 가운데 걷기를 좋아합니다. 그 까닭은 그들이 그런 상태로 태어났고 빛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자들이 동서남북에서 와서 죄인이 가는 길에 장애물을 놓습니다. 찬송 예배와 간증과 설교를 그 길을 가로질러 놓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일부러 그것들을 뚫고 지나갑니다. 그러고는 하나님께 책임이 있다거나 잘못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자비가 충만하셔서 아무도 잃어버린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사람은 잃어버린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자기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빛 가운데 걷기를 거절합니다. 그것이 그를 잃어버린 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좋습니다. 이제 요한을 봅시다. 그는 지식에 치우친 이런 설교를 반대했습니다. 그는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협조를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정도 크기의 마을에서조차, 그레이엄 형제님이 “이제 이곳에서 부흥회를 열고 온 마을을 다니겠습니다”라고 해 보신다면 어떨까요. 형제님이 부흥회를 여실 때 보니, 네거리의 작은 표지판에 “유티카 부흥회”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어느 교회인지는 쓰여 있지 않았습니다. 그저 부흥회가 열리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오십시오. 누구나 환영합니다.” 이 지역 목사님들을 한 분씩 찾아다니셨다면, 모두의 협조를 얻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이곳에 와서 형제님과 대전도 집회를 연다면, 빌러 형제님과 러들 형제님 등 모두가 함께 모여 제퍼슨빌이나 뉴올버니, 혹은 어디서든 대전도 집회를 연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설교와 성령으로 사람들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들은 “우리는 그런 일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저 사람들은 어느 신학교 출신입니까? 누가 뒤를 봐줍니까?”라고 할 것입니다. 요한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우리의 자격증은 여러분 바리새인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하라고 나를 부르셨습니다. 그것이 내 자격증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은 모두 같은 근거 위에 서 있습니다. 교회가 여러분을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은 하나님이 보내시는 것입니다. 요한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러 나갔느냐?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 감리교인이나 침례교인이나 장로교인을 보러 갔느냐? 무엇을 보러 갔느냐? 그가 옷을 잘 차려입었더냐? 말솜씨가 뛰어났더냐?” 그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거기 서서 잘못된 모든 것을 책망한 것밖에 없습니다. 분봉왕까지도 그를 보러 나갔습니다. 한 지방의 통치자인 그 사람이 자기 형제의 아내와 살면서 탈것을 타고 그곳에 나왔습니다. 요한은 그에게 다가가서 “당신이 그녀를 취하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무엇을 보러 갔습니까? 교단 설교자를 보러 갔습니까? 학식 있는 연설가를 보러 갔습니까? 오늘날 세상이 원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 것입니다. 세상은 말솜씨가 뛰어난 것, 크고 유명한 천막들과 깃발들, 혹은 훌륭한 신학 박사, 모든 교회의 협조, 지적인 강연을 앞장서 이끄는 지성인들을 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을 보면, 대개 어딘가 골목이나 길거리에 서 있거나 작은 건물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순수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입니다. 형제여, 그는 도끼를 나무뿌리에 대고,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아랑곳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며 홀로 섭니다. 무엇을 보러 나갔습니까? 높은 교육을 받은 사람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그는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아홉 살에 광야로 들어가 서른 살에 나와 회개를 전하며 바리새인들을 꾸짖었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그는 그런 사람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엘리야의 영이 그 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옷을 입는 것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의 본성이 그랬습니다. 제멋대로 사는 여자들을 책망하는 설교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엘리야의 영이 그 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헤로디아에게... 그 여자의 면전에서 호되게 꾸짖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말했습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그가 받은 기름부음이었습니다. 그는 엘리야였습니다.
그렇다면 남자든 여자든... 여러분에게 어떤 기름부음이 있는지가 여러분의 정체를 드러냅니다. 여러분 안에 어떤 영이 있든, 그것이 여러분을 움직입니다. 여러분은 영에 의해 움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그리스도인, 곧 신자 위에 계신다면, 그가 독특한 사람이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의 안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도 당연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그를 움직이시니, 그는 영께서 움직이시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이 그곳에 내려가서 “아, 저것도 괜찮습니다. 이것도 괜찮습니다”라고 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엘리야의 영이 그 위에 있는 한, 그는 엘리야처럼 행동했습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이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겠어”라며 출발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처음에는 잘 출발합니다. 그런데 어느새 여섯 달쯤 지나면 다시 뒤로 돌아가기 시작하고, 이리저리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때 바로 기름부음이 그들에게서 떠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한, 그 영이 여러분을 그리스도와 같이 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잘못 알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나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위대한 분이셨습니다. 본이 되시는 사람이셨습니다. 사람이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 임마누엘이셨습니다. 누구보다도 겸손하셨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낮추기만 할 수도 있습니다. 너무 자신을 낮추다 보면 마귀가 여러분을 꼭두각시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분은 겸손하게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자신의 손에 대못을 박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실 만큼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나 밧줄을 엮어서 돈 바꾸는 자들을 그 집에서 내쫓으실 만큼 강한 분이기도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요한은 온유하고 겸손할 줄 아는 참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요르단 강가에 설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큰 회당이나 설교할 장소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겸손했습니다. 밝고 푸른 하늘 아래를 택했습니다. 교회를 목회하려면 얼마의 돈이 있어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요구하지 않을 만큼 겸손했습니다. 그는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습니다. 그 나라에서는 메뚜기를 통조림으로 만듭니다. 아주 크고 긴 메뚜기인데, 절이기도 하고 훈제하기도 하며 온갖 방법으로 먹습니다. 그가 먹고 산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옷은 양가죽 한 조각을 몸에 두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보러 갔느냐? 무엇을 보러 갔느냐? 바리새인들과 타협하는 사람, 온갖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사두개인들이 오면 그들과 한편이 되는 사람이냐? 오늘은 이쪽이었다가 내일은 저쪽이 되는 사람이냐?” 그분은 “너희가 그런 것을 보러 간 것은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잘 차려입은 사람을 보러 갔느냐?” “아닙니다.” “지식인이냐?” “아닙니다.” “무엇을 보러 갔느냐?” 그분은 “가서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요한에게 보이라. 다리 저는 자들이 걸으며 눈먼 자들이 보고 귀먹은 자들이 들으며 죽은 자들이 일으켜지고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선포된다. 나로 인해 걸려 넘어지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오, 그것이 메시아의 표적이었습니다. 요한에게 보여 줄 표적이었습니다.
오늘날 참된 성결 교회가 아무리 넘어지고 있다 해도, 바로 그것이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보여 주는 표적입니다. 혼을 구원하는 순수한 복음을,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위한 그 복음을 지키며 서 있는 남녀들 말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들어가면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낄 만큼 교회에서 그럴듯하게 차려입은 귀족 같은 무리가 아니라,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그곳에서 복음이 전해집니다. 병든 자들이 낫습니다. 그들이 병든 자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표적과 이적으로 그들의 사역을 확증하십니다. 그곳에서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해집니다. “가서 이 일들을 요한에게 보이라.” 오, 하나님께서 교육도 받지 못한 그 사람, 입을 옷 한 벌도 없고 어깨에 걸칠 겉옷도 없으며, 머리 둘 곳도 없고 앉아서 제대로 된 식사 한 끼 먹을 수도 없던 그 사람을 들어 쓰셔서 나라들을 뒤흔드셨습니다. 할렐루야!
아, 그 생각을 하면 제 안에서 무언가가 깨어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며칠 전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내가 쉰 살이오. 여기 오래 더 있지는 못할 거요.” 그러고는 밖으로 나가 숲에 서 있었습니다. 사냥하러 나갔던 것입니다. 숲속에 잠시 서서 그 일을 생각했습니다. “쉰 살인데, 무엇이 문제인가?” 그때 무언가가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50분짜리 일을 시키려고 너를 50년 동안 훈련하실 수도 있다.” 어떤 훈련이었든,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서 40년의 섬김을 받으시려고 그를 80년 동안 훈련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훈련하고 계십니다. 자신의 교회를 훈련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기꺼이 하나님께서 뜻대로 하시게 해 드리고 옳은 일을 하려 한다면, 기꺼이 그분께 자신을 내어 맡기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박한 것들을 사용하십니다.
때로는 이곳에서 여러분이 소수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소수... 하나님께서는 대개 소수 가운데 계십니다. 하지만 형제여, 그분이 움직이실 준비가 되면, 그 소수로 다수를 뒤흔드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소박한 것들을 사용하십니다. 세상을 만드실 재료를 어디서 얻으셨습니까? “있으라” 하고 말씀하시니 있게 되었습니다. 교육을 받지 못하고, 광야에서 메뚜기와 꿀을 먹으며 자라서 양가죽 한 조각 외에는 몸에 걸친 옷도 거의 없던 한 설교자를 들어 쓰셔서 온 지역을 뒤흔드셨습니다. 그의 이름은 오늘날에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무엇을 보러 나갔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소박한 것들을 사용하십니다. 한 번은 글자도 거의 모르는 사람을 쓰셨습니다. 블레셋 사람 천 명이 그에게 달려들었을 때, 그는 노새의 턱뼈를 집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쓰셨습니다. 그는 노새의 입에서 나온 보잘것없는 턱뼈를 들고 갑옷 입은 사람 천 명을 죽였습니다. 오, 그분이 높이 솟은 파도를 타시는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노새의 턱뼈로 천 명을 죽였습니다... 한 번은 거만하게 떠드는 블레셋 사람이 강 건너편에 서서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고 있었습니다. 그때도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자그마하고 마르고 여윈 소년을 들어 쓰셨습니다. 그 소년의 손에는 보잘것없는 물매가 있었습니다. 오 하나님, 물매, 가죽 조각에 끈을 붙인 작고 낡은 물매, 그처럼 보잘것없는 것으로 거인을 죽이고 한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박한 것들을 사용하십니다. 거창한 것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소박한 것을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단지 소박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사용해야 합니다. 광야에 살았던 사람이 다 요한은 아니었습니다. 물매를 가지고 다닌 사람이 다 다윗은 아니었습니다. 노새의 턱뼈를 집어 든 사람이 다 삼손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종의 기름부음 받은 손에서 사용될 때는... 모세는 손에 마른 막대기 하나를 들고 이스라엘 군대에, 아니, 이집트 군대에 맞섰습니다. 아멘. 한때 겁쟁이였던 모세는 광야 뒤편에서 게르솜과 십보라와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기름부음을 받자, 손에 마른 막대기를 들고, 아내는 노새에 올라 아이를 옆구리에 안고, 여든 살의 나이에 수염을 휘날리며 이집트로 내려가 그곳을 제압했습니다. 소박합니다. 여든 살의 노인 한 사람이 손에 마른 목자의 지팡이 하나를 들고 세상의 모든 군대에 맞서 이기고 나왔습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곳에는 겸손이 있습니다. 이곳 유티카에는 복음이 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여러분이 소수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무엇을 들으러 오십니까? 그저 “나는 교회에 다닌다”라고 말하려고 오십니까? 우리의 자애로운 형제님의 말씀을 들으려고만 오십니까? 그것도 다 좋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을 합시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려고 옵시다. 오늘 저녁 이곳을 떠날 때 그분과 함께 나가기 위해 옵시다. 나가서 잘못된 모든 것에 맞서고 잘라 냅시다. 턱뼈든 무엇이든 여러분 손에 있는 것으로 싸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기름부음 받은 손으로 소박한 것들을 사용하십니다. 여러분에게는 소박한 일들, 소박하고 작은 마을, 소박한 사람들의 작은 무리, 소박한 작은 교회, 소박한 복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에는 기름부음이 있습니다. 하나님, 저 너머에서 천둥소리를 내신 위대하고 전능하신 여호와, 별들과 태양계들을 만드시고, 보이지 않는 것들로 땅을 만드신 분... 말씀으로 그것을 존재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류를 찾아오셨을 때, 그분은 황금 병거를 타고 내려오지 않으셨습니다. 언덕 비탈의 작은 마구간으로 오기를 택하셨고, 소의 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소박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 구유에서 임마누엘이 나오셨습니다. 무엇을 보러 나갔습니까? 오늘날 무엇이 세상을 사로잡습니까? 미국에서 사람들을 가장 크게 끌어당기는 것은 무엇입니까? 온 세상에서 사람들을 가장 크게 끌어당기는 것은 무엇입니까? 모든 시대, 모든 세월을 통틀어 가장 위대한 것은 무엇입니까? 언덕 비탈의 마구간 구유에서 태어난 한 아기의 생명과 영입니다. 소박한 것들, 소박한 것들입니다.
교회여, 그것이 여러분 손에 맡겨졌습니다. 이제 그 기름부음을 받아 바르게 사용하십시오. 그분은... 아, 아이들, 많은 아이가 마구간에서 태어났습니다. 많은 아이가 구유에서 태어났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방식... 여러분이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입니다. 많은 사람이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레이엄 형제님에게도 복음을 들은 형제들이 있습니다. 저에게도 복음을 들은 형제들이 있습니다. 그에게도 형제들이 있고 다른 이들에게도 형제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입니다. 행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의... 우리는 둘러앉아 교단을 두고 다투며, 어느 교회에, 어느 단체에 속해야 할지를 논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보내 듣게 하시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택하신 백성, 자신의 선민을 보내 복음을 듣게 하십니다. 복음은 가난한 자들이 그들에게 전해지게 합니다.
얼마 전 켄터키주 산속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아이가 열 명쯤 있는 귀한 어머니가 그 무서운 병, 결핵으로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의사의 치료도 받고 자신이 아는 모든 방법을 다 써 보았지만, 병균이 그를 죽이고 있었습니다. 그를 데려가고 있었습니다. 곧 죽게 될 터였습니다. 그 열 아이 가운데... 물론 어머니는 그들을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한 아이 말고는 아무도 일을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어머니를 돕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죽어 가며 누워 있었습니다. 자리에 눕고 나서는 더 이상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이 어린 딸 하나가 빨래를 전부 했습니다. 다른 자매들은 이웃집으로 놀러 가 버렸습니다. 이 아이는 다른 아이들 밥도 지었습니다. 그들은 식사 때가 되면 집에 왔습니다. 그러고는 설거지할 때가 되면 또 가 버렸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으니, 이 아이가 모든 일을 해야 했습니다.
마침내 어느 날 죽음이 문 앞에 찾아와 어머니를 데려갔습니다. 그러자 모든 짐이 이 아이에게 맡겨졌습니다. 이제 이 아이가 그 모든 아이의 어머니가 되어야 했습니다. 가엾은 어린것은 일하고 또 일하고 또 일해서 작은 손에 굳은살이 박혔습니다. 어머니가 되려고,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우려고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습니다. 마침내 너무 고되게 일하고 제대로 먹지도 못해, 그 무서운 병이 쇠약해진 작은 몸을 덮쳤습니다. 결국 아이도 자리에 누워 죽어 가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 지역을 지나던 일요일학교 교사가 차를 몰고 와서 아이를 보러 들어가 이름을 불렀습니다. “네 병이 심각한 줄 알고 있니?”라고 물었습니다. 아이는 “제가 죽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교사가 말했습니다. “방금 네 의사와 이야기를 했는데, 네가 죽어 간다고 하더구나.” 아이는 “네, 맞아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너는 이 일을 맞을 준비가...” 그 선한 교사는 “이 일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니?”라고 물었습니다. 아이는 “네, 저는 주 예수님을 뵐 준비가 되어 있어요”라고 했습니다. “아, 참 잘됐구나. 그러면 어느 교단에 속해 있니?” 아이는 “아무 데도 속해 있지 않아요. 여기서 너무 고되게 일을 했어요. 아무도 도와주려 하지 않았거든요. 저는 어느 교단에도 속해 있지 않아요”라고 했습니다. 그 선한 교사는 말했습니다. “얘야, 너는 어느 교단엔가는 속해야 해. 그분 앞에 가면 네가 어느 교단에 속했는지 무엇으로 보여 드리겠니? 어느 무리와 함께할 거니? 어느 교단에 속했다고 그분께 말씀드릴 수 있겠니? 그분께 무엇을 보여 드리겠니?” 거기 앉아 있던 어린 소녀가 침대 밑에서 굳은살 박인 작은 손을 꺼내 보이며 말했습니다. “그저 제 손을 보여 드릴 거예요. 그분은 알아주실 거예요.” 저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분이 우리 손에 맡겨 주신 것을 가지고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 그것을 보여 드리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온 힘을 다해 그 일을 합시다.
무엇을 보러 나갔습니까? 그날 여러분이 그분을 만날 때, 그분은 여러분에게서 무엇을 보시겠습니까? 그분께 보여 드릴 모든 것이 주어져 있는데도 정작 보여 드릴 것이 하나도 없다면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기도하는 동안 그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머리를 숙입시다. 이렇게 말씀하실 분이 계십니까? “브래넘 형제님,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손을 들면서, 이제 제 이 손을 그리스도께 드려서 그분이 저를 사용하시도록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듭니다.” 손을 들고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하십시오. 손을 들면서 “제 손을 드리겠습니다. 저는...”이라고 하십시오. 여기 계신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이렇게 말씀하고 싶은 분이 있을 것입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주 예수님을 사랑하면서도 너무 게을렀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브래넘 형제님, 꼭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제 손을 듭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좋습니다. “그분으로 더 충만해지고 싶습니다. 저는 그분을 사랑하며 그날 그분을 뵙고 싶습니다. 제가 그 책을 펼칠 때, 그분이 ‘네 이름은 책에 올렸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았구나’라고 말씀하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는 혼들을 얻고 싶습니다. 나가서 무슨 일이든 하고 싶습니다. 기도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불명확한 말]. 주님께서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많은 손이 올라왔습니다. 많은 손입니다. 자, 손을 드신 여러분... 기도하기 전에 더 계십니까? 젊은 자매님,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선생님도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여기 계신 형제님도요.
이제 제가 기도하는 동안 여러분도 기도하십시오. 이렇게 말하십시오. “주 예수님, 제가 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주님께서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오늘 밤부터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내일 나가서 보여 드리겠습니다. 제 자신을 과시하러 나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알기 원해서 주님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지금 제 자신을 주님께 드리겠습니다. 제가 그동안 얼마나 게을렀는지 용서해 주십시오.” 여러분은 설교자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일요일학교 교사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언가를 하십시오. 때로는 길가에서 그저 간증하십시오.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십시오. 나가서 죄인들 가운데 일하면서 찬송을 부르십시오. 그들에게 주님에 관하여 이야기하십시오. 그렇게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하십시오... 여러분 손에 할 일이 무엇이든 있으면, 그것을 하십시오.
귀하신 아버지 하나님, 저희는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예배의 이 짧은 부분을 마치며, 말씀을 읽음으로 이곳 곳곳에 뿌려진 씨앗들을 주님께 가져옵니다. 어느 날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그 질문을 하셨습니다. “무엇을 보러 나갔느냐?” 사람들이 왜 교회에 갑니까? 그저 어떤 교회에 가입하거나 종교계에서 사회적 지위를 얻으려고 갑니까? “무엇을 보러 갔느냐?” 사교적인 교회에 들어가려고, 지적인 설교를 들으려고 갔습니까? 아니면 평안을 찾으러 갔습니까? 구원자를 찾으러 갔습니까? “무엇을 보러 나갔느냐?” 아버지 하나님, 오늘 저녁 주님의 말씀을 통해, 이곳에 온 사람 가운데 적어도 열다섯 명 이상이 손을 들었습니다. 자신의 삶을 드리기 원합니다. 이미 믿는 그리스도인들일 수도 있지만, 그들의 삶에 그것이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어쩌면 말씀을 전하는 사역이나 일요일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에 부름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에게는 할 몫이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주님, 아무리 소박한 것이라도, 턱뼈에서 마른 막대기에 이르기까지, 우리 손에 무엇이 있든 그것을 보여 드리게 하옵소서. 우리 앞에 놓인 일이 무엇이든 행하게 하옵소서. 하나님, 그들의 삶을 거룩하게 하시고 성령으로 기름부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수고가 무엇이든, 찬송을 부르거나 간증을 하거나 어떤 일을 하든, 그것이 주님의 존귀와 영광을 위한 것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 허락하옵소서.
오랜 세월 이 강단을 지켜 온 귀하고 충성스러운 그레이엄 형제님을 축복하옵소서. 그리고 이 작은 교회, 태버내클의 자매 교회를 축복하옵소서. 오늘 저녁 제가 들어와 보니 강단에 십자가 세 개가 있고 교회 장의자들이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한집안입니다. 이곳 마을에서 빛을 비추는 작은 자매 교회입니다. 하나님, 이 교회가 힘 있는 큰 교회로 자라게 하옵소서. 주님, 허락하옵소서. 복음의 빛이 이곳에서 다른 도시들로 비쳐 나가게 하옵소서. 이 회중 가운데서 기름부음 받은 설교자들이 나오게 하옵소서. 여기 앉아 있는 이 젊은이들이 일어나 세계의 다른 지역으로 복음을 가져가게 하옵소서. 집사들과 재산 관리 위원들과 모든 성도에게 힘을 주시고 축복하옵소서. 주님, 영광을 받으옵소서. 어느 밤이든 낮이든 그때가 언제이든, 마지막 부름이 들리고 저희가 높은 곳으로 소집될 때, 귀한 전리품을 가져와 주님의 발 앞에 놓게 하옵소서. 주님을 위해 얻은 것을 주님께 드리게 하옵소서. 오늘 저녁 우리 마음속에 넣어 주신 재료를 가지고 저희가 온 힘을 다해 일하게 하옵소서. 이 사람들을 축복하시고 은사들, 곧 영의 은사들을 주셔서 주님을 위해 일하게 하옵소서. 이제 저는 주님의 종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사명에 따라, 이들이 섬기도록 하나님의 손에 맡깁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옛 찬송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 어린 자매님이 반주하실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샘에 자리가 있네”를 칠 수 있습니까? 좋습니다. 몇 분이나 아십니까? “자리, 자리, 그래, 자리가 있네. 그 샘에 나를 위한 자리가 있네.” 여러 해 전 태버내클에서 그 찬송을 부르던 기억이 납니다.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부르곤 했지요. 여러분, 이런... 이곳에는 예전에 우리 태버내클에 있던 것처럼 여전히 자유로운 신앙이 있습니다. 지금도 손뼉을 치고, 주님을 찬양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여기 러들 형제님도 큰길가에 그런 예배당을 세우셨다고 하더군요. 어느 날 저녁 살짝 가서 말씀을 들어 봐야겠습니다. 그분을 밀어서 나가게 하는 데 무척 애를 먹었는데, 이제는 마침내 거기서 뜨겁게 불을 붙이고 계십니다. 러들 형제님,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좋습니다. 화음을 쳐 주십시오. 아, 그레이엄 형제님, 형제님이 시작해 주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우리가 다 노래를 잘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자리, 자리, 그래, 자리가 있네, 그 샘에 나를 위한 자리가 있네. 자리, 자리, 그래, 자리가 있네, 그 샘에 나를 위한 자리가 있네. 이 찬송이 좋으십니까? 자, 보십시오. 감리교인이든 침례교인이든 오순절교인이든, 여러분이 누구이든, 다시 부르는 동안 앞사람과 옆사람, 양옆과 뒤에 있는 분들과 악수합시다. 찬송하면서 말입니다. 자, 함께합시다. 우리 모두를 위한 자리가 있습니다. 자리, 자리, 그래, 자리가 있네, 그 샘에 나를 위한 자리가 있네, 나를 위한. 오, 자리, 자리, 그래, 자리가 있네, 그 샘에 나를 위한 자리가 있네. 오, 자리, 자리, 넉넉한 자리가 있네, 그 샘에 나를 위한 자리가 있네, 나를 위한. 자리, 자리, 그래, 자리가 있네, 그 샘에 나를 위한 자리가 있네. 참 좋지 않습니까?
여러분, 야곱이 우물을 팠는데 블레셋 사람들이 그곳에서 그를 쫓아내자 그 우물을 “악의”라고 불렀습니다. 또 다른 우물을 팠는데 블레셋 사람들이 거기서도 그를 쫓아내자, 그들은 그 우물을 “다툼”이라고 불렀습니다. 또 다른 우물, 세 번째 우물을 팠습니다. 그러고는 “우리 모두를 위한 자리가 있구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루터교회 안에 우물을 파셨는데, 그들은 루터교인 외에는 모두 그 우물에서 쫓아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성화를 통해 감리교회에 우물을 파셨습니다. 루터교는 의롭게 되는 것이었고, 그다음이 성화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물을 파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거기서도 모두를 쫓아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우물을 파셨습니다. 거기에는 이름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교단이 아닙니다. 그저 선하고 순수한 성령이며, 우리 모두를 위한 자리가 있습니다. 혹이 하나인 낙타를 타는 분이든, 혹이 둘인 낙타나 셋인 낙타를 타는 분이든,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 모두를 위한 자리가 있습니다. 자리, 자리, 그래, 자리가 있네, 그 샘에 여러분을 위한 자리가 있네. 오, 자리, 자리, 그래, 자리가 있네, 그 샘에 나를 위한 자리가 있네.
이런 옛 찬송들이 좋지 않으십니까? 아, 저는 참 좋아합니다. 설교는 때로 아주 거칠고 매섭습니다. 그러고 나서 설교를 마치면, 그것이 여러분 속을 말끔히 닦아 냅니다. 그러면 속이 다 깨끗해지고, 죄를 모두 고백하여 죄가 사라지고, 자유로워진 느낌이 듭니다. 아, 그러면 저는 그저 찬송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이 경배입니다. 바울은 노래할 때 영 안에서 노래했다고 했습니다. 경배할 때도 영 안에서 경배했습니다. 우리 자매님이 이것을 반주할 수 있는지 모르겠군요. 저도 잘 부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찬송이 좋습니다. 모르셔도 괜찮습니다, 자매님. 예수님, 저를 십자가 가까이 두소서, 거기에 귀한 샘이 있네. 모두에게 거저 주시는 치유의 물줄기가 갈보리산에서 흐르네. 십자가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 언제나 내 영광이 되소서. 들림 받은 내 혼이 강 건너 안식을 찾을 때까지.
여보, 이 찬송 좋지 않소? 여러분, 제가 이렇게 한 것은 이 훌륭한 유티카 청년들이 노래하는 소리를 듣고 싶어서였습니다. 예전에 이곳에 낡은 오르간이 있었고 여러분이 모임을 가졌지요. 유티카에 사시는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서로의 집을 찾아가서 찬송을 부르곤 했지요? 아, 그런 모임에 다시 가서 찬송을 부르고 싶습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귀한 구원자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언제인지는 모릅니다. 아침이 되기 전일지도 모릅니다.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무슨 상관이 있는지 말씀해 보십시오. 어차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위로를 받읍시다. 믿음을 가지십시오. 그분을 사랑하십시오. 예수님, 저를 십자가 가까이 두소서, 거기에 귀한 샘이 있네. 모두에게 거저 주시는, 치유의 마음을 참 편안하게 해 주지요. 갈보리산에서 흐르네. 십자가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 언제나 내 영광이 되소서. 들림 받은 내 혼이 강 건너 안식을 찾을 때까지. 내 구주께서 죽으신 십자가에서, 죄 씻음을 구하며 내가 부르짖던 그곳에서, 거기서 내 마음에 그 피가 발라졌네. 그 이름에 영광! 오, 그 이름에 영광! (그 귀한 이름.) 그 이름에 영광! 거기서 내 마음에 그 피가 발라졌네. 그 이름에 영광! 이 절을 부를 때 손을 듭시다. 나는 놀랍게도 죄에서 구원받았고, 예수님은 참 다정히 내 안에 거하시네. 거기 십자가에서 주님이 나를 받아 주셨네. 그 이름에 영광! 자, 영광을 그분의... (귀한 이름.) 오, 그 이름에 영광! 거기서 내 마음에 그 피가 발라졌네. 그 이름에 영광! 몇 분이나 천국에 가고 싶으십니까? 물론 우리 모두 가고 싶지요. 그렇습니다. 저는 가고 싶습니다.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형제들과 자매들이 저와 함께 가고 있다는 것을 아니 참 좋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풍성하고 감미로운 샘으로 오라. 가련한 네 혼을 구주의 발 앞에 던지라. 오, 오늘 잠기어 온전하게 되라. 그 이름에 영광! 그 이름에 영광! 그 귀한 이름에 영광! 거기서 내 마음에 그 피가 발라졌네. 그 이름에 영광! 참 좋습니다. 나는 놀랍게도 죄에서 구원받았고, 예수님은 참 다정히 내 안에 거하시네. 거기 십자가에서 주님이 나를 받아 주셨네. 그 이름에 영광! 그 이름에 영광! (귀한 이름.) 그 이름에 영광! 거기서 내 마음에 그 피가 발라졌네. 그 이름에 영광! 이 풍성하고 감미로운 샘으로 오라. 가련한 네 혼을 구주의 발 앞에 던지라. 앞으로 나와 잠시 무릎을 꿇고 싶으십니까? ...오늘, 온전하게 되라. 그 이름에 영광! 찬송하세, 그 이름에 영광! (귀한 이름.) 그 이름에 영광! (귀한 이름.) 거기서 내 마음에 그 피가 발라졌네. 그 이름에 영광! 찬송하세, 영광... 지금 앞으로 나와 제단 둘레에 무릎을 꿇고 싶은 분이 계십니까? 이 어린아이야, 앞으로 오렴. 와! 그 귀한 이름에 영광. 오, 거기서 내... 그레이엄 형제님, 빌러 형제님, 빌러 형제님. 영광, (러들 형제님.) ...그 이름에! 찬송하세, 영광을 그분의... 또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싶은 분이 계십니까? 성령께서 이곳에 계시는 동안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기 원하시면 앞으로 나오십시오. 거기서 내 마음에 그 피가 발라졌네. 그 이름에 영광! 이 풍성하고 감미로운 샘으로 오라. 가련한 네 혼을 구주의 발 앞에 던지라. 오늘 잠기어 온전하게 되라. 그 이름에 영광! 찬송하세, 그 이름에 영광! (그 귀한 이름.) 오, 그 이름에 영광! 거기서 내 마음에 그 피가 발라졌네. 그 이름에 영광! 찬송하세, 그 이름에 영광! (귀한 이름.) 그 이름에 영광! 거기서 내 마음에 그 피가 발라졌네. 그 이름에 영광! 이 풍성하고 감미로운 샘으로 오지 않으시겠습니까? 오, 가련한 네 혼을 ...에 던지라. 오늘 저녁 앞으로 나오지 않으시겠습니까? 무릎을 꿇고 기도하십시오. 오고 싶은 분은 누구든 나오십시오. ...오늘 잠기어 온전하게 되라. 오, 그 이름에 영광! 찬송하세, 그 이름에 영광! (귀한 이름.) 그 귀한 이름에 영광! 오, 거기서 내 마음에 그 피가 발라졌네. 그 이름에 영광!
오, 얼마나 놀라운 시간입니까. 우리가 예전에 이런 옛 찬송을 얼마나 불렀던지요. 당신에게 놀라운 시간이 되리, 나에게도 놀라운 시간이. 우리 왕 예수님을 만날 준비를 한다면, 얼마나 놀라운 시간이 될 것인가. 이렇게 영 안에서 경배하는 것이 좋지 않으십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혼 깊이 양식을 줍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빌리가 그런 마음이 된 것을 보니 참 기쁩니다. 그 마음에 복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이 찬송을 부릅시다. 피로 가득 찬 샘이 있네, 임마누엘의 핏줄에서 흘러나온 피. 죄인들이 그 피의 물결 아래 잠기면, 죄의 모든 얼룩을 씻어 버리네. 이제 우리 모두 함께 부릅시다. 그레이엄 형제님, 도와주십시오. 피로 가득 찬 샘이 있네, 임마누엘의 핏줄에서 흘러나온 피. 죄인들이 그 피의 물결 아래 잠기면, 죄의 모든 얼룩을 씻어 버리네. 죄의 모든 얼룩을 씻어 버리네, 죄의 모든 얼룩을 씻어 버리네. 죄인들이 그 피의 물결 아래 잠기면, 죄의 모든 얼룩을 씻어 버리네.
여러분, 저는 이 찬송을 생각할 때마다 예전에 들었던 한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애리조나의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팀 코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인디언들의 길잡이이자 일종의 선교사인 청년이었습니다. 그가 사막에서 방향을 잃고 빠져나갈 길을 찾지 못했습니다. 말을 타고 있었는데 물도 떨어졌습니다. 그곳에서 이삼 일 동안 길을 잃고 헤맸습니다. 살아서 나오리라는 희망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어느 집회에서 간증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앞이 캄캄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사막에서 사슴이 다니는 길을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자기가 타던 말도 거의 죽어 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암말은... 이름이 베스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 말이 너무 가엾었습니다. 그는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모래 폭풍을 두어 차례 만났는데, 말의 콧구멍이 모래로 온통 굳어 막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에 그런 스카프를 두르는 것입니다. 모래 폭풍이 불면 그것을 올려 얼굴을 가립니다. 저도 말을 타고 다니다 보면, 축축한 입김 때문에 얼굴 둘레에 모래가 이렇게 단단히 굳어 붙곤 했습니다. 그런 일이 참 많았습니다. 말을 타는데 앞에서는 소 떼 같은 것들이 먼지를 일으킵니다. 모래 폭풍이 그것을 그렇게 몰아치는 것입니다. 그는 이제 거의 자기 인생길의 끝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자신도 비틀거렸고 말도... 사람은 말보다 물 없이 더 오래 버틸 수 있습니다. 그렇게 비틀거리며 가다가 사슴 길을 만났습니다. 너무 반가워서 사슴 길로 들어가 암말에 올라타고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길을 따라 조금 내려갔습니다. “아, 그 길로 사슴이 수백 마리는 지나간 것 같았습니다.” 그는 ‘저 사슴 길은 물로 이어질 테니, 이제 물을 찾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말을 타고 가기 시작했습니다. 가다 보니 사슴 서너 마리가 한쪽으로 갈라져 나간 곳에 이르렀습니다. “말이 그 길로 가려고 하더군요.” 그는 “안 돼, 베스. 그 길로 가면 안 돼”라고 하며 재갈을 붙잡아 이쪽으로 돌렸습니다. “이 길로 가. 더 또렷하게 나 있잖아. 사슴들이 모두 이쪽으로 물을 마시러 갔어.” 그런데 “말은 돌아서서 자꾸 히힝거리기만 했습니다.” 그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톱니바퀴가 달린 박차로 말을 마구 찔러 말이 선 채 피를 흘렸습니다. 그래도 말은 가지 않았습니다. 그 작은 오솔길로 가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렇습니다. 텔레비전과 영화배우들의 길, 대단한 사람이 되려고 인기를 좇는 길을 가고 싶어 합니다. 아시겠죠? 그 작은 오솔길에는 눈길을 주지 않습니다. 천국으로 이어지는 큰길이 있다네, 거기는 희미한 오솔길이라고 하네. 하지만 멸망으로 이어지는 넓은 길에는, 끝까지 표지판과 길 표시가 있다네. 큰 소몰이가 있을 것이라 하네, 카우보이들이 어미 잃은 송아지처럼 설 때, 심판의 기수들이 그들에게 표를 하리니, 그들은 사정에 밝고 모든 낙인을 안다네. 여러분도 들어 보신 노래입니다. 그러니 나는 길 잃은 한 살배기 송아지일 테지, 그저 죽음을 선고받은 한 사람. 시골 사람들과 같은 무리로 분류되겠지, 그 기수들의 우두머리가 지나갈 때.
그는 그 생각이 났다고 했습니다. “내가 듣기로는...” 그는 말을 바라보며 생각했습니다. ‘베스, 네가 이 먼 길을 나를 태우고 왔구나. 나는 죽을 줄 알았는데 네가 여기까지 데려왔어. 말은 본능적으로 물이 어디 있는지 안다는 말을 자주 들었지. 여기까지 너를 믿었다면, 저 희미한 오솔길에서도 너를 믿겠어.’ 복음에 대한 제 마음이 그렇습니다. 여러분을 태워 나르는 말에 비유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평생 주님을 의지해 왔습니다. 인생길 끝에 이르러 길이 희미해질 때, 그분을 더욱 의지하고 싶습니다. 아시겠죠? 이 옛 신앙이 저 옛날 30년 전에 저를 구원했습니다. 그리고 이 먼 길을 데려왔습니다. 사망의 그늘진 골짜기를 다닐 때에도, 저는 마음 깊이 겪은 그 동일한 체험을 원합니다. 그때도 그것을 의지할 것입니다.
그는 말 위로 뛰어올라 그 길로 내려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얼마 가지 않아 말이 큰 웅덩이 속으로 머리부터 뛰어들었습니다. 그는 물속에서 첨벙거리며 목청껏 소리를 지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말의 콧구멍을 씻어 주고 자기 몸에도 물을 끼얹으며 소리치고 야단이 났습니다. 그가 막 물에서 나왔을 때 누군가 웃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물가를 보니 포장을 씌운 낡은 마차와 함께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술에 취해 있었습니다. 무슨 큰 모임에, 사냥 모임 같은 데 왔던 것입니다. 그들은 잔뜩 술에 취해 있었는데, 그를 아는 듯했습니다.
그들은 “나오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는 “여러분, 고맙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말했습니다. “배가 몹시 고프겠군요.” 그는 며칠 동안 길을 잃고 헤맸다고 말하며 “그렇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이 “자, 여기 사슴고기가 있소”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슴고기를 먹었습니다. 그 사람이 말했습니다. “좋소. 당신이 잭... 아니, 인디언 길잡이 팀 코이요?” “그렇습니다.” 그 사람이 말했습니다. “좋은 사슴고기를 좀 먹었으니, 이제 이 술병에서 한 모금 쭉 마시면 아주 좋을 거요.” 그러면서 그에게 술병을 건넸습니다. 그는 “아닙니다, 여러분. 고맙지만 저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다시 발을 올리고 갈 길을 물었습니다. 발을 등자에 넣고 다시 말에 탔습니다. 그러자 몸집이 작은 사람이 반쯤 취한 채 비틀거리며 다가와, 소총 하나, 윈체스터 총을 집어 들고 탄환을 장전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이봐, 팀. 우리 사슴고기가 당신 배를 채우기에 좋았다면, 당신이 너무 고결해서 우리 위스키는 못 마신다는 생각은 하지 마.” 술 취한 사람들이 어떤지 아시지요.
그는 말했습니다. “여러분, 들어 보십시오. 제가 너무 고결해서 못 마신다고 생각하는 게 아닙니다. 저는 그저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사람이 말했습니다. “아, 그따위 소리는 집어치워. 자, 이 위스키를 마셔. 안 그러면 총알을 박아 줄 테니까.” 겁을 주어 마시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팀이 말했습니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제게 총알을 박기 전에 제 이야기를 하게 해 주십시오. 저는 켄터키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술꾼으로 살다가 비명에 죽었습니다. 우리는 작고 낡은 통나무집에 살았습니다. 어느 아침 해가 떠오르며 작은 통나무집 바닥에 빛줄기가 비쳤습니다. 나무 바닥조차 없는 집이었습니다. 귀한 어머니 한 분이 옥수수 껍질을 채운 요 위에서 죽어 가고 계셨습니다. 제 어머니였습니다. 저는 겨우 여덟 살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머리맡으로 부르시고 팔로 감싸 안아 입을 맞추셨습니다. ‘팀, 나는 이제 너를 떠난다. 네 아버지는 술꾼으로, 도박을 하다가 총에 맞아 죽었단다. 팀, 내가 죽기 전에 약속해 다오. 술은 첫 잔조차 입에 대지 않고, 카드에도 손대지 않겠다고.’ 저는 어머니께 마지막 입맞춤을 드리며 그렇게 약속했습니다. 그날부터 한 번도 술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평생 한 번도요. 이제 쏘고 싶다면 쏘십시오.”
바로 그때 총성이 났습니다. 그 사람의 손에 들린 위스키 술병이 깨졌습니다. 몸집이 작고 흉한 몰골의 사람이 협곡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그는 수배자였습니다. 강도였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잠깐, 팀. 나도 켄터키주에서 왔소. 나도 어머니께 절대로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약속했소. 나는 여기 서서 당신들이 흠뻑 취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소. 그러고는 저 사냥꾼들을 모조리 머리를 때려눕히고 지닌 돈을 빼앗을 참이었지. 그러려고 여기 서 있었소. 그런데 당신의 간증을 듣자 무언가가 내 마음에 말했소. 어머니와의 약속을 어긴 것이 후회되오. 하지만 내 권총 소리가 천국의 거대한 협곡들에 메아리쳤을 때, 어머니는 내가 지금부터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서약하는 소리를 들으셨소. 이제 내가 술을 끊을 때가 되었소.”
저는 그 일을 자주 생각했습니다. 피로 가득 찬 샘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낡고 희미한 오솔길을 따라 내려간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임마누엘의 핏줄에서 흘러나온 피입니다. 죄인들이 그 피의 물결 아래 잠기면 죄의 모든 얼룩을 씻어 버립니다. 그렇게 하면 됩니다. 그 피의 물결 아래 잠기면 죄의 모든 얼룩을 씻어 버립니다. 제가 아주 좋아하는 다른 찬송이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아시리라 믿습니다. 믿음으로 주님을 우러러봅니다, 갈보리의 어린양이신 주님, 하나님이신 구원자여. 이제 제가 기도할 때 들어 주시고, 제 모든 죄책을 없애 주시며, 오늘부터 제가 온전히 주님의 것이 되게 하소서! 아십니까? 이 찬송을 사랑하십니까? 그러면 부릅시다. 일어서서 부릅시다. 믿음으로 주님을 우러러봅니다, 갈보리의 어린양이신 주님, 하나님이신 구원자여. 이제 제가 기도할 때 들어 주시고, 제 모든 죄책을 없애 주시며, 오, 오늘부터 제가 온전히 주님의 것이 되게 하소서! 삶의 어두운 미로를 걸으며, 슬픔이 사방에 드리울 때, 주님, 저의 길잡이가 되소서. 어둠이 낮으로 바뀌게 명하시고, 슬픔의 눈물을 닦아 주소서. 제가 결코 길을 잃고 주님 곁을 떠나지 않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