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ING ROOM
오늘 아침 이곳에 와서, 이 땅에 살아 또 한 번의 뜻깊은 부활절을 맞이하는 우리는 참으로 복된 사람들입니다. 부활절은 언제나 우리에게 그처럼 영광스러운 것, 새로운 소망을 가져다줍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오늘 아침 제가 저 뒤쪽 방에 들어서자 어떤 분이 저를 만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브래넘 형제님, 작년에 쇼토쿼에서 기도받은 그 아기, 아니 어린아이인지 누군지 아시지요? 심장을 꺼내서 판막인지 무언가를 고쳐야 했던 아이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 아기가 치유되어 오늘 아침 이 건물 안에 와 있습니다. 오늘 아침 여기 앉아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참 잘됐습니다. 아마 다음 예배를 시작하기 바로 전에 그 짧은 간증을 듣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자, 네빌 형제님께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 둘 중 한 곳에서 부활에 관한 성경 본문을 찾아 읽어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형제님, 벌써 읽으셨습니까? 그러면 기도할 준비를 하는 동안… 이 예배가 끝나면 이어서 치유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그다음에는 아침 식사를 하러 가십시오. 그러고 나서 아홉 시 반에 다시 돌아와 또 한 번 예배를 시작하겠습니다. 그 뒤로 치유 예배가 이어지고, 이어서 침례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침례를 받기에 얼마나 아름다운 때입니까. 아, 참으로! 부활입니다. 그분께서 다시 살아나셨기에 우리가 침례를 받는 것입니다. 여기 침례탕이 생기기 전에는 제가 사람들을 이 아래 강으로 데려가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서리가 내린 듯 서늘한 이른 아침에 그 강에서 사람들에게 침례를 주었습니다. 그 시간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참으로 거룩한 때입니다. 부활절은 참으로 뜻깊은 때입니다. 이쪽에 앉아 계신 팻 타일러 형제님을 보고 있었습니다. 바로 어젯밤에도 어떤 분과 지난번 오클라호마 집회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다시 하라고 부르실 때까지 예전에 하던 분별 사역을 내려놓으려고 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이 점을 말씀드립니다. 왜냐하면 이제 시작… 새로운 사역이 들어오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저녁, 아무도 이 일을 전혀 모르는 가운데, 저는 단상을 지나가는 한 아이에게 그것을 시험해 보았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보이지 않던 아기였는데, 완전히 눈이 멀어 있었습니다. 열여섯 살쯤 된 소년이었는데, 그 즉시 “브래넘 형제님, 저 안이 보여요!”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소년이 평생 처음으로 눈을 떴을 때 팻 타일러가 소년 바로 곁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곳에 계신 여러분도 저와 함께 큰 기대를 품고 계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언가를 행하시고 지금까지 우리가 있던 자리보다 한 단계 더 높이 올려 주시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제 머리 숙여 기도합시다.
은혜로우신 하늘의 아버지, 오늘 아침 저희가 길가의 이 작은 교회에 모였습니다. 저희에게 이 모든 것이 뜻하는 바를 생각하며, 특히 이 부활절 아침에 아버지께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부활절이 없었다면 저희는 오늘과 같은 상태에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부활절이 하나님의 모든 약속에 인을 쳤습니다. 그 약속들을 저희에게 확증해 주었습니다. 그분께서 이제껏 약속하신 모든 것이 부활절에 현실이 되었습니다. 일 년 중 저희가 기념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날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주님, 오늘 저희 마음을 위로해 주시기를 구합니다. 저희는 부활절 뒤에 오신 성령께서 저희 마음에 임하시기를 기다리고 기대하며 앉아 있습니다. 성령께서 저희를 위로하시고 저희 믿음을 크게, 능력 있게 회복시켜 주셔서, 예수님께서 저희에게 살도록 정하신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기도드리며, 특히 몸이 불편해 갇혀 지내느라 오늘 어느 곳의 예배에도 갈 수 없는 이들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시고, 이번 부활절이 그들에게 참된 부활절이 되게 하옵소서. 병상에서 일어나 평생 한 번도 누려 보지 못한 새로운 건강을 얻게 하옵소서. 주님, 허락해 주옵소서. 오늘 전 세계에서 이 위대한 일을 기념하는 모든 설교자, 주님의 모든 종에게 기름부음과 힘과 권능을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마련하신 양식을 그들의 회중, 기다리는 양들에게 전하게 하옵소서. 주님, 허락해 주옵소서. 저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저희 몫의 양식을 겸손히 기다립니다. 아멘.
이제 네빌 형제님께 성경을 읽어 주시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8장입니다. 안식일이 끝나고 주의 첫날이 밝아오기 시작할 때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돌무덤을 보러 갔는데 보라, 큰 지진이 났더라. 이는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온 뒤 가서 그 돌을 입구에서 뒤로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기 때문이더라. 그의 용모가 번개와 같고 그의 옷이 눈과 같이 희므로 지키는 자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떨다가 죽은 사람같이 되었더라. 천사가 여자들에게 응답하여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너희가 찾고 있음을 내가 아노라. 그분은 친히 말씀하신 대로 일어나셨으므로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와서 주께서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속히 가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그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셨다고 고하라. 보라, 그분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너희가 거기서 그분을 보리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느니라, 하므로 그들이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급히 돌무덤을 떠나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을 전해 주려고 달려가더라. 그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러 갈 때에, 보라, 예수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다 평안하냐? 하시매 그들이 와서 그분의 발을 붙잡고 그분께 경배하니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고하라. 거기서 그들이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그런데 그들이 갈 때에, 보라, 그 파수꾼들 중 몇 사람이 그 도시로 들어가 이루어진 모든 일을 수제사장들에게 알리매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사들에게 많은 돈을 주며 이르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그들이 잠든 사이에 그를 훔쳐 갔다, 하라. 만일 이 일이 총독의 귀에 들어가면 우리가 그를 설득하여 그를 안전하게 지켜 주리라, 하니 이에 그들이 돈을 받고 가르침을 받은 대로 하매 이 말이 이날까지 유대인들 가운데 공공연히 전해지니라. 그 뒤에 열한 제자가 갈릴리로 가서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정해 주신 산으로 들어가 그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였으나 어떤 자들은 의심하더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오셔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능이 내게 주어졌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침례를 주며 무엇이든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의 끝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느니라, 하시니라. 아멘. [녹음 중단.] …그분의 말씀을 읽은 데 그분의 복을 더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지금 이 아침 예배를 마친 뒤, 아홉 시 반에 오전 예배를 계속하겠습니다. 지금 드리는 이 예배를 부활절 새벽 예배라고 부릅니다. 지난 집회들에 관해 여러분께 전해 드릴 놀라운 일들이 있습니다. 병들고 고통받는 여러분 모두가 오늘 아침 믿음을 가지고 오시기를 바랍니다. 부활하신 이 예수님께서 오늘도 살아 계시며, 언제나 그러하셨던 그대로이심을 믿으십시오. 그분은 조금도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여기 욥기 19장에서 성경 말씀을 조금 읽으려고 합니다. 15절부터입니다. 내 집에 거하는 자들… 내 여종들이 나를 낯선 자로 여기니 내가 그들의 눈앞에서 외인이 되었도다. 내가 내 종을 불러도 그가 대답하지 아니하므로 내가 내 입으로 그에게 간청하였도다. 내가 내 몸에서 난 자식들로 인해 간청하였으나 내 숨결이 내 아내에게 낯설도다. 참으로 어린아이들이 나를 업신여기고 내가 일어서면 나를 비방하였도다. 내 절친한 친구들이 다 나를 혐오하며 내가 사랑한 자들이 나를 대적하려고 돌아섰도다. 내 뼈가 살갗과 살에 달라붙으니 내가 잇몸만 가지고 피신하였도다. 오 내 친구들아,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길지어다. 나를 불쌍히 여길지어다. 하나님의 손이 나를 건드리셨느니라.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처럼 나를 핍박하며 내 살에 만족하지 아니하느냐? 이제 내 말들이 기록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들이 한 권의 책으로 인쇄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들이 철필로 새겨져 바위에 영원토록 남겨진다면 좋으리로다! 내 구속자께서 살아 계시며 마지막 날에 그분께서 땅 위에 서실 것을 내가 아노라. 그 뒤에… 살갗의 벌레들이 이 몸을 멸할지라도 내가 여전히 내 육체 안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몸소 그분을 보리니… 다른 것이 아니요, 내 눈이 바라보리라. 내 콩팥이 내 속에서 소멸될지라도 그러하리라. 이 욥기 19장에 나오는 “나는 안다”라는 말씀을 주제로 삼고 싶습니다.
그때 이 족장은 오늘날 우리와 얼마간 비슷했습니다. 그는 깊은 고난에 빠져 있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큰 물”을 만난 것입니다. 그는 절박했습니다. 여러 날 동안 잿더미에 앉아, 자기 생명이 스러져 가는 것을 보며 위안을 줄 말을 찾고 있었습니다. 용기를 줄 무언가, 위로가 될 무언가를 찾으려 했습니다. 우선 그는 아흔 살쯤 된 노인이었고, 하나님의 손에 맞았습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서 직접 손으로 그를 건드리신 것이 아니라, 사탄이 그를 건드리도록 허락하셨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께는 일을 행하는 대행자들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쁜 일이 일어나게 하시려면 사탄을 풀어 주어 그 일을 하게 하십니다. 좋은 일이 일어나게 하시려면 그분의 종들을 내보내 그 일을 하게 하십니다.
사탄이 욥을 건드린 데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를 시험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사탄과 하나님 사이에 논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땅에 내 종이 하나 있는데 그와 같은 자가 없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그가 행한다. 그는 완전한 사람이요, 올바른 사람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사탄은 “그를 제게 맡기시기만 하면, 그가 주의 얼굴 앞에서 주를 저주하게 만들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던 욥, 그 족장은 깊은 고뇌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고 나서도 그는 어떻게든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자리를 지켰습니다. “내 구속자께서 살아 계심을 내가 아노라”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우리도 그런 자리에 이릅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여기 모인 데도 그와 비슷한 목적이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는 모두 잿더미 위에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고난이 있고,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고, 괴로운 순간이 있고, 질병이 있고, 마음의 아픔과 실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욥이 친구들에게서 위로의 말을 찾으려 했던 것처럼, 우리도 이 부활절 아침에 이렇게 모여 위로의 말을 찾습니다. 그들 중 누구도 욥에게 위안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욥에게 고난이 닥쳤다는 이유로 그가 남몰래 죄를 짓는 사람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때, 그 모든 고난 한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그를 도우러 오셨습니다.
욥에게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질병과 종기, 가족과 모든 재산을 잃은 데서 오는 고난과 마음의 아픔이 자기 목숨을 거의 앗아 가고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이 나이 많이 든 노인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무덤으로 내려가고 있다는 것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자신을 이 땅에 있게 한 누군가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가 저절로 이곳에 올 수는 없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은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와 어머니도 누군가가 이 땅에 있게 했어야 합니다.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면 맨 처음에 이르게 됩니다. 맨 처음 사람은 누가 있게 했습니까?
그는 또 이런 의문을 품었습니다. “참 이상한 일이로구나. 내가 이렇게 걸어 다니고 있고, 동물보다 고등한 생명이며 식물보다도 고등한 생명인데, 그런데도…” 그가 이렇게 말했다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나무는 죽어도 다시 살고, 꽃도 죽어도 다시 산다. 그러나 사람이 누워 숨을 거두면 그는 어디 있는가? 아들들이 와서 그를 위해 애곡하고 존경을 표해도 그는 알지 못한다.” 그는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꽃이나 식물 같은 생명은 다시 살게 하시는데 사람은 왜 다시 살 수 없는지 의아해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오늘 아침 우리가 여기에서 결론을 얻을 수만 있다면 좋겠습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 우리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절 이야기를 거듭거듭 들었고, 이리저리 여러 번 읽었습니다. 오늘 라디오 방송에서도 여러 목사님이 이 이야기를 다루는 것을 듣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아침 주님께서 제게 맡기신 이 작은 무리를 위해, 가능하다면 조금 다른 관점에서 이 이야기에 다가가고 싶었습니다. 이런 물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이런 고난을 겪습니까? 무엇 때문에 이런 일들이 닥칩니까? 왜 그리스도인이 당혹스러운 일을 겪어야 합니까? 그리스도인에게는 왜 모든 일이 완벽하게 풀리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도 그것을 압니다.
때로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뒤에 죄인이었을 때보다 더 많은 고난을 겪습니다. 물론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자의 고난이 많으나 하나님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그를 구출하시는도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고난, 낯선 감정과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낯선 일들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언제나 우리에게 유익하도록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그저 이해할 수 없을 뿐입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믿음으로 하는 일이 아니게 됩니다. 이해한 것을 따라가게 되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 일을 겪고 받아들이며,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선한 결과를 이루리라는 그분의 말씀을 믿음으로 믿습니다. 오늘, 이 아침에 우리가 그것을 붙잡을 수만 있다면! 우리의 모든 고난이… (그 고난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은 우리 중 아무도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이 우리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만 있다면…
성경의 한 구절에는 우리에게 닥치는 시련이 금 자체보다도 더 귀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시련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고백하고 침례를 받고, 삶에서 그분을 위해 살겠다고 약속하여 그분의 소유가 된 뒤에는,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시련이 그분의 영광을 위해 우리를 완전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시련이 오기 전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더욱 실제적으로 나타내실 수 있는 자리로 우리를 이끄시려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저도 욥과 함께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그것이 참이라는 것을 알 만큼 오래 살아왔습니다. 제 삶에서도 보았습니다. 피해서 돌아갈 수도, 밑으로 빠져나갈 수도, 위로 넘어갈 수도 없는 큰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하나님께서 길을 내시고 영광스러운 결과를 이루십니다. 그분의 은혜가 어떻게 그런 일을 이루는지 그저 놀라울 뿐이지만, 그분은 그렇게 하십니다. 기억하십시오. 이 모든 일 가운데서 사탄은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마음을 뒤흔들어 이렇게 생각하게 하려 합니다. “아,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나는 왜 이렇게 될 수 없었을까?”
며칠 전, 제가 평생 본 곳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화려한 곳을 나오면서… 우리 오럴 로버츠 형제님의 웅장한 건물이었습니다. 온통 대리석으로 되어 있고 어디에도 창문이 하나 없는데, 그 안이 얼마나 잘 꾸며져 있던지요. 저는 할리우드에도 가 보았고, 왕궁에도 가 보았으며, 전 세계에서 가 볼 만한 곳은 거의 다 가 보았습니다. 호화롭고 아름다운 온갖 장소와 집들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거기에 견줄 만한 것은 본 적이 없습니다. 정말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가느다란 알루미늄 선들이 내부를 엮어 놓은 모습이라니, 아, 제 평생 그토록 화려한 것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 안을 걸으며 손으로 그 기둥 장식과 거대한 화강암을 쓸어 보았습니다. 모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삼위일체의 형태로 되어 있었고, 그 조각이며 그 모든 것들이… 저는 바로 전에 토미 오스본 형제님의 사역지를 방문하여, 그가 그곳에서 주님을 위해 하는 크고 힘찬 사역을 보고 온 참이었습니다.
저는 밖에 서서 그 건물을 돌아보며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틀림없이 위선자가 되어 버렸나 봅니다. 분명 어딘가에서 버림받은 자가 되었나 봅니다. 이분들의 사역이 제 사역에서 시작되었는데 말입니다.” 또 생각했습니다. “무엇이… 주님, 제가 너무나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서 주님께서 그런 것은 하나도 제게 맡기실 수 없는 것일까요? 주님께서 대전도 집회 같은 데 쓰도록 제게 허락하신 그 얼마 안 되는 돈 때문에도, 지금 저들은 저를 교도소에 보내려 합니다. 저는 왜 이토록 위선적인 사람입니까? 아니, 저는 왜 이렇게 믿을 수 없는 사람입니까?” 옛날 욥처럼 저도 잿더미 위에 있었습니다.
그 밖에 서 있자니, 땅을 파서 만든 집에서 태어난 가난한 소년, 한 오순절 신자가 그런 일을 해서 그토록 거대한 건물을 이루어 놓았다는 그 웅장함에 거의 숨이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오 하나님, 저는 합당하지 않은가 봅니다.” 바로 그때, 그 복도들을 타고 작은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의 몫이다.” 그때 저는 생각했습니다. “오 주 하나님, 그렇다면 주님, 그저 이대로 있게 해 주십시오. 저는 배우지 못한 사람이고, 주님을 위해 그런 큰일을 이끌어 갈 지혜도 없으니까요. 그러나 주님께서 제 몫이 되어 주시는 한, 저는 주님의 것이며 주님께서 저를 이끄실 것입니다. 저는 제 자신을 이끌 수 없습니다. 오 주님, 저를 이끌어 주십시오.”
우리를 그 거룩한 모래밭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바로 그런 절박한 시간들입니다. 성경에서도 그랬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아무리 큰 고난이 닥쳐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해 하실 일을 다 마치시기 전에는 사탄이 여러분의 목숨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여러분에게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어떤 재앙도 올 수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그분께서 일하고 계십니다. 생각해 봅시다. 세상을 멸하려고 홍수가 닥쳤을 때에도 노아를 멸할 수는 없었습니다. 노아는 멸망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큰 나라에서 혹독한 속박 아래 살던 히브리 소년들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로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결단을 내려야 하는 지점에 이르렀습니다. 무언가를 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믿음이 시험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을 때 물러서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믿는 것을 굳게 붙드십시오. 그들의 믿음이 시험을 받고 절박한 순간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잿더미에 앉는 데 그치지 않고 맹렬히 불타는 용광로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그들을 멸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내 구속자께서 살아 계심을 내가 아노라”라는 이 소망을 품고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런 소망을 품고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맹렬히 불타는 용광로에서 우리를 구출하실 수 있음을 확신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형상에게 절하지 않을 것이다.”
사탄은 그들을 데려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노아를 홍수에 빠뜨려 죽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히브리 소년들을 불태워 죽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종기와 고난으로 욥을 죽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사자들도 다니엘을 잡아먹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죽음과 노쇠함도 아브라함을 데려갈 수 없었습니다. 우리 삶에 두신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여러분도, 저도 데려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기에서 위안을 얻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고난이 닥치게 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고난에 마구를 씌우시고, 그 입에 재갈을 물리셔서 자신에게 복종하게 하십니다. 그 고난은 우리를 하나님과 더욱 가까운 교제로 이끕니다. 홍수가 오기 전에는 무지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노아가 그런 상황에 몰려, 사십 일 밤낮 폭풍 속에서 떠다니고 작은 방주가 물 위에서 위아래로 요동치는 일을 겪은 뒤, 홍수가 끝나고 나서야 그는 처음으로 무지개를 보았습니다. 소망의 언약, 약속의 언약을 본 것입니다. 환난을 통과한 뒤에야 약속을 보았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약속을 보게 됩니다. 환난을 통과한 뒤에 말입니다. 저는 이런 시, 아니 찬송을 좋아합니다. “다른 이들은 상을 얻으려 싸우며 피로 물든 바다를 건넜는데, 나는 안락한 꽃 침상에 실려 본향 천국에 가야 하겠는가?” 우리는 안락함과 평안을 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실 수 있는 가장 좋은 것, 곧 시련과 환난을 주십니다. 그것은 안락함과 평안보다 낫습니다. 우리의 안식은 바로 강 건너편에 있습니다.
히브리 소년들이 더없이 큰 시련 가운데 하나를 겪으며 맹렬히 불타는 용광로에 강제로 들어가고 나서야,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과 같은 분이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고난으로 인해 하나님의 아들이 그들 가운데 서셨습니다. 뜨거운 열기를 쓸어 내는 바람 가운데 서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불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는 그 보혜사께서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다니엘은 세상의 것들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마음에 뜻을 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할 것인가, 아니면 사자 굴에 들어갈 것인가 하는 시험에 몰렸습니다. 그러나 압박이 가해져 그가 사자 굴에 던져진 뒤에야, 그 가운데 주님의 천사가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다가오지 못하게… 그 큰 불기둥이 그와 사자들 사이에 서 있었습니다. 사자들은 그를 해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시련과 시험과 고난을 통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자들에게서 구출하실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아브라함도 땅이 메마르고 가뭄이 닥치는 것을 보았고, 롯이 자기에게서 떠나 세상에서 호사스럽게 살러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축을 먹일 풀이 없다고 목자들이 투덜거리며 아우성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주시고 머물라고 하신 땅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험을 받아 인내가 한계에 이르고, 마침내 그 시험이 끝난 그날, 그는 상수리나무 아래서 엘로힘과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했습니다. 시련을 견디고, 그가 겪은 온갖 고난을 통과한 뒤에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 자리에 앉으셔서 그가 결혼한 사람이고 아내의 이름은 사라라고 말씀하셨으며, 뒤쪽 장막에서 사라가 그분을 비웃었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아브라함은 그분을 “엘로힘”이라고 불렀습니다. 시련과 환난을 겪은 뒤였습니다.
아, 오늘 교회가 정신을 차리고 깨달을 수만 있다면 좋겠습니다. 교회, 곧 오순절 교회가 고난과 시련을 겪고 비웃음과 조롱을 받은 뒤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큰 표적과 이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하루의 수고와 고난이 끝나고, 모든 것이 지나고 나면, 마침내 예수님을 뵈오리. 그토록 아름답고 신실하신 예수님이 나를 기다리시리. 하루가 다 지나면, 아름다운 보좌에서 우리를 본향으로 맞아 주시리.” 낮인 동안 일합시다.
이 위대한 사람들을 하나하나 다루자면 아침 예배 시간이 많이 들 것입니다. 그들은 시련을 겪고 하나님을 보았다고 합니다. 시련을 겪고 천사들을 보았고, 시련과 계시들을 경험하며 표적과 이적 등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 그들 중 아무도 욥이 본 것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 모든 사람이 천사들을 보고 하나님을 보고 그 모든 것을 보고도, 무덤 너머에 소망을 둘 수 있게 하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부활을 보았습니다. 부활절을 보았습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에 위로를 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나서 그는 말했습니다. “아, 내 말들이 한 권의 책으로 인쇄된다면! 아, 철필로 바위에 새겨진다면!”
보십시오, 그것은… 모든 것이 그를 대적했습니다. 종들조차 그에게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내도 낯선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 잿더미에 앉아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그 큰 시련이 닥쳤고, 그들은 이레 동안 그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아무도 그를 위로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그는 틀림없이 부활절의 환상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내 구속자께서 살아 계시며 마지막 날들에 그분께서 땅 위에 서실 것을 내가 아노라. 내가 아노라. 아, 내 말들이 철필로 돌에 새겨져 다시는 사라지지 않는다면! 내 구속자께서 살아 계심을 내가 알기 때문이라. 내가 아노라, 내가 아노라!” 욥이여, 무엇을 압니까? “내 구속자께서 살아 계심을 내가 아노라.” 알아차리셨습니까? 단지 누군가가 살아 있다는 것뿐 아니라, 그분께서 욥의 구속자이셨다는 것입니다!
아, 주님의 이름을 찬송합니다! 제가 부활절에 참여하고, 그 부활에 참여한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오늘 아침 우리도 거기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 부활에 참여하는 생명, 부활절을 가져온 부활의 생명이 우리 안에 거하기 때문입니다. “내 구속자께서… 내가 아노라.” 무엇을 압니까? “나는 추측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추측이 너무나 많습니다.) 내 구속자께서 살아 계심을 내가 아노라!”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분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그분께서 살아 계셨다면, 그분은 욥의 구속자이셨습니다. “내 구속자께서 살아 계신다.” 개인적으로 나의, 나의 구속자 말입니다. 욥이여, 또 무엇을 압니까? 그 환상에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마지막 날들에 그분께서 땅 위에 서시리라. 살갗의 벌레들이 내 몸을 멸할지라도 내가 여전히 내 육체 안에서 하나님을 보리니, 내가 몸소 그분을 보리라. 내 구속자께서 살아 계시며 마지막 날에 그분께서 땅 위에 서실 것을 내가 아노라. 내 콩팥이 내 속에서 소멸될지라도, 살갗의 벌레들이 내 몸을 멸할지라도, 내가 여전히 내 육체 안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거기에 가장 위대한 환상이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천사를 보았습니다. 히브리 소년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보았습니다. 노아는 무지개를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보았습니다. 그러나 욥은 부활을 보았습니다. 욥은 앞날을 내다보았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족장과 위대한 성도들은 자신들이 본 환상과 받은 계시를 통해 부활의 때가 오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날을 내다보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위대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크신 권능을 봅니다. 그분께서 하실 수 있는 위대한 일들을 봅니다. 여러분이 태양을 보면서, 이 지구를 그 태양 주위로 돌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권능이 아니라고 여길 수는 없습니다. 봄이 오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모를 수는 없습니다. 보지 못하던 눈과 듣지 못하던 귀가 치유되는 것을 보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압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이고, 우리가 죽은 뒤에는 사라져 버린다면 어떻겠습니까? 하지만 부활, 부활절이 있습니다! 아, 하나님께서 이제껏 약속하신 모든 것에 인을 친 것은 바로 부활이었습니다.
부활이 있으려면 먼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일이 있어야 했습니다. 교회가 부활의 권능을 보기 전에, 저 자신이 새로운 사역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기 전에, 여러분이 하나님과 새로운 교제에 들어가기 전에,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합니다. 그래야 부활이 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에 대해 죽고, 자신의 방식에 대해 죽고, 우리 주변의 모든 것에 대해 죽어야 합니다. 시련과 환난을 통과해야 새로운 부활, 새로운 생명을 볼 수 있습니다. 죄인이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먼저 죽음이 있어야 하고, 그다음에 부활이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엘로힘을 보기까지는 이십오 년 동안 시험을 받아야 했습니다. 히브리 소년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보기까지는 맹렬히 불타는 용광로 속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다니엘이 천사를 보기까지는 사자 굴 속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욥이 부활을 보기까지는 그 시련 속으로 들어가 가진 것을 모두 잃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그는 환상으로 보았습니다! 욥이 환상만 보고도 그토록 굳게 약속 위에 설 수 있었다면,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시고 우리도 살리라는 약속의 인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 주신 뒤에 사는 우리는 얼마나 더 그래야 하겠습니까! “내가 살아 있으므로 너희도 살리라.”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 가운데 크게 임재하시고 일하시며, 이 땅에서 행하셨던 것과 같은 표적과 이적을 행하여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도 부활을 맞이하고서 여전히 잿더미에 앉아 있습니다. 오늘은 잿더미에서 일어납시다. 새로운 환상과 새로운 권능과 새로운 결심을 가지고, 권능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우리는 다가오는 일들의 부활을 봅니다.
우리는 죽음의 때에 와 있습니다. 죽음의 문턱에 앉아 있습니다. 나라들이 죽음의 문턱에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라디오 같은 데서 들으셨듯이, 지금 러시아가 새로운 무기를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이곳에 와서 폭탄으로 폭파할 필요가 없습니다. 작은 무언가를 이곳에 가져와 자기네 간첩들 손에 넘겨주고, 어느 나라에서든 그 물질을 조금만 뿌리면 모든 사람이 스물네 시간 동안 마비됩니다. 그들이 건너오고, 여러분이 깨어날 때면 러시아 사람이 여러분의 옆구리를 걷어차고 있을 것입니다. 덩치 큰 러시아 경비병이 여러분의 집을 차지하고, 아내를 강간하고, 아이들을 거리로 내던지고, 여러분의 집을 빼앗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도 잃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보십시오. 모든 것이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이제 그들은 그것을 두려움 없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다른 누구에게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 일이 어떻게 닥칠지, 무슨 일이 벌어질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압니다. 우리가 잿더미 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나라가 잿더미 위에 있습니다. 세상이 잿더미 위에 있습니다. 세상이 잿더미 위에 있기에, 하나님의 영께서 오셔서 우리가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기쁩니다. “내 구속자께서 살아 계시며 마지막 날에 이 땅 위에 서실 것을 내가 아노라!” 머지않아 어느 날 그분께서 오실 것입니다. 시인이 이렇게 쓴 것도 당연합니다. “살아 계실 때 나를 사랑하셨고, 죽으심으로 나를 구원하셨네. 묻히심으로 내 죄를 멀리 옮기셨고, 일어나심으로 값없이 영원토록 나를 의롭게 하셨네. 어느 날 그분이 오시리. 오, 영광스러운 날이여!”
그분의 살갗을 뚫고 핏방울이 흘러나온 겟세마네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 전에… 죽은 자를 일으키실 수 있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증거가 나타나려면, 갈보리의 잔혹한 고통도 있어야 했습니다. 부활절이 있으려면 겟세마네와 갈보리가 있어야 했습니다. 참으로 그랬습니다. 그날 아침 사도들은 얼마나 낙심했던지, 베드로가 이렇게 말할 정도였습니다. “나는 너무나 낙심해서 다시 고기잡이나 하러 가야겠네. 다시 내려가야겠어. 나는 그분을 보았는데…” 그들에게는 큰 소망이 있었고, 믿음도 있고 모든 것이 있었습니다. 그토록 캄캄한 지경에 이르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그 사도들을 잿더미로 데려가고 계셨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확증될 자리로 이끌고 계셨습니다.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나는 그분께서 갈릴리 일대에서 큰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았네. 그런데 아, 그분은 저 무덤 속에 차갑게 죽어 누워 계시는구나. 오늘 아침에는 그냥 바다로 내려가 그물을 던지고 고기나 잡아야겠어. 저 바다 건너편을 바라보면 알게 될지도 모르겠네. 그분께서 물가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던 모습을 본 기억이 나네. 그냥 내려가야겠어.” 그러자 사도들이 말했습니다. “자네, 그거 아나? 나도 자네와 함께 가야겠어.” 아, 그들은 침울했습니다. 얼마나 울었던지 눈이 부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일을 겪는 것이 어떤 것인지 얼마나 잘 압니까. 참으로 잘 압니다! 우리 모두 그런 일들을 겪어 보았습니다. 저기 언덕 꼭대기에 있는 이스턴… 아니, 월넛리지 묘지에 사랑하는 사람을 묻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거기에 작은 아기도, 그 어머니의 팔에 안겨 묻었습니다. 울고 또 울었습니다. 더는 울 수 없을 때까지 울었습니다. 제가 아는 것은 다 해 보았고, 결국 총을 들고 목숨을 끊으려 하기까지 했습니다. 저는 그런 시간을 겪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저 위의 작은 방에서 무릎을 꿇고 있을 때 하늘이 열렸습니다. 그녀가 불멸의 찬란함 가운데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로 그때, 저는 그녀가 제 어깨를 두 팔로 감싸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빌, 당신은 이해하지 못해요. 우리는 당신보다 훨씬 더 잘 지내고 있어요.”
보십시오. 십자가에 못 박히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꽃에서 향유가 나오려면 꽃이 으깨져야 합니다. 삶 안에 있는 가장 좋은 것이 나오려면 그 삶이 으깨져야 합니다. 바로 그래서 예수님도 그분 안에 있는 것을 드러내시기 위해 으깨지셔야 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는 서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능이 내 손에 주어졌느니라”라고 말씀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히신 뒤에는 서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능이 내 손에 주어졌느니라”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필요했습니까? 먼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사도들이 짓눌리고 실망하는 일도 있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구주를 보았습니다… 자신들이 사랑했던 그분, 죽은 사람을 무덤에서 일으키시는 것까지 보았던 그분이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그분 자신이 저 무덤 속에 차갑게 누워 계시는구나.”
그분께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눈을 열어 주시는 것을 본 사람들, 그분께서 서서 사람들의 마음속 생각까지 알아보시는 것을 본 사람들이 그런 일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분은 저들이 자신을 잡으러 오는 것을 모르셨을까? 어떻게 아셨을까…? 왜 유다가 자신을 배반할 것을 모르셨을까? 사람들의 생각을 알아보실 수 있었다면, 군사들이 몽둥이와 칼 같은 온갖 것을 들고 자신을 잡으러 그 산으로 올라오는 것을 왜 아셨을까?” 보십시오. 마귀가 그들에게 역사하여 그들을 잿더미 위에 앉히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그들에게 “나는 안다”라는 간증을 주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추측한다”나 “아마 그럴 것이다”가 아니라, “나는 안다, 나는 안다”라는 간증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그 시련이 닥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어쩌면 이것이 옳을 거야. 어쩌면 성경이 참일 거야. 어쩌면 신유가 옳을 거야. 어쩌면 성령이 참일 거야”라고 말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체험을 하고 잿더미에서 일어나, 성령 침례를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받으면 이렇게 외칠 수 있습니다. “내 구속자께서 살아 계심을 내가 압니다. 그분께서 내 안에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나는 고기 잡으러 가겠네”라고 했습니다. 사도들은 “나도 자네와 함께 가야겠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저 바다 한가운데서 잿더미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 고난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아, 베드로,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나?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 그분 같은 분이 어떻게 돌아가실 수 있나? 어떻게 그렇게 무덤에 묻히실 수 있나? 사람들이 얼굴에 침을 뱉고 수염을 뽑고 머리에 그 관을 씌우도록 어떻게 내버려 두실 수 있나? 아, 어떻게 그러시고도 여전히 하나님이실 수 있나?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네.” 아, 얼마나 큰 실망이었습니까!
갑자기 그들이 물가를 바라보았습니다. 욥이 받은 것과 똑같은 계시였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사천 년 전에 욥이 보았던 것을 보았습니다. 구속자께서 그곳에 서 계셨습니다. 생생하게 살아 계셨습니다. 물가에 불을 피우고 그 위에 생선을 구워 놓으신 채 서 계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며 그들을 초청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상을 차리셨네. 하나님의 성도들이 거기서 먹네. 택하신 백성을 초청하시네. “와서 식사하라.” 만나로 우리를 먹이시며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네. 아, 언제나 예수님과 함께 먹는 것이 얼마나 달콤한가! 그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처럼 엄청난 일들을 겪어야 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 그 위대한 사도도 고난의 시간을 겪었습니다. 스데반이 죽는 것을 목격하고, 돌들이 그의 얼굴을 때리는 가운데 그가 얼굴을 하늘로 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스데반은 위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하늘들이 열리는 것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또 말했습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의 책임으로 돌리지 마옵소서.” 바울은 겉옷들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일로 바울은 몇 주고 몇 주고 잿더미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리저리 오가다가 그의 생각이 흐려졌고, 마침내 몸부림쳐 빠져나가려고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올랐습니다. 술병을 찾아가 슬픔을 잊으려는 사람과 같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있을 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크게 빛나는 광채가 있었고, 이런 말씀이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그는 그분을 보았습니다. 그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심을 알아보았습니다. 그가 죽는 것을 목격했던 그분이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아, 제 삶에서도 멸망의 길을 가고 있을 때, 부드러운 음성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나는 예수라. 전에 죽었으나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노라. 내가 살아 있으므로 너도 살 수 있느니라.” 그때부터 저는 그분의 손을 잡고 어두운 곳들을 지나는 내내 그분을 신뢰해 왔습니다. 제가 어느 길로 가는지 볼 수 없는 때가 와도 여전히 그분을 신뢰합니다. 그리스도인 신자라면 누구나 그런 시련 속으로 떠밀려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신자라면 누구나 잿더미에 앉아야 합니다. 그래야 “내 구속자께서 살아 계심을 내가 아노라!” 하는 체험을 가지고 나올 수 있습니다.
오늘 아침 우리가 여기 온 것은 그저 앉아서 어떤 역사적 사건을 이야기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물론 그 사건은 모두 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 아침 간증을 가지고 여기 왔습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압니다. 조금의 의심도 없이 압니다. 그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셨고 오늘 제 안에 살아 계심을 압니다. 그분은 제 것이며 저는 그분의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왕국에서 그분과 함께한 공동 상속자입니다.” 부활절입니다. 부활절은 위대한 것을 가져다줍니다. 부활, 새로운 소망을 가져다줍니다. 오늘 아침 여러분에게 그것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습니까? 여러분의 구속자께서 살아 계시고, 모든 것이 함께 역사하게 하신다는 것을 아십니까?
여러분은 “브래넘 형제님, 저는 기도 줄에 설 차례를 기다리며 여기 앉아 있습니다”라고 하실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그 일을 정확히 선을 이루도록 행하고 계십니다. 며칠 전 그 소중한 어린 소년은 왜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한 도시를 뒤흔드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계신지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시며, 자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려고 우리를 잿더미에 앉히십니다. 그러므로 친구 여러분, 오늘 아침 저는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삼십일 년 동안 사역하고, 삼십일 년 동안 사역 현장에서 수고한 뒤, 저는 이 일에 대해 간증하고 싶습니다. 저는 실망을 겪었습니다. 무언가를 구하고, 그것을 위해 울고, 애원했는데도 얻지 못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저 인내하며 하나님을 기다리면, 모든 일이 정확히 옳게 이루어지고, 정확히 옳은 결과가 나오며, 정확히 옳은 일을 이루게 된다는 것을 압니다.
제 아기, 어린 샤론을 잃었을 때 그것은 저를 걸려 넘어지게 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어떻게 이것이 유익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유익할 수 있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몇 달 뒤, 그 낡고 부서진 마차 곁에 젊은 처녀의 온전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서서 제게 말하는 아이를 보았을 때, 저는 알았습니다. 아이가 살아 있었다면 잘못된 길로 갔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이가 여리고 사랑스러울 때 데려가셔야 했습니다. 저는 아이를 다시 볼 것을 압니다. 다시 만나리라는 것을 압니다. 조금의 의심도 없이 압니다. 스물두 살에 세상을 떠난 제 아내를 생각합니다. 그저 어린 여인이자 젊은 어머니였습니다. 여기 신문에 “젊은 어머니… 목사… 사망”이라는 제목이 실렸을 때, 아, 제 마음은 얼마나 피를 흘렸는지 모릅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압니다. 그 모든 일이 제게 유익을 이루고 있었다는 것을 압니다. 제 삶 안에 든 것을 끌어내기 위해 그 삶이 갈리고 뒤틀리고 쥐어짜져야 했다는 것을 압니다. 그 안에는 브래넘이 너무 많이 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리시려면 먼저 그것이 짜내어져야 했습니다.
여러분 안에도 여러분 자신이 너무 많이 들어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시련을 통해 그것을 짜내셔야 했습니다. 그렇게 짜내어지는 동안에는 힘이 듭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면 하늘이 다시 맑아지고, 하나님의 목적이 보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외칩니다. “내 구속자께서 살아 계시며 마지막 날들에 그분께서 땅 위에 서실 것을 내가 아노라. 살갗의 벌레들이 이 몸을 멸할지라도 내가 여전히 내 육체 안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이런 작은 시련 같은 것들은 잠시뿐이며, 사라지고 지나갑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오직 여러분의 유익을 위해 일어납니다. 그것을 기억합시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도록 말입니다.
잠시 머리를 숙이겠습니까? 기도하기 전에 여쭙겠습니다. 마치기 전에 기도로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분이 여기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가운데 “지금 제가 시련을 겪는 이 시간에 하나님께서 새로운 체험을 주셔서, 제가 다시 새로워져 나오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실 분이 얼마나 계십니까? 손을 들어 보십시오. 이렇게 말하십시오. “이번이 제게 부활이 되기를, 부활절이 되기를 원합니다. 새로운 소망과 새로운 권능과 새로운 건강과 새로운 기쁨 가운데 저를 일으켜 주시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오, 저희 하나님, 저희 구주여, 이 부활절과 그것이 저희 마음에 지닌 의미로 인해 주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희는 믿음으로 저 땅 너머에서 오시는 주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은 지금 왕의 옷을 입으시며 준비하고 계십니다. 교회는 신랑을 입고 있으며, 혼인 예복을 입고 있습니다. 곧 위대한 만남이 이루어지려 합니다. 이 잿더미가 영원히 계속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저희를 비웃고 조롱하며 “홀리 롤러”라는 모욕적인 이름으로 부르고, 저희가 정신조차 온전하지 못하다고 비웃는 소리를 듣습니다. 아, 주님, 이런 일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욥처럼 저희 간증을 굳게 지키게 하옵소서. 사자 굴의 다니엘처럼, 맹렬히 불타는 용광로의 히브리 소년들처럼, 여정 가운데 있던 아브라함처럼 되게 하옵소서.
오 주님, 나팔이 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일어나는 그 위대한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볼 때까지 저희가 신실하게 서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살아서 남아 있는 저희는 눈 깜짝할 사이에 순식간에 변화될 것입니다. 그러면 약 천구백 년 전 오늘 아침 그리스도께서 누리셨던 그 부활절이 저희에게도 올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내가 살아 있으므로 너희도 살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저희 가운데서 들려 올라가신 이 동일한 예수님께서 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저희는 그분을 뵐 것입니다. 그분 손에 있는 상처 하나하나와 머리에 난 가시 자국 하나하나까지도 보게 될 것입니다. 아, “내가 그분을 알아보리, 내가 그분을 알아보리. 구속받아 그분 곁에 서리라.”
그렇습니다, 주님. 제 연약한 마음, 이 연약한 몸이 무거운 짐 아래 굽어지기 시작합니다. 추수하는 사역 현장, 선교지의 염려와 수고, 오르막과 내리막, 곳곳에 있는 교만한 목사들 사이의 냉담함 같은 것, 사람들의 조롱, 악한 힘들… 그러나 오 주님, 언젠가 저희도 엘리야처럼 강가로 내려갈 것입니다. 저기를 보십시오. 덤불마다 매어 둔 불병거가 저희를 데려갈 것입니다. 이 잿더미들은 바로 앞에 놓인 그 위대한 것, 그 큰 영광이 저희에게 보이지 않도록 가리고 있는 휘장일 뿐임을 알게 하옵소서. 욥처럼 신실함을 지켜, 마침내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그분을 뵙게 하옵소서. 저희의 본이 되신 주님께서 신실하셨던 것처럼 저희도 신실하게 하옵소서. 십자가에 못 박힐 준비를 하고 갈보리로 가서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저희 삶에 부활이 있게 하옵소서. 주님, 허락해 주옵소서. 혹시 이곳에 옛날 바울처럼 조롱하던 사람이 있다면, 오늘 아침 집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절을 만나게 하옵소서. 주님, 허락해 주옵소서. 주님, 멸망의 잿더미, 질병의 잿더미 위에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이 시간에 구출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어젯밤 저 밖 트레일러에서 그 작은 부인과 남편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 남편은 피닉스에서는 그처럼 위중한 상태로, 몸에 커다란 암 덩어리들이 있었는데, 오늘은 완전히 건강하고 정상입니다. 심장을 꺼내야 한다던 그 어린 아기도 오늘 아침 이 건물 안에 앉아 있습니다. 정상이고 건강합니다. 한때 어둠 속을 걸으며 한 번도 햇빛을 보지 못했던 어린 맹인 소년이 오늘은 걸어 다니며 햇빛을 봅니다. 오 하나님, 이 일을 얼마나 감사드리는지 모릅니다! 이 모든 것은 휘장 너머, 그 위대한 부활의 날을 내다보는 것입니다. 아버지, 허락해 주옵소서. 이 어린 맹인 소년이 볼 수 있게 되고, 심장에 문제가 있던 어린아이가 다른 이들에게 간증할 수 있게 되려면 이런 일들이 그렇게 되어야 했음을 그들이 알게 하옵소서. 이 모든 일이 함께 역사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선을 이룹니다.
시련 가운데 순종하신 한 분이 계셨기에 이 모든 것이 저희에게 가능해졌습니다. 시험을 견뎌 내신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아버지께 그토록 순종하셨기에 아버지께서 부활절 아침에 그분을 일으키셨습니다. 사망이 그분을 붙들고 있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내 거룩한 자가 썩음을 보지 아니하게 하며, 그의 혼을 지옥에 남겨 두지 아니하리라.” 그분은 언제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시며 신실한 분으로 드러나셨습니다. 하나님, 저희에게 어떤 시련과 고난이 닥치더라도 언제나 맡은 자리에서 신실하게 하옵소서. 저희가 언제나 이렇게 말할 수 있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줄 내가 아노라.” 아버지, 허락해 주옵소서. 오늘 아침 이 사람들에게 주님의 복으로 축복합니다. 그들은 각자의 처소에서 일찍 나왔습니다. 태버내클에 왔습니다. 위로를 얻으러 왔습니다. 오늘 아침 마음속에 성령의 권능이 불타는 가운데 집으로 돌아가게 하옵소서. 엠마오에서 오던 사람들처럼 길을 걸으며 “그분께서 길에서 우리와 말씀하실 때에 우리 마음이 우리 속에서 뜨겁지 아니하더냐?”라고 말하게 하옵소서. 아버지, 허락해 주옵소서. 이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들을 아버지께 맡깁니다. 아멘.
좋습니다, 네빌 형제님. 여러분, 예배 시간을 기억해 주십시오. 오늘 아침에는 기도 카드를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기도 카드를 사용하고 사람들을 이렇게 여기 세워 두는 한, 제가 여전히 그 은사에 의지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내려놓고 이곳으로 걸어 나올 수 있는 자리에 이르러야 합니다. 저는 두렵습니다. 겁을 먹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실수할까 봐 두렵습니다. 한 번의 전투에서 진다고 전쟁에서 지는 것은 아닙니다. 패튼은 여러 전투에서 졌지만 전쟁에서는 한 번도 지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많은 전투에서 지겠지만 전쟁에서는 지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실수를 많이 하겠지만 그 대의를 잃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셨으니 하나님께서 돌보실 것입니다. 그것은 기름부음입니다. 이제 때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 시간이 왔다고 믿습니다. 오늘이 부활절이니, 이제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곳에서 병자들을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 그렇게 해 나가려고 합니다. 제가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기름부음입니다. 제 안에서 무언가가 일어나야 합니다. 저는 그것에 아직 그리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임하는 방식을 제가 정확히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매번 알아차릴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니 오늘 하나님의 은혜로 시도해 보겠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네빌 형제님. 예배는 아홉 시 반에 시작하겠습니다. 네빌 형제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