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ING ROOM
마음에 무언가 와닿지 않습니까? 정말 그렇습니다. 이제 고개를 숙이고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이 아름다운 찬송,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를 통해 주님이 얼마나 위대하신지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오늘 아침 우리는 주님이 안 계신다면 어떻게 할까 생각해 봅니다. 그토록 위대하신 주님께서 사랑에 이끌려 우리를 그렇게 마음에 두신다는 것을 생각하면, 제 혼은 감당하기조차 어렵습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이제 예배를 계속하는 동안 오늘 우리를 복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생명의 빵, 곧 그리스도의 계시를 우리에게 떼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합니다. 아멘.
웅그렌 형제님은 태버내클에 꾸준히 나오시는 분인데, 테네시주 멤피스에 사십니다. 형제님과 어머니, 아내, 온 가족이 태버내클에 나옵니다. 저는 늘 너무 바빠서 이분의 찬송을 들을 기회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는 이 찬송을 부르시는 것을 꼭 듣기로 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또 다른 찬송인 “영광의 자리에서 내려오셔서”도 부르십니다. 이 두 곡이 제가 가장 좋아하는 찬송입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는 이분의 아버님을 뵙는 귀한 기회도 있었습니다. 처음 뵈었습니다. 훌륭한 분이십니다. 웅그렌 형제님은... 아드님인 모리스가 살아 있는 한 아버님도 결코 떠나시지 않을 겁니다. 두 분이 정말 닮으셨거든요. 그리고 아버님의 아내분, 곧 모리스 웅그렌 형제님의 어머님은 지난 15년 동안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오셨습니다. 그토록 어두운 시간을 겪으시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변함없는 손을 붙들고 계신 모습을 보며 저는 참으로 큰 격려를 받았습니다. 그 모습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참되다는 것과 그것을 믿는 이들의 믿음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저는 무척 기쁩니다.
조금 전 아래층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제 자녀 둘이 결혼했습니다. 제 자녀란 태버내클의 아이들입니다. 우리 어린 빌리 심프슨과 마이어스 집안의 아가씨 말입니다. 두 사람은 얼마 동안 서로 사랑해 왔습니다. 셰릴, 그렇습니다. 이들은... 그중 셰릴 마이어스는 여기 계신 웅그렌 형제님 가족과 친척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사람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보니, 결혼식을 마치고 자리에 앉았군요. 곧바로 교회 예배당으로 돌아와 앉아서 예배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이 아이들은 말씀을 무척 존중하기 때문에 늘 제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해 왔습니다. 그저 말씀을 사랑합니다. 제가 이들을 제 자녀라고 부른다고 해서 다른 아이들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 아이들은 저를 바라보고, 저는 이 아이들을 위해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어린 빌리는 결혼하고 싶었지만 군대에 가야 할까 봐 걱정했습니다. 같은 처지에 있는 아이들이 두세 명 있었습니다. 그 청년들이 제게 와서 말했습니다. “브래넘 형제님, 저희는 병역을 기피하거나 그러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 여쭈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면서 가능하면 군대에 가지 않기를 바라는 이유를 말해 주었습니다.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일로 나라를 지키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군대에 가면,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습니다만, PX인가 하는 그런 곳에서 좋지 않은 부류의 사람들과 어울리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반쯤 벗은 여자들이 법석을 떠는 그런 곳에 있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은 그리스도인 청년이 있을 만한 곳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요청을 들어주셨습니다. 이제 오늘 아침 어린 빌리가 이 훌륭한 셰릴과 결혼하러 왔습니다. 우리는 두 사람으로 인해 기뻐합니다. 하나님의 왕국 안에서 두 사람에게 가장 좋은 일들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에게 참으로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일요일 성경공부반도 훌륭하게 모였습니다. 교회가 가득 찼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척 기쁩니다. 목회자들은 흔히... 사람들이 말씀을 들으러 오는 모습을 보면 힘이 납니다. 빈 의자들을 향해 말하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왜냐하면... 여기에 한 사람만 있더라도 똑같이 말씀을 전하겠지만, 그래도 “이 사람이 놓치더라도 저 사람은 듣겠구나” 하고 생각하면 기분이 좋습니다. 아시겠죠? 그래서 다르고, 영광스럽습니다.
그리고 방금 면담을 하면서... 이렇게 서둘러 그분들을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나오다가 부틀리에 형제님을 만났습니다. 여기 온 뒤로 그분을 뵙지 못했기에 “어디 계셨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분들 드릴 칠면조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하시더군요. 그래서 저는 살이 좀 빠졌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분이 “형제님은...” 하시기에, 제가 “형제님은 조금도 변하지 않으셨군요.” 했습니다. 그분이 “형제님도 그렇습니다.” 하셨습니다. 저는 “참 외교적인 말씀이군요.”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변했습니다. 체중이 170파운드에서 145파운드로 줄었습니다. 그러니 확실히 변했지요. 양복들이 모두 너무 작습니다. 아니, 너무 큽니다. 얼마 전 누군가가 여기 올 때 입을 수 있도록 양복 한 벌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어깨가 축 처지지도 않고 허리 부분이 겹쳐지지도 않는 옷입니다. 하지만 저는 기회가 있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이렇게 많이 와 주시니...
방금 방 안에서 그분들에게 말씀드렸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위대하신 성령께서 한 여인의 몸에서 암을 제거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텍사스에서 오신 분입니다. 또 조금 전에는 어떤 여인이 거기에 앉아 계셨습니다. 그렇게 신경이 예민해진 사람은 본 적이 없었습니다. 목회자의 아내였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분이 거기 앉아 있는 환상을 제게 보여 주셨고, 저는 그분을 보았습니다... 그분은 뉴욕에서 전화를 하셨고, 잠깐 이곳에 들르고 싶어 하셨습니다. 겨우 5분밖에 시간이 없었습니다. 이어서 그분의 남편이 궤양으로 고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궤양이 생긴 원인은 아내에 대한 염려였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곳에 앉아 있던 그 여인을 진정시켜 주셨습니다. 지금 저를 바라보고 앉아 계십니다. 그리고 형제님께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형제님의 궤양도 이제 끝났습니다. 아시겠죠? 이제 나으셔서 주님의 일로 돌아가실 겁니다. 주님께서 무언가 하시는 것을 보면, 아무리 보아도 더 보고 싶습니다. 그저 계속하고, 계속하고, 계속하고, 계속하고 싶습니다.
어젯밤에는 참으로 좋은 기도 예배를 드렸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병든 사람들에게 손을 얹는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좋은 일이지요. 때로는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무언가가 그 이면에 있어서, 그 사람이 그것이 무엇인지 알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아시겠죠? 그들을 방해하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길을 가로막고 있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아주 작은 그림자 하나만 있어도 그것이 흔들려 사라질 수 있습니다. 조금 전 거기 있던 그 여인은 너무나 신경이 예민하고 불안했습니다. 가엾게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습니다. 그저 (브래넘 형제님이 숨을 헐떡이며 들이쉬고 내쉰다.) 이렇게 하며 진정하지 못했습니다. 아시겠죠?
이럴 때 해야 할 일은... 속사정을 조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여인의 영을 붙잡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러분의 생각을 그 여인에게 전해 주어 생각을 바꾸어 줍니다. 아시겠죠? 그렇게 되고 나면 그 여인이 그리스도께 마음을 집중하도록 할 수 있고, 거기서부터는 스스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먼저 그 여인의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어 주어야 합니다. 스스로는 바꾸지 못합니다. 그저 같은 생각 속에서 빙빙 돌 뿐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자, 이 작은 설명으로 조금은... 이것을 연구해서 알아내려 하지 마십시오. 그러지 마십시오. 그저 믿고 나아가십시오.
그 어머니의 품에 누워 있던 어린 아기, 그날 아침 9시부터 죽어 있던 아기는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날 밤 아주 늦은 시간이었습니다... 그 어린 영은 어디 있었습니까? 그 영을 찾아가서 데려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영이 돌아오는 것을 보면, 그때 주님의 이름으로 일어나 그 영을 부를 수 있습니다. 아시겠죠? 그러면 그 일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 전까지는 아무리 말해도 헛수고일 뿐입니다. 그렇게 신비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자신이 비켜서서, 성령께서 원하시는 일에 여러분을 사용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어떤 은사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생각을 치워 버리고 그리스도께서... 그러면 그것이 무슨 말을 하든... 그것이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인지 알고 싶다면... 단지 어떤 느낌일 뿐이라면 내버려 두십시오. 그저 감정일 뿐이라면 그것도 내버려 두십시오. 하지만 말씀에 기록되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어떤 영이 여러분에게 말하는 것이든 늘 말씀으로 판단하십시오. 말씀입니다. 그 말씀에서 절대로 떠나지 마십시오. 떠나면 길을 잃습니다.
자, 이렇게 이야기하다가 정오까지 머물게 되기 전에 성경을 펴서 몇 구절을 읽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합니다. 우리 모두 그러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창세 이래 감추어졌던 하나님의 비밀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다는 주제로 설교하려고, 아니, 말씀을 나누며 일요일 성경공부를 가르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살펴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결혼식이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음에 들를 때 그 말씀을 전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성경 세 곳에서 말씀을 읽겠습니다. 먼저 빌립보서 1... 빌립보서 1장 19절부터 22절까지 읽고자 합니다. 이는 너희 기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께서 공급해 주심을 통해 이것이 나의 구원으로 바뀔 줄 내가 알기 때문이라.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에 따라 내가 어떤 일로도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고 항상 그러하였듯이 지금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게 하려 함이라. 이는 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시요 죽는 것이 이득이기 때문이라. 그러나 내가 육체 안에 산다면 이것은 내 수고의 열매이니라. 그럼에도 내가 무엇을... 택할지 알지 못하노니.
이제 로마서로 가서, 제가 본문으로 삼고자 하는 말씀의 바탕을 놓기 위해 로마서 8장 35절부터 읽겠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겠느냐? 환난이나 곤경이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벌거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겠느냐? 이것은 기록된 바, 나로 인해 우리가... 종일토록 죽임을 당하며 도살당할 양같이 여겨졌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아니라. 이 모든 것 가운데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분을 통해 정복자들보다 더 나은 자들이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나 권력이나 권능이나 현재 있는 것들이나 장래 있을 것들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창조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으리라.
사도행전 2장 30절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대언자라 하나님께서 이미 자기에게 서약으로 맹세하사 육체에 따라 자기 허리의 열매에서 그리스도를 일으켜 자기 왕좌에 앉히실 것을 알았고. 성경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말씀을 많이 읽었습니다. 하지만 이만큼 성경을 읽었으니 그 안에서 우리에게 도움이 될 무언가를 찾게 되리라는 것을 압니다. 오늘 아침 저는 “절대 기준”이라는 말을 주제로 삼고자 합니다. 하나의 절대 기준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를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본문을 살펴보다가 사전을 찾아보았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뭐라고... 누군가는 계속 “그것은 절대적으로 진리입니다. 절대적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저는 “그 말이 무엇이지? ‘절대적’이라는 것은 무슨 뜻이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뜻을 알아보려고 사전을 찾았습니다. 웹스터 사전은 “그 자체로 완전하며, 그 능력에 한계가 없고, 기본적으로 최종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시겠죠? 그 능력에 한계가 없고, 그 자체로 완전하며, 참으로 최종적인 것, 이것이 “절대적”이라는 말의 뜻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드리고 싶고, 여러분이 이 말의 뜻을 알아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사람들을 사로잡을 만한 무언가를 심리적인 방법으로 어떻게 전하는지 훈련받은 성직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가 하는 일은 그저 최선을 다하는 것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제게 주신 벗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분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제 생각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이제, 모든 위대한 성취는 절대 기준에 매여 있습니다. 절대 기준 없이 인생을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절대 기준이 없이는 무언가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지막에 자신을 매어 둘 기둥이요, 여정 끝에서 고삐를 매는 말뚝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무언가에 매어 두는 자리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는 모든 것이 너무나 부서져 내리고, 약하고, 이리저리 휩쓸립니다. 그래서 저는 이 메시지가 특히 지금 깊은 물을 지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교회는 지난 2천 년 동안 겪어 보지 못한 가장 깊은 물을 지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앞에 무언가가 제시되고, 그들이 그것에 관해 결정을 내려야 하는 지점에 이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의 교회가 자신들이 어디에 매여 있는지 확실히 아는 무언가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물 위의 나뭇잎처럼 이리저리 떠다녀서는 안 됩니다. 바람에, 성경이 말하듯 “온갖 교리의 바람에 밀려다니는” 것입니다. 바람이 불어와 작은 잎을 이쪽으로 몰고 갑니다. 그러면 또 다른 바람, 북풍, 남풍, 동풍, 서풍이 불어옵니다. 그렇게는 어디에도 이르지 못합니다. 안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안정된 삶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무언가... 생명 자체보다 더 소중한 원칙에 매여 있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매어 둔 무언가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업에 매여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족에 매여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조에 매여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군부대에 매여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서로 다른 것에 매여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옳다고 확실히 아는 곳에 매여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가족에 매여 있다 해도 아내가 여러분을 떠날 수 있습니다. 군대에 매여 있다 해도 전사할 수 있습니다. 그 밖의 여러 가지에 매여 있다 해도 그것에는 끝이 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자신을 매어 둘 기둥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영원히 갈 곳을 위해 자신을 매어 두어야 할 곳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자기 일에 맡긴다면 일이 끝날 때 그것도 끝납니다. 가족을 빼앗기면 그것도 끝납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자신을 매어 둘 기둥은 오직 하나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기 바울의 삶에는 자신을 매어 둔 기둥이 있었다고 믿습니다. 저도 옆에 끼어든다고 할까요, 그 기둥에 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는 “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시요 죽는 것이 이득이라.” 하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바울의 절대 기준이셨습니다. 그가 자신을 매어 둔 기둥이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모든 논쟁을 끝내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가 자신을 매어 둔 기둥이셨습니다.
바울에게 처음부터 그 기둥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바리새인 무리에 매여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받아들여져 그들의 기둥에 자신을 매도록 허락받으려면, 그는 훈련과 교육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다마스쿠스로 내려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대면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바리새인의 기둥에 매인 줄을 끊고 다른 곳에 자신을 다시 매었습니다. 그가 아는 그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그분께 말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분을 직접 만났기 때문입니다. 바로 거기서 그가 변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전과 같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책을 만난 것도, 단지 신조를 만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 인격을 만났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그분께서 “나는 예수라.” 하셨습니다. 그 회심에 관해 잠시 생각해 봅시다. 저는 바울이 신실한 사람이었다고 믿습니다. 지금은 일요일 성경공부 시간이니 성경공부처럼 가르치고자 합니다. 바울은 깊이 있고 신실한 사람이었다고 믿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모든 선지자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합니다. 야고보서 5장입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같이 동일한 성정의 지배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도 좋을 때와 나쁠 때가 있었고, 이럴 때도 저럴 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바울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도 당혹감과 의심이 있었습니다. 그는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종파 가운데 하나에 속해 있었습니다. 당시 가장... 가장 위대한 스승 중 하나였던 가말리엘이라는 훌륭한 스승 밑에서 배워, 그 종파의 교사가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바울의 삶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보고, 그가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배우도록 열심히 일해서 그를 학교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는 깊고도 신실한 마음으로 그 모든 말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 하층민 같은 무리에 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갈릴리에서 선지자라고 하는 사람, 그쪽 무리가 그렇게 부르는 사람이 일어나 기적을 행하고 병자를 치유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속한 종파는 이 사람, 나사렛 예수를 선지자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자기들 편에 서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가 속한 종파의 사람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울에게 그런 것을 경계하라고 일러두었습니다. 정직한 바울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고, 우리 교회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할 일은 하나뿐이다. 없애 버려야 한다.” 방해물이 될 테니 치워 버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믿는 종파에 대항하는 종양, 악성 종양이 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가서 이 악성 종양, 그가 그렇게 부르거나 그의 교회가 그렇게 부르던 것을 자신의 훌륭한 바리새인 집단에서 도려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그러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체포하라는 대제사장의 편지를 주머니에 넣고 다마스쿠스라는 도시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울에게 맡겨진 임무였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주변에서는 그들을 잠잠하게 해 놓았습니다. 그는 스데반을 돌로 쳤고, 바울은 스데반을 돌로 치게 했습니다. 증인이 되어 주고 옷을 맡아 주었습니다. 이제 이곳으로 내려가 똑같은 일을 해서 이 큰 방해물을 없애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대략... 정오 무렵이었을 것입니다. 11시나 12시쯤 그가 맞아 쓰러졌습니다. 그러고 나서 올려다보니 앞에 한 빛이 서 있었고, 그 빛에서 음성이 나와 말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질문입니다.]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바울, 아니 사울은 자기 백성이 이집트에서 나온 이후 바로 그 빛을 따라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람사 번역 성경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히브리인들이 옛날부터 하나님을 나타내던 표시는 삼각형의 빛입니다. 대략 그런 모양입니다. 하나의 신성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세 속성을 나타냅니다. 이 삼각형의 빛, 셋이 하나로서 한 하나님이신 이것은 히브리인들에게 하나님을 나타내는 표시, 빛이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떨기나무에서 그분을 만났을 때, 그분께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하셨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이 세 때에 변함없이 계시는 동일한 하나님이십니다. 모세는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그분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빛이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광야에서 이끌어 내실 때 그분은 언약의 천사셨습니다. 모세는 믿음으로 그분을 보고 이집트를 버렸습니다. 그리스도의 치욕을 이집트의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습니다. 모세는 믿음으로 그분이 그리스도, 곧 기름부음이심을 보았습니다. 그 기름부음은 어떤 특정한 사람 위에 있지 않고 불기둥의 형태로 있었습니다. 아시겠죠? 그리고 바로 그 기름부음이 그분의 침례 때 내려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갔으며 그분 안에 거했습니다. 요한은 그분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네가 성령께서, 곧 그들을 이집트에서 광야로, 광야에서 약속의 땅으로 이끄신 그 영께서 누구에게 내려오시는 것을 보거든, 네가 이 삼각형 모습의 하나님께서 내려와 누구 위에 머무시는 것을 보거든, 바로 그가 성령과 불로 침례를 줄 자니라.”
바울에게는 아직 이것을 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에게 이것이 참되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리자면, 유대인들은 우상이나 그런 것 앞에 절하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가 이 큰 빛을 보았을 때 그것이 주님이심을 알았습니다. “주”는 소유권, 지배권을 뜻합니다. 그 굳건한 히브리인은 그것이 영이라는 것을 알면서 아무것에나 “주”라고 부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는 바로 그 불기둥이 자기 백성을 이끌었던 분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말했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누구신지 알고 싶습니다. 주께서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이름으로 모세를 만나셨습니다.” 그런데 이 생각에서 잠시 멈추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상에 계실 때 그들이 보았던 그것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셨습니다. 보십시오. 그분은 “나는 하나님에게서 왔고 [그 영, 그 빛, 그 불기둥에게서 말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노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들을 위해 죽으시려고 육체가 되셨습니다. 그분께서 죽으시고 장사되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뒤, 하늘로 올라가신 뒤에... 40일째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50일째에 사람들 가운데 불기둥의 형태로 돌아오셔서, 자신을 불의 혀처럼 나누어 각 사람 위에 앉으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다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성령께서 그들에게 말하게 하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누시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거대한 불기둥 안에 계신 하나님, 다음에는 사람의 몸 안에 나타나신 하나님, 이제는 자신의 백성 가운데 자신을 나누시는 하나님입니다. 불기둥이 나뉘어 갈래진 불꽃처럼, 갈라진 혀처럼 각 사람 위에 앉았습니다. 갈래진 불, 불처럼 갈라진 혀들이 각 사람 위에 앉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모두 그것으로 충만해져, 성령께서 말하게 하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아시겠지만, 우리는 분열된 백성이 아닙니다.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의 일부를 지니고 있으므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함께 모여야 합니다. 그러면 그 불기둥이 온전하게, 충만하게 나타납니다. 그분의 교회가 하늘의 처소들에 함께 앉아 있을 때, 하나님의 권능의 충만함이 그분의 교회 안에 있습니다. 각자 영적인 은사와 영적인 직분을 지닌 우리가 함께 모이면 그 불기둥이 다시 돌아옵니다. 바울은 그분이 주님이심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주여, 제가 주를 핍박하고 있다면 주께서는 누구시니이까?” 그분께서 “나는 예수라. 가시 채를 걷어차기가 네게 고생이라.” 하셨습니다. 바울은 일어나서 곧음이라는 거리로 내려가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거기에 아나니아라는 선지자가 와서 환상을 보고 그에게 침례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라비아로 내려가 3년 동안 성경을 연구하며 자신에게 나타난 이 불기둥이 무엇인지 알아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바울이 남은 평생 동안 그것을 자신을 매어 둘 기둥으로 삼았음을 봅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면했고 하나님께 사명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기둥입니까! 얼마나 놀라운 절대 기준입니까! 그것은 모든 논쟁의 끝이었습니다. 바울에게는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모든 다툼,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뭐라고 하든, 사두개인들이 뭐라고 하든, 그 밖에 누가 뭐라고 하든 상관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났고,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말씀으로 입증되었습니다. 그것으로 결론이 난 것입니다! 그의 남은 평생이 그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것을 보았고, 말씀과 그분께서 취하신 모습과 형태,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말해 준, 귀로 들을 수 있는 음성으로 그분이 하나님이심이 입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큰 일이었습니다. 그가 아그립바 앞에서 “내가 하늘에서 온 그 환상 계시에 불순종하지 아니하였나이다.” 하고 말할 수 있었던 것도 당연합니다. 그는 거기에 자신을 매어 두었습니다. 실재하는 무언가, 자신이 아는 무언가, 아무도 그에게서 빼앗아 갈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성경을 설명하기 위해 오직 교육이나 기계적인 교육 방식에만 의지한다면, 그것을 머릿속 개념으로만 받아들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직접 대면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 강단에 서서 복음을 전할 권리가 없습니다. 광야의 뒤편에 있던 모세처럼 말입니다. 그가 얼마나 훌륭한 교육을 받았든, 무슨 일이 있었든, 그의 두려움과 당혹감은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거룩한 땅에 섰으며, 아무도 그 경험을 그에게서 빼앗아 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체험한 모든 남녀, 여러분의 마음이라는 거룩한 땅에서 바로 이 불기둥을 만난 사람은, 어떤 신학자도, 어떤 마귀도, 그 어떤 것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현재 있는 것도, 장래 있을 것도, 죽음도, 질병도, 슬픔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그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자신을 매어 둘 기둥입니다. 여러분은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압니다. 과학이 아무리 나서서 “이렇다, 저렇다, 또 다른 것이 어떻다” 해도 여러분은 매여 있습니다. 여러분과 하나님이 하나가 됩니다. 그분이 여러분 안에 계시고 여러분이 그분 안에 있습니다.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있음을 너희가 알리라.” 여러분은 그분께 매여 있습니다.
바울에게는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신 삶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전에 살던 삶과 다른 삶이었습니다. 전에는 교육으로 얻은 개념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신 삶, 절대 기준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그립바가 아무리 “바울아, 네가 미쳤구나. 정신이 나갔다. 공부를 너무 많이 했구나.” 해도 그는 “나는 미치지 아니하였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가 아그립바에게 얼마나 강하게 다가갔던지 아그립바가 “네가 나를 설득하여 거의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도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것들만 빼고... 이 결박만 빼고 나처럼 되시기를 바랍니다.” 했습니다. 바울처럼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신 삶을 갖게 되면, 평소에는 하지 않을 일들을 하게 됩니다. 보십시오. 성경과 그 모든 것에 훈련받은 그 사람은 보통이라면 자기가 배운 길을 따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그리스도를 자신의 절대 기준, 자신의 최종 기준으로 삼자 삶이 달라졌습니다. 다르게 행동했습니다. 전에 훈련받은 대로 보면 미친 짓처럼 보이는 일들을 했습니다. 그것은 똑같은 일을 할 것입니다...
교회가 그 교회협의회에서 벗어나 돌아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최종 기준으로 삼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을 매어 둘 기둥으로 삼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사람이 이룬 것에 매여 있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무너집니다. 성경이 그렇게 되리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창세 이래 택함을 받은 신부가 있을 것이며, 그 신부는 그 기둥에 매여 있을 것입니다.
저는 영원이 열리며 시간 속으로 내려오는 것을 봅니다. 에덴 때부터 말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피의 줄이 갈보리까지 줄곧 이어져 왔고, 갈보리에서 이 줄에 묶여, 자신을 매어 둘 기둥이신 예수님께까지 이어집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분께서 자기 것을 찾으러 오실 때, 그 최종 기준에 매여 있는 사람은 모두 영원 속으로 끌려 올라갈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줄곧 영원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 안에서 미리 예정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부입니다. 태초에 그분의 생각 안에 있었습니다. 그 큰 밧줄, 곧 피의 줄, 제가 말씀드린 그 증표가 끌어 올려질 때, 그것이 땅에서 올라올 때, 그 피 안에 포함된 사람은 모두 다시 영원 속으로 곧바로 끌려 올라갈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는 유일한 길은 그 절대 기준, 곧 예수 그리스도, 그 절대 기준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룬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셨습니다. 그분은 절대 기준이십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살아 계심을 압니다. 그분께서 부활의 권능으로 여기 우리와 함께 계시며, 지상에 계실 때 하셨던 바로 그 일을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최종 기준에 매여 있습니다. 그것이 모든 다툼의 끝입니다. 저는 거기에 매여 있습니다. 그것이 제 생명입니다. 저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저를 구원하셨을 때 저는 무언가를 만났습니다. 그것이 제 안에 들어온 이후로 달라졌고, 저는 거기에 매여 있습니다. 저의 모든 것이 바로 거기에 매여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 제가 그분 안에 살고 그분이 제 안에 사시게 하시니, 그렇게 우리는 서로 매여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믿고 싶어 하든 상관없습니다. 각 사람에게는, 여러분이 바로 그것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최종 기준입니다. 그것이 마지막 말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말씀이시라면 이 말씀이 마지막 말이어야 합니다. 이것으로 결론이 나야 합니다. 이 말씀이 무엇을 말하든, 그것이 그 주홍색 실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입니다. 그것에 어긋나는 것은 저는 전혀 모릅니다.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리스도께 매여 있고 그리스도는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해하셨습니까? 이 시대에 배정된 그분의 말씀의 부분, 그 말씀의 부분을 나타내시려고 그분의 성령께서 여기에 계십니다.
그분이 태어나실 때에도 그랬던 것과 같습니다. 이사야 9장 6절입니다. 성경 전체에 걸쳐 그분에 관해 말한 모든 것이 성취되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우리는, 이를테면, 그것을 봅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분에 관한 예언의 끝이기도 하셨습니다. 그분이 그것을 성취하셨습니다. 역사와 노래들, 구약에서 그분을 말한 모든 것이 바로 거기서 성취되었습니다. 그것이 최종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그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매어 둘 기둥이 되었습니다. 이 시대에 참으로 다시 태어나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은 이 마지막 날들에 성취되어야 할 이 성경 말씀의 기둥입니다. 그들이 최종 기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최종 기준입니다. 그분의 말씀이며, 말씀은 그리스도, 곧 자신을 매어 둘 기둥이시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여러분을 붙들고 있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그것은 여러분이 평소에는 하지 않을 일들을 하게 합니다. 바울이 평소에는 하지 않을 일들을 하게 했습니다. 모세가 평소에는 하지 않을 일들을 하게 했습니다. 모든 남녀가 평소에는 하지 않을 일들을 하게 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중심이 되는 무언가입니다. 여러분을 안정시켜 주는 무언가입니다. 그것은 마치... 배의 닻과 같습니다. 폭풍이 불 때 배는 닻에 매여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절대 기준이시라면, 고난의 때에 여러분은 그분께 매여 있습니다. 배를 흔들리도록 내버려 두면 바위에 부딪혀 부서질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닻을 내립니다. 닻은 끌려가다가 바위 바닥에 걸리고, 배는 그 닻에 매여 있습니다. 그 닻이 배의 절대 기준입니다.
다시 태어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 매여 있고, 성경이 닻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매여 있는 것입니다. 조직들이나 여러 가지 것들, 과학이나 교육자들이 무슨 말을 하든 하게 내버려 두십시오. 그 말씀이 말하고 약속한 것이라면 우리는 거기에 매여 있습니다. 우리가 거기서 떠나지 못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다시 태어난 그리스도인은 그 말씀에 머뭅니다. 말씀이 어떤 일을 하라고 하며 그 방법을 말한다면 우리는 그대로 해야 합니다. 다른 누가 뭐라고 하든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거기에 매여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신 삶입니다. 또한 그리스도는 북극성과 같으십니다.
아시다시피 지구는 돌고, 별들은... 사실 여러분이 저녁별로 보는 별은 샛별이기도 합니다. 지구가 돌아서 그 별을 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구가 돌면서 그 별들과의 위치가 바뀝니다. 북극성만은 예외입니다. 저녁별에 나침반을 맞춰서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는 어떻게 됩니까? 여러분은... 저녁별은 서쪽에 있다가 다음 날 아침에는 여러분이 동쪽에 있게 됩니다. 아시겠죠?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북극성에 맞출 수는 있습니다. 아멘. 정확히 중심에 맞춰 두면 목적지에 도달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신 삶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길을 잃었을 때 그분은 여러분의 북극성이십니다. 그분이 북극성이시라면 성령은 여러분의 나침반입니다. 나침반은 오직 북극성만 가리킵니다. 신조나 교파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어떤 느낌이나 그 밖의 어떤 것도 가리키지 않습니다. 흔들림 없이 북극성을 향합니다. 그분은 여러분의 북극성이십니다. 길을 잃으면 교파나 그런 것들을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침반인 성령은 여러분을 곧바로 말씀, 곧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하시며 흔들리지 않게 붙들어 주십니다. 거기에 자신을 매어 두십시오.
북극성이 없다면 어떻겠습니까? 안개 낀 바다에서 어떻게 길을 찾겠습니까? 여러분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하시고, 그 말씀을 나타내시며 입증하시는 성령이 안 계신다면 어떻겠습니까? 이 시간에 우리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성령은 오직 말씀만 가리키십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말씀의 일부가 아니라 모든 말씀, 그 전부,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사람은 바로 그것으로 삽니다. 그분은 여러분의 삶에서 여러분의 절대 기준이십니다. 또한 여러분의 북극성이십니다. 아시다시피 다툼을 끝내고 결론을 내릴 무언가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식탁 예절이 한 여인의 말에 달려 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여인의 이름이 에밀리 포스트였던 것 같습니다. 제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에밀리 포스트, 맞는 것 같습니다. 에밀리 포스트가 칼을 집어 들어 그것으로 콩을 먹으라고 했다면, 그게 무엇이든 그것이 예절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여인이 식탁 예절의 절대 기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여인이 손으로 먹으라고 했다면 손으로 먹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나라가 그 여인을 식탁 예절의 절대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독일에도 절대 기준이 있던 때가 있었습니다. 히틀러였습니다. 절대 기준이었습니다. 다른 누가 뭐라고 하든, 히틀러가 하라고 하면 하는 것입니다. 하는 편이 좋았습니다. 히틀러의 말이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로마에도 절대 기준이 있던 때가 있었습니다. 독재자 무솔리니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차를 몰고 그에게 1분 일찍 왔습니다. 그는 차 안에 있던 그 사람에게 총을 쏘고 그를 잡아 끌어냈습니다. “나는 1분 일찍 오라고 하지 않았다. 정각에 여기 오라고 했다.” 하고 말했습니다. 절대 기준입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그대로 해야 했습니다. 돌아가게 되었... 그는 자기 말대로 온 세상이 돌아가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돌아갑니다.
이집트에도 절대 기준이 있던 때가 있었습니다. 파라오였습니다. 한번은 그런 곳들을 보려고 이집트에 갔습니다. 그들이 앉았던 왕좌를 찾으려면 20피트나 파 내려가야 합니다. 로마 황제의 왕좌도 말입니다. 제가 로마에 갔을 때, 그리고 이집트에 갔을 때 보았습니다. 아시겠죠? 그것들은 모두 역사의 먼지로 돌아갔습니다. 잘못된 종류의 절대 기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잘못된 것이었으므로 무너졌습니다. 사람이 만든 절대 기준들이었습니다. 사람이 만든 모든 절대 기준과 사람이 이룬 모든 것은 반드시 먼지로 돌아갑니다. 반드시 먼지로 돌아갑니다. 잘못된 종류이므로 무너지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문제에 휘말려 누군가 무슨 일을 하면, 여기 작은 도시 법원, 어떤 경찰 법원 같은 곳에서 재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계속 위로 올라갑니다. 마침내 대법원에 이릅니다. 대법원은 이 나라의 절대 기준입니다. 그것으로 결론이 납니다. 캐나다에서는, 캐나다에서 오신 우리 벗들은 캐나다에서 여왕에게로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대법원이 절대 기준입니다. 때로는 그 판결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래도 따라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고 때로는 판결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이 나라의 절대 기준입니다. 나라가 거기에 매여 있습니다. 그것으로 모든 논쟁이 끝납니다. 대법원이 유죄라고 하면 여러분은 유죄입니다. 그것이 있어야 합니다. 없으면 우리에게는 나라도 없습니다. 그런 것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모든 것에는 절대 기준이 있습니다.
야구 경기에도 절대 기준이 있습니다. 심판입니다. 그렇습니다. 심판이 스트라이크라고 하면 그것이 스트라이크입니다. 여러분이 뭐라고 하든, 제가 어떻게 생각하든, 제가 어떻게 보았든, 여러분이 어떻게 보았든 상관없습니다. 심판이 한 말이 기준입니다. 절대 기준입니다. 심판이 스트라이크라고 하면 여러분은 동의해야 합니다. 그렇게, 스트라이크라고 기록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심판이 없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다면 누구 말이 옳겠습니까? 한 사람이 “스트라이크였어.” 합니다. 다른 사람은 “스트라이크가 아니었어. 볼이었어. 그건...” 합니다. 그러면 혼란에 빠집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게 됩니다.
어딘가에는 누군가의 말이 최종적인 말이 되는 곳이 있어야 합니다. 아멘! 지금 정말 기분이 좋습니다. 영광, 할렐루야! 최종적인 무언가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참으로 기쁩니다. 오, 그것이 죄인지 아닌지 말해 줄 수 있는 분이 계십니다. 그것이 참으로 기쁩니다. 절대 기준이 있어서 기쁩니다. 논쟁은 없습니다. 논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심판이 “스트라이크”라고 했으면 그런 것입니다. 마음에 스트라이크라고 적어 두고 계속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면 그대로입니다! 논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대로입니다. 그분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절대 기준입니다.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라.” 하셨으면 그대로 해야 합니다. 논쟁할 일이 없습니다. 누군가 “글쎄요, 그건 아니었...” 합니다.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으로 결론이 납니다. 그것이 참된 신자의 절대 기준입니다.
그런 것이 없다면 어떻겠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감리교가 옳겠습니까? 침례교, 장로교, 루터교, 아니면 무엇이 옳겠습니까? 아시겠죠? 우리는... 그래서 혼란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 절대 기준을 놓아 버렸습니다. 그래서 다른 별들을 따라 헤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절대 기준은 있습니다. 절대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반드시 절대 기준이 있어야 하며, 절대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든 상관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야구 경기에 심판이 없다면 모두 서로 머리채를 잡아당기며 다투고 싸울 것입니다. 아시겠죠? 그래서 그리스도인 신앙에 절대 기준이 필요합니다. 이 머리채를 잡아당기고 다투고 싸우는 일을 멈추기 위해서입니다. 말씀이 그렇게 말했으면 그것으로 결론이 납니다. 더하지도 빼지도 말고 그대로 두십시오.
교통에도 절대 기준이 있습니다. 정지 신호등, 곧 교통 신호입니다. 어느 날 아침 그것이 작동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아, 여러분! 그런 상황에 처해 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있습니다. 운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랬을 겁니다. 신호등이 작동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모두 다툽니다. 차를 몰고 와서는 한 사람이 “내가 먼저 왔어.” 합니다. 그러면 또 “이봐요. 나는 출근해야 한단 말이에요.” 합니다. 아, 여러분! 여자들은 손가방을 휘두르고 남자들은 주먹질하며 싸우고... 혼란도 그런 혼란이 없습니다! 절대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무언가가 “이것이 옳다.” 하면 그것으로 끝나야 합니다. 신호가 “정지”라고 하면 멈추라는 뜻입니다. “진행”이라고 하면 가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문제가 생깁니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그렇습니다. 멈출 때가 있고 나아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절대 기준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통 신호가 켜져 있지 않으면 교통이 꽉 막힙니다. 오늘날 저 종교계의 펜타곤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믿는 체하는 자들, 믿지 않는 자들, 온갖 것이 한데 뒤엉켜 막혀 있습니다. 그저 교통 체증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절대 기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쪽에서는 “우리가 절대 기준입니다.” 하고, 다른 쪽에서는 “우리가 절대 기준입니다.” 합니다. 하나님께서 절대 기준이십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것 외의 모든 절대 기준은 거짓이라 할지어다. 내 것이 진리니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신앙의 절대 기준은 거기에 있습니다. 모든 논쟁이 거기서 끝납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옳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에는 절대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오늘날의 교회들도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교회는 자기 나름의 절대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각자 자기 것이 있습니다. 재판관들 시대와 비슷합니다. 사람마다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아시겠죠? 그때는 선지자들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입니다. 말씀이 절대 기준입니다. 그들은 자기 나름의 절대 기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각자 자신들이 진리이며 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진리요 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진리요 길이라고, 진리요 길이요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그분이 말씀이십니다. 그러니 절대 기준은 거기에 있습니다. 교파의 절대 기준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버리십시오.
사람은 자기 눈에 옳은 일을 하지만, 하나님께는 사람이 행해야 할 길이 있습니다. 아시겠죠?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선지자들이 없을 때 사람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했습니다. 이 시대도 그렇게 되어 왔습니다. 각자 “나는 여기 소속입니다.” 합니다. “그리스도인이십니까?” “저는 장로교인입니다.” “제가 여쭌 것은 그리스도인이시냐는 것입니다.” 어떤 아가씨는 “분명히 말씀드리겠는데, 저는 매일 밤 촛불을 켭니다.” 했습니다. 또 어떤 남자는... 기도 줄에서 제가 그리스도인인지 물었더니 “나는 미국인입니다. 감히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 했습니다. 그것이 무슨 상관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아시겠죠? 그들은 국가에 매여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조직과 교리에 매여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최종 기준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회심하기 전에 이것을 보았습니다. 교회가 저를 붙잡기 전에 하나님께서 저를 붙잡으신 것이 기쁩니다. 그래서 저는 알았습니다. 제가...
훌륭한 침례교 목사인 네일러 형제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지금은 영광 가운데 계십니다. 그분이 제게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하나님을 찾으려고 애쓸 때 많은 사람이 제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설교자는 자기들에게 가입하기를 원했고, 그런 일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나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이다”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도 괜찮습니다. “나는 침례교인이다.” 그것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그것보다 조금 더 확실한 무언가가 있어야 했습니다. 각자가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어딘가에 누군가가 계신다. 어딘가에는 참된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제게는 절대 기준이 필요했고,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저는 말씀에서 그분이 말씀이시라는 것을 읽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입니다. 그리고 “이 절대 기준 위에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분의 말씀 그대로 믿었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9절은 “누구든지 이것에서 한 마디를 빼거나, 여기에 한 마디를 더하면...” 하고 말합니다. 그것이 절대 기준입니다. 그것으로 모든 다툼이 끝납니다. 이것이 절대 기준입니다. “누구든지 여기서 무언가를 빼거나 여기에 무언가를 더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생명책에서 그의 부분을 빼리라.” 그러므로 그것이 절대 기준이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저는 이 “모든 말씀”이어야 함을 알았습니다. “훈계 위에 훈계, 줄 위에 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되어야... 기록된 그대로 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그분은 말씀이십니다.] 내 말들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원하는 바를 구할 수 있느니라.” 저는 그때 알았습니다. 그리스도인 신앙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분이 말씀이시며, 말씀을 받아들임으로 그분을 통해 말씀이 살아 나타났다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원하는 바를 구하라.” 하신 것을 알았습니다. 여러분이 말씀 안에 있고 말씀의 일부라면, 말씀이 구하라고 하는 것만 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사는 시대를 알고 그에 맞게 구하십시오. 그러므로 다시 주제로 돌아가면, 그것은... 지금은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매여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그분의 말씀으로 그분께 매여 있습니다. 그분은 제 절대 기준이십니다. 저는 이 모든 교파와 그런 것들이 자기 나름의 절대 기준을 가지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각자 자기 나름의 절대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톨릭에서는 교황이 무슨 말을 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것이 가톨릭교회의 절대 기준입니다. 사제가 뭐라고 하든, 주교가 뭐라고 하든, 추기경이 뭐라고 하든 상관없습니다. 교황이 말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것이 절대 기준입니다. 그렇습니다. 감리교회와 많은 개신교 교파에서는 감독이 하는 말이 절대 기준입니다. 그것으로 끝입니다. 신조가 하는 말이 절대 기준입니다. 오순절교인들 가운데서는 총감독이 하는 말입니다. 이 사람을 부흥회에 초청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를 결정하는 그 말입니다. 그것이 절대 기준입니다. 그 사람의 말에 동의하지 않으면 조직에서 쫓겨납니다. 보십시오. 말씀은 전혀 고려되지 않습니다. 아시겠죠? 이런 절대 기준들이 있고, 각자 자기 나름의 절대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저는 신성모독을 하려는 뜻으로 이 말을 하지 않습니다. 진실이기에 말합니다. 사도행전 20장 24절에서 바울이 이렇게 말했을 때와 같은 심정입니다. “이 일들 중 어떤 것도 나를 움직이지 못합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교황이든 감독이든 총감독이든 자문하는 사람이든, 제도든 무엇이든, 저는 이런 절대 기준들 때문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 일들 중 어떤 것도 저를 움직이지 못합니다. 그들이 “우리는 협...” 하고 말해도 상관없습니다. 조금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 가운데 나타난 그분의 말씀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저는 거기에 매여 있습니다. 그것이 제 닻입니다. 저는 그 안에 닻을 내렸습니다. 제가... 바울은 “내가 길에서 그분을 만난 뒤로 돌아섰습니다. 그분께서 나를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오, 그분께서 저를 얼마나 바로잡아 주셨는지요. 저를 얼마나 많이 바로잡으셔야 했는지요. 하지만 그분께서 저를 바로잡아 주신 뒤로 저는 거기에 매였습니다. 말씀이 진리임을 보았습니다. 말씀에 어긋나는 모든 것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아십니까? 그분께서 저를 구원하신 데에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을 구원하신 데에도 목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분의 뜻에 따라 그분의 뜻을 행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분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왜 그렇게 하셨는지 저는 모릅니다. 거기에 더하지도 빼지도 말아야 합니다... 말씀드렸듯이 요한계시록 22장 19절은 “그렇게 하지 말라.” 하고 말합니다. 그분이 우리의 절대 기준이시라면 달리 될 수 없습니다. 달리 될 길이 없습니다. 그분이 절대 기준, 마지막 말이 되셔야 합니다. 여러분, 제가 구원받을 때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이 수백만 명이었습니다. 그분께서 저를 구원하신 데에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형제들 가운데서 흔히 별난 사람입니다. 예정, 뱀의 씨,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침례, 그리고 이 모든 다른 것들을 믿으니, 마치... 또한 환상과 돌아온 그리스도의 권능, 조직들을 정죄하는 일과 그런 것들 때문에 저는 별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분께는 저를 구원하신 이유와 그렇게 하신 목적이 있었습니다. 다른 수백만 명이 죄 가운데 있을 때 그분께서 저를 구원하셨습니다. 어떤 이유가 있어서 저를 구원하셨습니다. 저를 구원하실 때 그 분야에는 교육받은 사람들, 똑똑한 사람들, 신학자들, 감독들과 박사들,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어떤 이유가 있어서 저를 구원하셨습니다.
저는 말씀이 절대 기준임을 봅니다. 저는 거기에 매여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분께는 그렇게 하신 이유가 있었고, 저는 그 이유를 붙들기로 결심했습니다. 다른 누가 뭐라고 하든 저는 그들과 교제를 끊거나 그들을 깎아내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무엇에 매여 있는지는 압니다. 그분께서 제가 이렇기를 원하셨습니다. 저를 이렇게 두셨습니다. 저는 목적이 있어서 이렇게 만들어졌습니다. 제게는 이 모든 성품들과 그런 것들, 또 이 모든 쓸모없는 것들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그분께서 그것을 제 안에서 파내시고 그 자리에 무언가를 넣으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분의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절대 기준이었습니다. 절대 기준이었습니다. 죽음을 무서워하던 사람들에게 모든 두려움의 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죽음은 절대 기준입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욥도 죽음을 두려워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환상을 보았을 때... 그는 모든 것이 사라졌음을 알았습니다. 가족과 자녀들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심지어 아내도 그의 종기에서 나는 악취 때문에 등을 돌렸습니다. 그는 집 밖 잿더미 위에 앉아 종기를 긁었습니다. 아내마저 “왜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지 않습니까?” 했습니다. 그는 “당신은 어리석은 여자처럼 말하는군요.” 했습니다. 아시겠죠? 그러다가 엘리후가 그에게 말했을 때... 언젠가 여러분에게 “엘리후”라는 이름을 풀어 설명하고 그가 그리스도였음을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그가 이런 처지에 있고 모든 것이 그에게 등을 돌렸을 때, 그는 그 의로우신 분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 그 틈에 서 줄 사람, 한 손은 죄 많은 사람에게, 다른 손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얹고 그 사이에 서 줄 사람을 찾고 싶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4천 년 뒤의 그 일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그의 절대 기준이었습니다. 그는 일어나 몸을 털었습니다. 할렐루야! 죽음이 두렵거든 일어나 몸을 터십시오. 말씀을 들여다보고 하나님의 환상이 무엇인지 보십시오.
그는 그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내 구속자께서 살아 계심을 내가 아노라. 마지막 날들에 그분께서 이 땅 위에 서시리니, 나는 거기에 나를 매어 둡니다. 살갗의 벌레들이 이 몸을 멸할지라도 내가 여전히 내 육체 안에서 하나님을 보리니, 내가 몸소 그분을 보리라. 나는 거기에 매여 있습니다.” 그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는 자연법칙을 살펴보았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자연법칙의 연속성, 말씀의 연속성,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의 연속성에 관해 말씀드린 것처럼 모든 것에는 연속성이 있습니다. 그는 욥기 14장에서 물었습니다. “나무는 죽어도 소망이 있고, 꽃도 죽어도 소망이 있고...” 그런 식으로 말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누워 숨을 거두고 소멸됩니다. 아들들이 와서 그를 공경하여도 그가 알지 못합니다. 오,” 하고 그는 말했습니다. “주의 진노가 지나갈 때까지 나를 무덤에 감추시고, 숨겨 주시며 은밀한 곳에 지켜 주신다면!” 그는 죽음을 두려워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미리 보았을 때... 선지자였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보았을 때, 그는 “내 구속자께서 살아 계신다!” 하고 외쳤습니다. 보십시오. 그분을 “구속자”라고 불렀습니다. 보십시오. “내 구속자께서 살아 계시며 마지막 날들에 그분께서 땅 위에 서실 것을 내가 아노라. 내 살갗이 없어진 뒤 벌레들이 이 몸을 멸할지라도 내가 여전히 내 육체 안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하나님과 구속자는 같은 분이셨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보리니, 내가 몸소 그분을 보리라. 내 눈이 바라볼 것이며 다른 이는 아니리라. [아멘!] 그 구속자 하나님 외에는 다른 누구도 아니리라.” 제 눈이 바라보는 분이 바로 그분입니다. 그분은 절대 기준이십니다. 바로 그 절대 기준이십니다. 그분은 죽음에 대한 모든 두려움을 없애십니다. 모든 두려움을 없애십니다...
히브리서 2장 14절과 15절을 보십시오.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 한 사람으로서 죽으시려고 사람의 형태를 취하셨습니다. 이 구속자께서 사람의 형태를 취하시고 내려와 사람이 되신 것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 어떻게 그렇게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왜 사람이 되셨습니까? 사람이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치르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부활절 아침 그분은 사망과 지옥과 무덤의 열쇠들을 가지고 나오셨습니다. 아멘. 십자가에서 죽으실 수 있었던 하나님을 무덤은 붙들어 둘 수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지옥도 그분을 붙들어 둘 수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그분을 붙들어 둘 수 없었습니다. 그분은 일어나셨습니다. 열쇠들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사망과 지옥과 무덤을 모두 정복하셨기에 정복자로 일어나셨습니다. 지상에 계실 때 질병을 정복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정복하셨습니다. 미신을 정복하셨습니다. 정복해야 할 모든 것을 정복하시고, 사망과 지옥과 무덤의 열쇠들을 옆구리에서 짤랑거리며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셔서 사람들에게 은사들을 주시고, 오순절 날 돌아와 베드로에게, 교회에게 그것들을 넘겨주셨습니다. 아멘! 그분은 우리의 절대 기준이십니다. 죽음에 대한 모든 두려움은... 그분이 살아 계시므로 우리도 삽니다.
로마서 8장 1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는도다.” 우리가 보니... 로마서 5장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보니... 그분은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믿는 그 믿음이 옳음을 확증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셋째 날에 그분을 일으키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옳음을 확증하시려고 그분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러면 그분께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우리의 믿음이 그것을 믿기 때문에, 의롭게 하시는 분을 다시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일어났으므로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성령, 곧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오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딸들이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의 처소들에 앉아 있습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부활로 우리를 의롭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의롭게 하여 알게 해 주었습니다... 지금 우리 안에 구원의 보증이 있고,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고동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확신을 주는 말씀을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분이 말씀이신데 말입니다. 성령께서 그 안에 계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여전히 그 북극성입니다. 그... 그리스도께서 그 북극성이시며, 성령은 믿는 사람을 곧바로 북극성으로 향하게 하시는, 의롭게 하심입니다.
성령은 언제나 말씀을 가리키십니다. 신조나 교파를 가리킨다면 그것은 성령이 아닙니다. 그분은 그렇게 하실 수 없습니다. 그분의 말씀에서 벗어나도록 가리키실 수 없습니다. 그 말씀을 확증하고 그 말씀을 확실한 것으로 세우기 위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아멘! 그분은 친히 그 말씀 안으로 오실 수 있도록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그 말씀을 다시 살아 있게 하시는, 생명을 주는 생명이십니다. 그것이 그분께서 죽으신 목적이었습니다. 계속해서 자신의 교회를 통해 자신을 나타내시고, 각 시대에 걸쳐 모든 말씀이 꼭 이루어져야 할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그 기계장치, 곧 교회의 기계장치를 움직이는 동력이십니다. 그 기계장치란 무엇입니까? 사도들, 선지자들, 교사들, 그런 이들입니다. 그분은 그것을 움직이는 동력이시며, 그것은 어떤 특정한 동력으로 작동합니다. 그것은 이를테면... 그분은 휘발유에 불을 붙이는 불이십니다. 그분은 연소실 안에 있는 불이십니다. 휘발유, 곧 말씀이 그 연소실에 부어지면 불을 붙이시는 분이 그분입니다. 그 말씀을 확증하시는 분이 그분입니다. 그분은 부활의 권능이십니다.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불이십니다. 바로 그것이 그분이십니다.
디모데전서 3장 16절은 “논쟁의 여지가 없이 하나님의 성품의 신비는 위대하도다.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들려서 영광으로 들어가셨느니라.” 하고 말합니다. 그분은 죄인의 자리를 대신하시려고 오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하나님께서 셋째 날 그분을 일으키신 것은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편에 높여지셔서 우리의... 우리의 연약함을 위해 중보하시는 중보자이십니다. 우리가 그분께 그것을 고백하고 자아에 대해 죽을 때, 그분의 말씀, 곧 약속을 우리 안에 다시 두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이 그 말씀을 살아 있게 합니다. 말씀을 살리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이것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모든 논쟁과 다툼이 끝날 것입니다. 그것이 대법원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북극성입니다. 할렐루야! 그것이 모든 다툼의 끝입니다. 모든 질문의 끝입니다. 모든 것의 끝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절대 기준입니다. 거기에 자신을 매어 두십시오. 바울은 말했습니다. “현재 있는 것도, 장래 있을 것도, 죽음도, 질병도, 벌거벗음도, 위험도, 아무것도 우리를 거기서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절대 기준에 매여 있습니다. 그는 “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시요 죽는 것이 이득이라.” 했습니다. 저것 외에는 아무것도 버텨 주지 못합니다. 그것이 절대 기준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절대 기준이십니다. 그분께서 우리 안에 일어나셨기에 우리에게 부활의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압니까? 그분께서 살아 계십니다. 그분은 지상에 계셨을 때 하셨던 일을 여기서 정확히 행하십니다. 저기 우리가 사진으로 가지고 있는 바로 그 불기둥이십니다. 교회 안에 계신 바로 그분입니다. 그분은 오늘 여기 계시며 이 몸 안에서 그때 하셨던 것과 정확히 똑같이 일하시고 행동하십니다. 수박 덩굴의 생명을 호박에 넣으면, 그 호박은 다시는 호박을 맺지 않을 것입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수박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안의 생명이 수박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의...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들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원하는 바를 구하라.” 하셨습니다. 그러면 수박을 얻게 됩니다. 아멘. 절대 기준입니다. 저는 그것이 진리임을 압니다. 제 혼을 거기에 매어 두었고 그것이 진리임을 압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절대 기준이십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서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채여 올라가 공중에서 그분을 만나리라는 말씀을 읽습니다. 오, 그분의 책에 있는 모든 말씀에 제 가슴이 얼마나 고동치는지요. 아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공중으로 채여 올라가 사랑하는 이들을 만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 마음 깊은 곳의 말씀이 “아멘” 합니다. 그 안에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내가 주께 죄를 짓지 아니하려고 주의 말씀을 내 마음속에 숨겼나이다. 그 말씀들을 내 손가락들에, 내 침대 기둥에 묶습니다. 주께서는 항상 제 앞에 계십니다. 저는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참으로 내가 사망의 그늘진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악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주께서 저의 절대 기준이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곳으로 내려가면 주께서 저를 끌어내 주실 것입니다. 제 배를 타고 깊은 물속으로 들어갈 때 주께서 저의 닻이십니다. 아멘! 주께서는 저 휘장 너머에 계십니다. 폭풍 속에서 저를 이끌어 가실 분이십니다. 거기 계실 분, 영광 가운데 있는 저의 닻이십니다. 제가 골짜기의 그림자, 죽음의 그림자로 내려갈 때, 요르단에 내려가 건너야 할 때, 그분은 저의 절대 기준이십니다. 저는 건너편에 계신 부활하신 분께 매여 있습니다. 그분께서 저를 위험한 물결 속에서 끌어내실 것입니다.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시므로 내가 해악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라. 아멘! 폭풍이 몰아치게 내버려 두십시오. 삶이든 죽음이든 그 무엇이든, 아무것도 저를 떼어 놓지 못합니다. 저는 그 기둥에 매여 있습니다. 그 기둥은 버텨 줍니다. 휘장 안에서 버텨 줍니다. 닻을 내렸습니다. 저 너머 하나님께 닻을 내렸습니다. 제 마음에도 닻을 내렸습니다. 저를 그 약속으로 움직이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될 것이다’, ‘이었다’, ‘언젠가 될 것이다’가 아니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누구든지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죽음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두십시오. 저는 확신하므로 죽음은 결코 저를 괴롭히지 못합니다. 확신합니다. 질병이 저를 데려갈 수도 있고, 언젠가 총알이 저를 데려갈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 될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제게 무슨 상관입니까? 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시요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 오, 여러분! 저는 확고히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죽음의 강 건너 저편에 앉아 계신 그분을 압니다. 언젠가 그분께서 저를 자신의 존전으로 끌어 주실 것입니다. 저는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받아들여 그분의 의로 의롭게 되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육체가 되신 하나님, 여전히 우리 안에 육체로 계시며, 여전히 우리 육체 안에 영으로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아멘. 그분은 제 절대 기준이십니다. 제 전부이십니다. 그 밖의 어떤 것도... 제 손에 가져올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는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 외에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 외에는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습니다. 제 마음은 그분의 약속 하나하나에 “아멘” 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분의 성령이 저를 말씀으로 인도하시는 나침반임을 압니다.
그 환상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말씀에 그대로 있는 것 외에는 제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오, 형제님, 거기서 저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그날 밤 그분께서 그것에 관해 제게 말씀하셨을 때... 저는 그 환상들을 지켜보았습니다. 여러분의 주의를 환기하겠습니다. 그 환상이 말씀에 어긋나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까?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제가 자신을 매어 둔 기둥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 환상 속에서 저 강 건너편에 있는 사랑하는 이들을 보았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그곳은 있습니다! 저는 그 약속의 땅으로 가고 있습니다. 언젠가 거기서 만나야 합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그분은 제 절대 기준이십니다. 제 태양이십니다. 제 생명이십니다. 제가 자신을 매어 둔 기둥이시며 제 북극성이십니다. 제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되십니다. 제게는 그런 분이십니다. 제 생명이십니다.
교파들이요? 제게는, 여러분의 마음을 상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말씀은 양날 달린 검과 같습니다. 베지 않고는 밀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아시겠죠? 특히 어둠을 가르고 들어갈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보십시오. 교파들은 다른 별들과 같습니다. 세상이 도는 대로 움직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이 가는 방향으로 갑니다. 자기 교회 여자들이 머리를 자르고 반바지를 입고 그 밖의 모든 것을 하도록 허용합니다. 그저 할리우드와 다른 모든 것을 따라 움직입니다. 하지만 오, 형제님, 그것은 여전히 진리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은 여전히 진리입니다. 제 절대 기준입니다. 그 말씀이 말하는 것은 진리입니다. 교파들이 원하는 곳으로 움직이도록 내버려 두십시오. 그들이 어떤 칭호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깎아내리려 한다면 그것은 그들 소관입니다. 하지만 제게는, 하늘 아래에서 우리가 구원받을 다른 이름이 사람들 가운데 주어진 적이 없습니다. 제게는 그것이 기초가 되는 말씀입니다. 모퉁잇돌이 있는 곳이 거기입니다. 저는 어떤 교파를 따라서도 움직이고 싶지 않습니다.
제 안에는 나침반이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저를 곧바로 절대 기준으로 향하게 하십니다. “하늘과 땅은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저는 그것을 제 마음에 숨겨 두었고, 성령께서 저를 곧바로 거기로 향하게 하셨습니다. 저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것이 제 절대 기준입니다. 그저 그대로 두십시오. 저는 그대로이기를 원합니다. 오, 여러분! 이제 형제님, 자매님, 그분을 여러분의 절대 기준으로 삼으십시오. 그렇습니다.
얼마 전 제가 여기서 어려움을 겪었을 때, 아내와 자녀들과 모든 것을 잃었을 때, 누군가 제게 물었습니다. “그래도 신앙을 지키셨습니까?” 저는 “아닙니다. 신앙이 저를 지켜 주었습니다.” 했습니다. 아시겠죠? 저는 언젠가 그들을 다시 만나리라는 것을 알게 해 주는 절대 기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멘. 그 절대 기준이 없었다면 견뎌 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어디에 매여 있는지가 제게 큰 차이를 가져왔습니다. 그들을 다시 만나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은혜로 저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하신 분께 매여 있습니다. “나는 있었다”가 아니라 “나는 있다”입니다. 언제나 현재에 계시고, 모든 것을 아시며, 모든... 전능하시고, 무한하신 분, 그분이십니다. “나는 있었다”가 아니라 “나는 있다”입니다. 그분은 여전히 부활이십니다. 여전히 북극성이십니다. 여전히 제 모든 것이십니다.
모세에게는 절대 기준이 있었습니다. 불타는 떨기나무를 만났을 때 그것이 그에게 절대 기준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여호수아가... 오, 여러분, 때로는 절대 기준을 붙들면 그 절대 기준이 여러분을 역설로 이끌어 갑니다.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역설이란 실재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역설입니다. 여호수아가 그곳에 서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있음을 보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곳으로 건너가 그 땅을 차지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 사람들을 모두 무찌르고 이스라엘을 그 땅에 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적군이 패주하여 들판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러다가 어느새... 그는 적군을 흩뜨려 놓기만 하면 이겼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해 놓았는데 해가 지고 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절대 기준인 하나님의 말씀, 곧 창조주께 매여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꼭 해야 할 일이 있었고, 그는 그 일에 매여 있었습니다. 아멘.
때로는 그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즐겁지 않습니다. 마음을 상하게 하고, 베고, 쳐 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 기준입니다. 그에게는 필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해야, 거기 서 있어라. 저기서 멈추어 서라. 달아, 너도 바로 거기 머물러라.” 그러자 24시간 동안 멈추어 서 있었습니다. 오, 정말 역설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는 사명을 받아 절대 기준에 매여 있었습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요한은 비둘기가 그분 위에 내려올 때 자신이 보게 되리라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제가 다마스쿠스로 내려가던 길의 바울처럼 그 불기둥을 보았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절대 기준임을 알았습니다.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부흥이 온 땅을 휩쓸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두 번째 오심에 앞서 가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금도 저는 그것을 믿습니다. 역설이었지만 제 절대 기준입니다. 분명히 역설이었습니다. 불기둥이 저 하늘에 떠 있고 신문과 온갖 곳에서 그것을 사진으로 찍는 일은 말입니다.
얼마 전 3월 15일에 있었던 일도 역설이었습니다. 아니, 5월 15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지난번 3월 15일입니다. 그보다 서너 달 전에 “여러분, 지금은 몇 시입니까?”에서 우리가 그곳으로 가서 일곱 천사를 만나고 돌아오면 일곱 봉인의 책이 열리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프레드 소스먼 형제님과 함께 서 있었습니다. 지금 저기서 “아멘” 하신 분입니다. 그분 옆에 서서, 그 지역을 뒤흔들 소리가 나리라고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그 일이 거기서 일어날 것입니다. 주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고 말했습니다. 녹음테이프에 있습니다. 테이프들에, 피닉스에서부터 여러 곳의 테이프들에 있습니다. “주의 말씀이 이러하시다”입니다.
어느 날 그곳에 서서 다리에 붙은 도꼬마리 열매, 아니 작은 불헤더 열매 같은 것을 떼어 내고 있었는데, 그때 일곱 천사가 하늘에서 뚫고 나와 그곳을 뒤흔들었습니다. 50파운드나 60파운드 되는 바위들이 산비탈을 굴러 내려올 정도였습니다. 거기에 일곱 천사가 서 있었습니다. 돌아가서 이 메시지들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었습니다. 한 명씩 만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 주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높은 곳으로 올라갈 때 하늘로 30마일 높이까지 올라갔습니다. 같은 날 과학계에서 그 사진을 찍었고, 그 사진이 전 세계로 퍼졌습니다. 역설이지만 절대 기준이었습니다. 그것은 저를 예수 그리스도께 더 단단히 매어 주었고, 제 삶을 그분 안으로 감아 넣었습니다. 이상하게 보였다는 것을 압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바울이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은 역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의 검은 마음을 바꾸시고 자신의 피로 희게 씻으시는 것도 역설입니다. 분명히 역설입니다. 여러분은 역설을 믿습니까? 그 역설이 하나님의 말씀에 맞는다면 여러분의 절대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의 회심은 역설이었으며 그의 절대 기준이 되었습니다.
얼마 전 어느 작은 곳에서 나이 든 약사와 앉아 이야기하던 때가 생각납니다. 그분이 “브래넘 형제님, 한 가지 여쭈고 싶습니다.” 했습니다. 그분도 침례교인이었습니다. “역설을 믿으십니까?” 하더군요. 저는 “그렇습니다. 물론 믿습니다.” 했습니다. 그분이 “형제님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도 이 이야기를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형제님은 이것을 믿으실 줄 압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불경기 때에는 병자들을 위한 약을 받으려면 카운티에서 발급하는 지급 허가서가 있어야 했습니다. 어느 날 저는 이 약국 뒤쪽에 앉아 있었고, 아들이 손님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한 여인이 들어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여인은... 곧 아기를 낳겠구나 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가엾게도 거의 서 있지도 못했습니다. 남편도 있었는데 두 사람 모두 옷차림이 초라했습니다. 여인은 계산대 옆면에 기대어 있었습니다. 남편이 제 아들에게 다가가 말했습니다. ‘여기 의사 선생님이 써 주신 처방전이 있습니다. 이 약을 지어 주셔서 아내를 집으로 데려갈 수 있게 해 주시겠습니까? 아내를 그 줄에 세워 두려고 했습니다. 저 아래 길을 보십시오. 네다섯 시간은 걸릴 겁니다. 보시다시피 아내는 이제 서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젊은 아들이 말했습니다. ‘선생님, 그렇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먼저 그 지급 허가서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규정에 어긋납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는 뒤에 앉아 아들이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아시겠죠? 그래서 말했습니다. “잠깐만, 얘야, 무슨 일이냐?” 그러고는 그곳으로 걸어갔습니다. 그 노인은 참된 그리스도인이었고, 참으로 경건한 노인이었습니다. 그분이 “형제님, 무슨 일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이 말했습니다. “선생님, 제 아내가 곧 아기를 낳으려고 합니다. 저는... 여기 의사 선생님이 써 주신 약 처방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내가 지금 당장 이 약을 먹어야 합니다. 아내를 데리고 아래쪽 그 방에 가서 줄을 서려고 했지만, 저는... 이 줄을 보십시오. 오늘 오후에도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약을 지어 주실 수 있을까 해서 왔습니다. 제가 거기 내려가 줄을 서겠습니다. 돈을 받아다 드리겠습니다. 카운티에서 약값을 지급해 주는 허가서 말입니다.” 그분은 “물론입니다, 선생님. 약을 지어 드리겠습니다.” 했습니다. 그리고 처방전을 내려놓고 뒤쪽으로 갔습니다. 아들은 계속해서 다른 손님을 받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그분은 말했습니다. “그 여인이 두세 번 눈을 들어 보았습니다. 거기에 서 있었는데 얼굴에는 땀이 맺혀 있었습니다. 아주 아프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남편이 거기 서서 팔로 아내를 감싸고는 ‘여보, 조금만 더 견뎌요. 친절한 약사님이 우리 약을 지어 주실 거요.’ 하고 말했습니다.”
그분이 말했습니다. “최대한 빨리 약을 만들어 처방대로 조제했습니다. 그런데 약을 그 여인의 손에 건네려고 할 때, 브래넘 형제님, 보니 제가 못 자국이 난 손에 약을 놓고 있었습니다. 그분의 이마에 가시가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저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보았습니다.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이 나의 어린 자들 중 가장 작은 자에게’ 한 것은 그분께 한 것이라는 것을요.” 그분은 “이것을 믿으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선생님, 온 마음으로 믿습니다. 한 마디도 빠짐없이 믿습니다.” 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그분은 “그 여인에게 그렇게 해 드린 일 때문에 그때부터 그리스도께서는 제게 더욱 소중한 분이 되셨습니다. 역설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틀림없이 이런 일을 믿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형제님도 그런 체험을 하셨다는 것을 아니까 형제님께만 말씀드리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 마르틴의 이야기를 읽었던 것이 생각납니다.” 그는 소년이었을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의 가족은 이교도였고, 아버지는... 일종의, 아, 잘 모르겠습니다... 군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집안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뒤를 따르는 것이 마땅했습니다. 이야기에 따르면 어느 날 그가 도시를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어디였는지 잊었습니다만, 그는 프랑스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통로를 지나가는데, 거기에 한 노인이 누워 얼어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날씨가 몹시 추웠습니다. 사람들은 지나가면서 아무것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곳에 멈추어 섰습니다. 스스로 신자라고 분명하게 고백하는 사람들이 그곳을 지나면서도 그 노인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습니다. 노인은 몸을 감쌀 무언가를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얼어 죽어 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성 마르틴은 그쪽으로 갔습니다. 아직 회심하기 전입니다. 군인이었던 그는 자기 겉옷을 벗어 반으로 잘랐습니다. 그 떠돌이 노인을 그 반쪽으로 감싸 주고, 나머지 반쪽은 자기가 둘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비웃으며 “반쪽짜리 겉옷을 입은 우스운 군인이군.” 했습니다. 아시겠죠? 그것은 사람이 이상한 일을 하게 만듭니다. 그의 안에는 하나님이 계신다고 믿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어 잠깐 잠을 잔 뒤에 그가 깨어났습니다. 누군가 그를 깨웠습니다. 그가 보았습니다. 침대 곁에 서 계신 분은... 그곳에 예수님께서 서 계셨는데, 그 겉옷의 다른 반쪽을 두르고 계셨습니다. 그것이 성 마르틴의 시작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다는 절대 기준이 있었습니다. “너희가 이 나의 어린 자들에게 하는 것은 내게 하는 것이니라.” 형제님, 저는 그 절대 기준에 매여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압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도...
오늘 아침에는 제단 앞으로 나오시라고 초청하는 대신, 헌신하도록 초청하고 싶습니다. 이 절대 기준께 우리 자신을 헌신합시다. 말씀이 하나님의 절대 기준이라고 믿습니까? 그분이 언제나 그러하셨듯 오늘도 동일하시다고 믿습니까? 여기에 목회자들이 계십니다. 여러분의 삶을 헌신하고 싶지 않습니까? 그저... 절대 기준을 붙듭시다. 오늘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친교 단체의 회원증이나 자격증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입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원합니다. 우리는 회원증에 매여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매여 있습니다. 그것을 믿습니까? 이제 일어나서 우리 삶을 다시 헌신합시다. 제 삶도 그렇게 하기를 원합니다. 저는 저 자신을 새롭게 매고 있습니다. 매듭이 잘 묶여 있는지 확인하고, 제 절대 기준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주님, 제 안에 주의 말씀 외에 무엇이든 있다면 제거해 주옵소서. 저는 주님 외에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주님 외에는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습니다. 이제 각자 자기 방식대로...
이번 주 내내 여러분에게 말씀드려 왔습니다. 진리를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진리를 확증하셨습니다. 거듭, 거듭, 거듭 그렇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절대 기준이 무엇인지 압니다. 이제 여러분과 제가 함께, 모든 여자들과 모든 남자들, 소년 소녀들, 누구든지... 모든 성가대원과 여기 위에 계신 모든 분들, 어디에 계시든 함께합시다. 지하실에 계신 분들, 발코니에 계신 분들, 벽 쪽에 계신 분들, 뒤쪽 측면석에 계신 분들, 어디에 있든 예수님을 우리의 절대 기준으로 삼읍시다! 우리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골짜기에 이르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분 외에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분이 제 삶 안에서 일어나셨고, 저는 그분이 실재하심을 알기에 그분이 제 절대 기준이십니다.
이제 손을 들고 기도합시다. 헌신 예배를 드립시다. 주 예수님, 주의 말씀은 옛적부터 있습니다. 그것은 시작이며 끝입니다. 이제 저는 이 회중과 함께 오늘 이 강단에서 저 자신을 새롭게 헌신합니다. 이 교회, 라이프 태버내클의 헌신을 위해 간구합니다. 모든 의견 차이를 해결하시고, 다 사라지게 하시며,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로 두게 하옵소서. 염려하며 어떤 일이 일어나리라고 생각했던 복음의 사역자들, 오 하나님, 오늘 아침 우리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 자신을 매며,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결심합니다. 오 북극성이여, 오 성령이여, 오 하나님의 나침반이여, 지금 모든 마음에 임하옵소서. 우리는 주님께 우리 자신을 헌신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아멘! 자, 형제님.